주석 성경 > 사도행전

13장

바르나바와 사울이 선교사로 파견되다1)

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2)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3)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4)

2

그들이5) 주님께 예배를6)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7)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8) 나서 떠나보냈다.

키프로스에서 선교하다

4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9)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5

그리고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10) 그들은 요한을 조수로 데리고 있었다.

6

그들이 온 섬을 가로질러 파포스에 다다랐을 때에 마술사 한 사람을 만났는데, 유다인으로서 바르예수라고 하는 거짓 예언자였다.

7

그는 슬기로운 사람인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의 수행원 가운데 하나였다. 총독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다.

8

그러나 그리스 말로 마술사를 뜻하는 그 엘리마스는11) 총독이 믿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들을 반대하고 나섰다.

9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12) 성령으로 가득 차 그를 유심히 보며

10

말하였다. “온갖 사기와 온갖 기만으로 충만한 자,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당신은 언제까지 주님의 바른길을 왜곡시킬 셈이오?13)

11

이제 보시오, 주님의 손이 당신 위에 놓여 있소. 당신은 눈이 멀어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즉시 짙은 어둠이14) 그를 덮쳐, 그는 사방을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12

그때에 그 광경을 본 총독은 주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하다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15)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16)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17)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18)“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19)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20)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21)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22)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23)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24)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25)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26)

25

요한은 사명을27)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28)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29)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30)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31)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32)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33)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34)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35)

34

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리시어 다시는 죽음의 나라로36) 돌아가지 않게 하신 것을, 이렇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것들을 너희에게 주겠다.’37)

35

그래서 다른 시편에서는
‘당신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가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입니다.’38)
하였습니다.

36

다윗은 일생 동안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고 나서 잠든 다음,39) 조상들 곁에 묻혀 죽음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37

그러나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키신 그분께서는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38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40)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39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41)

40

그러니 예언서들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41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다 망해 버려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그런 일이다.42)’”

42

그들이 회당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해 달라고 청하였다.

43

회중이 흩어진 뒤에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43) 따라오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이야기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였다.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44)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45)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46)’”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47)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48)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49)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50)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51)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석
1

코르넬리우스의 세례와 안티오키아에 사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복음 선포가(11,19 앞 소제목의 각주) 이제 결실을 보게 된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이민족들의 땅 곧 소아시아 남부 지방으로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13,1─14,28). 이들을 선교사로 보내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교회를 통하여 이 일을 하신다(13,3-4절).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 교회에 자기들이 한 일을 보고하게 된다(14,27-28). 선교 일을 하는 동안 내내 하느님과 그분의 성령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해 주신다(13,9.11.52; 14,3.23.27).

2

“교사”라는 말이 사도행전에서는 여기에만 나온다(1코린 12,28; 에페 4,11; 히브 5,12; 야고 3,1 참조). 이들은 신앙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일과 관련하여 하느님께 영적 재능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언자”에 관해서는 11,27 각주 참조.

3

“어린 시절 친구”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한 낱말로서 ‘함께 자란 자’를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은 이러한 원뜻을 넘어 “어린(또는, ‘젊은’) 시절 친구”, “가까운 친구” 등의 뜻으로 쓰인다.

4

여기에서 바르나바는 명단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데 사울은 끝에 가서야 나온다. 그리고 2절과 7절에서도 바르나바 다음에 거명된다. 그러나 9절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그곳의 각주 참조).

5

“그들”은 1절의 “예언자들과 교사들”일 수도 있고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일 수도 있다.

6

“예배”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리투르기아는 본디 이교 세계에서, 부유한 한 사람이 경비를 내고 시민들이 함께 지내는 축제를 가리켰다. 유다인들은 이 낱말을 성전에서 사제들이 거행하는 예배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하였다(2역대 13,10; 로마 15,16; 히브 10,11 등). 여기에서는 공동 기도를 가리키는지, 성찬례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7

“일”이라는 말은 14,26에도 나오는데,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공동으로 부여받은 선교 사명을 가리킨다. 이 일은 15,35까지 계속된다. 바오로 본연의 선교는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8

“안수”에 관해서는 6,6 각주 참조. 이 몸짓이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임무 수행의 시작을 알린다.

9

셀레우키아는 내륙에 있는 안티오키아에서 서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면서, 안티오키아의 외항 구실을 하던 도시이다.

10

바오로는 계속 복음을 유다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선포한다(13,14; 14,1; 16,13; 17,2.10.17; 18,4.19; 19,8; 28,17.23). 이 원칙은 46절에서 명료하게 나타난다(유다인들의 이 우선권에 관해서는 3,26 각주도 참조).

11

“그리스 말로 마술사를 뜻하는 그 엘리마스는”의 직역: “엘리마스 (곧) 그 마술사는 - 사실 그의 이름은 이렇게 번역된다.”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바르예수가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마술사’를 의미하는 아람 말 할로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를 그리스 말식으로 옮기면 엘리마스가 되고 번역을 하면 “마술사”라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금까지 유다식 이름인 사울을 써 오던 저자는 앞으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른 로마식 이름인 바오로를 사용한다(이중 이름에 관해서는 9,36 각주 참조). 이렇게 이름이 바뀌는 것은 바오로가 공적으로 이교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하였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제부터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하는 선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13,42.46.50; 14,3.19-21).

13

직역: “당신은 주님의 바른 길들을 왜곡시키는 짓을 그치지 않을 것이오?”

14

“짙은 어둠”의 직역: “어둠과 암흑.” 이를 중언법(重言法)으로 이해하여 위와 같이 옮긴다. 그러나 “안개와 어둠”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15

바오로는 나중에(15,38) 요한 마르코가 이렇게 자기를 버리고 떠난 일을 문제 삼는다(12,12 각주 참조).

16

여기에서 “격려할 말씀”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9,31), 또는 사도들의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져다주는 격려를 생각하게 한다(15,31). 이 “격려”라는 말은 바오로의 서간에 자주 나온다.

17

“회당장”은 회당에서 거행되는 전례를 이끌고 전례 중의 역할을 분배하며, 회당 건물의 시설과 보수를 책임진다. 1세기 회당의 안식일 전례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셔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어라)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성경 구절의 봉독(신명 6,4-9; 11,13-21; 민수 15,37-41), 기도, 율법 곧 오경 한 단락의 봉독과 예언서 한 단락의 봉독, (통상 회당장이 합당하다고 지목하는 공동체 구성원의) 강론, 민수 6,24-26에 따른 축복이다.

18

“조용히 하라고”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이제부터 41절까지 바오로의 말씀이 계속되는데, 이는 그가 유다인들에게 한 설교 가운데에서 상세하게 전해지는 유일한 예이다(2,14 앞 소제목 각주 참조). 이 설교의 후반부에서는(26-39절)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구조가 되풀이되는데, 특히 종결 부분에서는(38-39절) 바오로 신학의 특징이 드러난다. 곧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이른바 ‘의화’(義化)이다. 그리고 첫째 부분에서는(17-25절) 스테파노의 설교와 비슷한 점들을 볼 수 있다(7,1 각주).

19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에 관해서는 10,2 각주 참조.

20

“권능의 팔”의 직역: “높은(= 치켜든) 팔.”

21

일부 수사본들에는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대신에 “그들을 돌보아 주시고”로 되어 있다.

22

그리스 말 본문에는 “그때까지 …… 걸렸습니다.”가 “약 사백오십 년.”이라고만 되어 있다. 이를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하여 번역한다. 첫째, 이집트 체류 기간 사백 년(창세 15,13; 탈출 12,40-41), 광야 생활 사십 년, 그리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까지 십 년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위의 번역은 이 가능성을 따른다. 둘째, 가나안 땅을 차지한 때부터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배를 갈 때까지, 곧 대략 기원전 1150년부터 700년까지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약 사백오십 년 동안이었습니다.”로 번역된다.

23

이 “사십 년”이라는 기간은 직접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요세푸스도 언급하는 다른 전통에서 유래한다. 바오로 자신도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서(로마 11,1; 필리 3,5), 이스라엘의 이 첫 임금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

24

‘내가 다윗을 찾아냈다.’와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는 시편 89,21과 1사무 13,14에서 따온 것이고, 끝부분은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확실하지 않다(이사 44,28 참조).

25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이 간단한 회상은(17-22절) 다윗에게서 끝난다. 23절이 말하듯,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유다인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2,25-32.34. 그리고 7,46 참조).

26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증언은(1,5; 10,37; 19,3-5) 아직 약속의 시대에 속한다(루카 16,16 각주 참조). 요한 이후, 곧 예수님과 함께 비로소 구원의 시대가 시작된다(26절).

27

“사명”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달릴 길”로서, 이 밖에도 ‘행로, 인생길, 활동’ 등을 뜻한다.

28

“그분이”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이다(루카 3,15. 그리고 요한 1,19-20; 3,28 참조).

29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의 직역: “여러분 가운데 하느님을 경외하는 분들(= 비유다인들).” 이들에 관해서는 10,2 각주 참조.

30

일부 수사본들에는 “여러분에게”로 되어 있다.

31

“……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직역: ‘목소리들’)을 (깨닫지 못하여) 그분을 단죄함으로써,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로 옮기기도 한다. 아무튼 27-29절에서는 세 가지 요소가 강조된다.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의 무지와 책임, 그리고 성경 말씀의 성취이다. 여기에서는 3,17에서보다(그곳의 각주 참조) 더욱 분명하게, 유다인들의 무지가 단순히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알지 못한 것이므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32

일부 수사본들에는 “이제”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33

바오로는 열두 사도의 활동 영역을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백성”으로 제한하면서도, 그들이 본디의 “증인”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앞으로 저자는 자주, 바오로도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특히 다른 민족들을 위한 “증인”의 사명을 받았고(20,24; 22,15.18; 26,16) 또 실제로 그 사명을 완수한다는 점을 언급한다(18,5; 23,11; 26,22; 28,23). 바오로의 사명에 관해서는 22,21 각주도 참조. 그러나 바오로도 열두 사도처럼(4,20) 자기가 “보고 들은 것”(22,15)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가 다른 사도들과 똑같은 것을 본 것은 아니다(1,22 참조). 바오로의 회심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현시는 일차적으로, 그분께서 부활 후 “사십 일” 동안 당신의 “증인들”에게 나타나신 발현과 같은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9,1 앞 소제목 각주 참조).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앞으로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시게 될 다른 현시들과 관련된다(26,16. 그리고 18,9 각주 참조). 바오로는 곧 사도들과는 다른 종류의 것을 보는 것이다(1코린 15,8-9. 그리고 1코린 9,1; 갈라 1,16-17 참조). 또 다른 “증인”인 스테파노에 관해서 22,20 각주 참조.

34

일부 수사본들에는 “그들의”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35

시편 2,7이 인용된다. 이 인용은(히브 1,5; 5,5 참조) 예수님의 부활을 그분께서 지고한 메시아 임금이 되시는 등극으로 이야기한다(2,36 각주. 그리고 마태 3,17 각주; 로마 1,4 참조).

36

“죽음의 나라”의 직역: “부패.” 이는 시체들이 부패하는 곳, 곧 죽음의 세계를 뜻한다. 35.36.37절에서도 마찬가지다.

37

이 말씀은 칠십인역에 따른 이사 55,3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너희에게 주겠다.” 외에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아, 앞부분을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항구한 은총들을”, “내가 다윗에게 한 거룩한 약속들을”, “내가 다윗에게 보장한 은전들을”,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것으로서 의지할 수 있는 거룩한 것들을”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38

시편 16,10을 인용한 것이다. 이어지는 절들에서는 이 시편 구절이 2,25-31에서처럼 해석된다.

39

“다윗은 자기 세대를 위하여 봉사하다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잠든 다음”으로 옮기기도 한다.

40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또 가져다주신 구원은(23절과 26절), 사도행전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로 일컬어진다(2,38; 5,31; 10,43; 26,18). 그러다가 “율법”에는 힘이 없음과(로마 3,21-31 등 참조) 모든 믿는 이가(로마 1,16 등)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됨을(로마 3,24 각주 참조) 이야기하면서는, 바오로의 어휘와 사상을 상기시킨다.

41

이 문장의 직역: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의롭게 될 수 없었던 모든 것(= 죄)에서, 39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 ‘의롭게 되다’는 본디 법률 용어로서, 고소나 고발을 당하여 법정에 섰다가 죄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 풀려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원래 ‘무죄로 인정받다’, ‘무죄 선고를 받다’, ‘무죄로 풀려나다’, ‘의로운 사람임이 인정되다’ 등을 뜻한다.

42

히브리 말 성경보다는 그리스 말 성경에 더 가깝게 하바 1,5를 인용한 것이다. 이러한 위협조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되풀이된다(28,26-27 = 이사 6,9-10).

43

“하느님을 섬기는 이”에서 “하느님”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유다교로 개종한 이’(2,11 각주 참조)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라고도 불린다(10,2 각주). 그런데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라는 이름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 대신에 쓰이게 된다(13,50; 16,14; 17,4.17; 18,7). 유다인이 아니면서도 그들의 신앙에 동참하는 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바오로의 여러 공동체로 넘어온다.

44

여기에서 “모독하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바오로를 대상으로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말일 수 있다(18,6; 26,11 참조).

45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우선권을 접어 두고(2,39 각주; 3,25 각주; 3,26 각주 참조)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결정이 장엄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공포된다. “다른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이 18,6과(19,8-9 참조) 28,28에도 나온다(그러나 28,30 각주 참조).

46

칠십인역에 따라 이사 49,6을 인용한 것이다. “다른 민족들의 빛”이 루카 2,32에서는 예수님께 해당된다. 예수님 이후에는 그분께서 파견하신 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47

‘기쁨’에 관해서는 8,8 각주 참조.

48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유다교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인데, 모든 것이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어 인간의 자유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무슨 예정설(豫定說)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루카 10,20과 각주도 참조).

49

‘하느님을 섬기는 이’에 관해서는 43절 각주 참조.

50

‘발의 먼지를 터는 것’에 관해서는 마태 10,14 각주 참조.

51

이 “제자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생겨난 신자들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