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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집회서가 번역자들이나 독자들에게 던지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작품은 지혜 문학에(잠언 ‘입문’ 참조) 속한 것으로, 그 문학 유형의 기나긴 발전 과정이 끝날 즈음에 저술되어, 매우 복잡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집회서의 전수 과정도 파란곡절을 겪었다. 팔레스티나의 유다교는 이 작품을 경전에서 제외시켰으나, 그리스도교는 제2경전 또는 외경이라 불리는 작품들 속에 합류시켰다. 또 유실되었다가 단편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히브리 말 본문은 오랜 세기 동안 역본들을 통해 알려져 왔으나, 이 역본들의 역사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의 읽는 방법만을 소개할 터인데, 우리는 집회서가 얼마나 경이롭고도 풍요로운 작품인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1. 책 이름과 저자
집회서는 구약 성경에서 (예언서를 제외하고는) 저자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유일한 책이라는 점에서 먼저 주목을 끈다. 저자가 친히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하는 관례는 흔히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회서의 저자는 자기 이름을 ‘시라의 아들(히브리 말로, 벤 시라) 예수’(50,27; 51,30에 이어지는 히브리 말 본문)라 하는데, 여기서 그리스 말 책 이름 시라키데스가 나왔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적어도 성 치프리아노 시대 이후부터 이 책을 라틴 말로 에클레시아스티쿠스(‘교회의 책’ 또는 ‘모임의 책’)라 부르면서 새로 입교한 신자들을 가르치는 데 이 책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말 책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한편 유다 문학은 이 책을 (성 예로니모도 알고 있었듯이) ‘벤 시라의 잠언’ 또는 단순히 ‘벤 시라의 책’이라 불렀으며, 주요 그리스 말 수사본들은 ‘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 또는 ‘시라의 지혜’라는 제목을 붙였다.
집회서 자체에서 벤 시라는 예루살렘의 명사로서 젊어서부터 율법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찬 율법 학자였으며, 학교를 열어(51,23) 자신의 오랜 명상의 결실과(32,15) 삶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 특별히 도성의 귀족 집안 청년들에게 전해 주고자 고심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24,34; 33,18). 그는 바로 지혜의 열렬한 탐구자였으며(51,13-30), 잦은 외국 여행(34,9-12), 추정컨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여행에서 귀중한 교훈들을 깨달았다(39,4). 여행 중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주님께서 구해 주셨고(34,13; 51,1-12), 또한 그는 현명하게 선택한 아내와(36,26-31), 탄탄한 장래를 위하여 엄격하게 교육시킨 자녀들과 더불어(30,7-13; 42,5) 부유한 가운데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의 말투로 보아(33,19), 그가 한때 예루살렘에서 고위 관직에 올라(39,4) 대사제의 감독 아래 나라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았던 조직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성전과 사제직과 경신례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는 하지만(50,5-21), 그가 사제였다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펼쳤던 강좌를 말년에 이르러 널리 알리기로 결심한 스승 벤 시라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에 따른 생활을 하여 더욱 진보하게 하려고”(머리글 10)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적어 남겼다. 이 글에서 그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는 그 당시 유다교가 직면한 역사적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2. 저술 연대와 역사적 상황
두 가지 정보가, 벤 시라는 기원전 20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살았고 그의 저서는 대략 기원전 18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스 말 역자인 벤 시라의 손자는 머리글에서 프톨레마이오스 7세와(피스콘, 기원전 170-116년)1) 동일시되는 에우에르게테스 치세 38년, 곧 기원전 132년 이후 집회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저자인 조부는 그로부터 약 50년 앞서서 이 책을 저술하였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 벤 시라는 기원전 200년 안티오코스 3세가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대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던 시몬에게 헌정한 감동적인 찬미시를 통해 그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을 환기시키고 있다(50,1-24). 그러나 집회서는 기원전 174년 시몬의 아들 오니아스 3세가 면직된 이후 펼쳐진 비극적 상황과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기원전 175-164년) 자행한 박해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어느 정도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외세의 점령과, 기원전 167년 마카베오 형제들의 봉기로 절정에 오른 격렬한 저항 운동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티나는 (기원전 320년 이후) 한 세기가 넘는 기간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은 다음, 기원전 200년부터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와(기원전 223-187년) 그의 후계자 셀레우코스 4세는(기원전 187-175년) 유다인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폈다. 여러 가지 특권을 허용하고 의무를 면제하였으며, 성전의 복구와 경신례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2마카 3,3). 성전 복구에 대한 50,1-4의 기록은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사업은 헬레니즘이라는 개념 아래 그 다양한 면들을 규합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 형태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새로운 생활 양식에 적응하려는 ‘범세계적인’ 경향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나 헬레니즘은 다양한 문화의 혼합, 종교적 혼합주의, 종족과 종교의 경계를 없애려는 범세계주의, 자연의 힘을 찬양하고 인간을 숭배하는 특성들 때문에 그 자체가 단기적으로는 유다교의 실존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벤 시라는 그리스의 이로운 관습들, 나아가 스토아 철학의 개념들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지만, 새로운 사상과 풍습의 물결 속에는 자신의 종교가 요구하는 본질적인 규범과 대립되는 요소들이 있음을 알아챈다(2,12-14). 그는 경건한 유다인들이 갖는 위기감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는 것과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예루살렘의 사제 계급과 귀족 계급에 속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리스 문화 앞에서 지나치게 양보하는 것을 하나의 배교 행위로 간주하며, 여기에서 몰락을 예감하게 된다. 이 불길한 예감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고 만다(1마카 1─2 참조).
3. 저술 목적
이러한 위기 앞에서 벤 시라는 유다교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 신관과 세계관, 선민 특권을 옹호하고자 집필을 시작한다. 그는 같은 신앙인들에게, 이스라엘은 계시된 율법을 통하여 참지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이기는 하나 명료하지 않은 그리스 사상과 문화를 조금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역설하고자 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전통적인 종교와 보편적인 공통의 지혜를 종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덧붙여 심화시켜 나간다. 그리하여 자신의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유다인의 이 실천적인 행동 지침서는 그리스 말 역자의 노고로 “이국땅에 살면서 배우기를 즐기고, 율법에 맞는 생활 습관을 익히고자 하는 이들”(머리글 30)에게까지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외세의 압력이나 내부의 부패 세력에 맞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는 헬레니즘 앞에서 어떠한 타협도 마다한 채 자신을 지켜 내야 했다(1마카 1,11-15). 이러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 유다교 전통에 대한 총지침서로서 집회서는 변해 버린 새로운 세상에서도 유다인으로 살아가기를 진지하게 원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이다. 유다교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히고 보존하려는 벤 시라의 이 저서는 변화된 새로운 상황을 무시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명석한 보수주의자의 작품이다.
4. 집회서의 종교관
여기에서는 이 책의 주요 사상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그 독자적인 특징을 강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집회서는 인생의 문제들 가운데 다루지 않은 것이 거의 없어, 그 사상들을 언급하자면 이 책의 목차를 다시 베껴와야 할 것이다. 우정, 자선, 자녀 교육, 여자, 의사와 질병, 부와 가난, 종, 연회와 그 예절, 나아가 이스라엘의 옛 역사, 제사와 경신례, 하느님, 율법, 창조, 인간의 자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주제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모든 주제에 앞서 이스라엘 안에서 이미 옛 전통의 상속자로 자처하는(33,16-18) 지혜에 대한 글이(1,1-10; 24; 50,27; 51,13-30)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집회서가 욥기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보다는 잠언을 주석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인상적이다(18,29 참조). 잠언의 내용을 주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잠언이 간결한 이행시에 담아 놓은 사상을 풀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창성도 돋보인다. 옛 지혜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범세계적인 지혜가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조상들에 대한 칭송’(44,1─49,16; 바룩 3,9─4,4 참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나아가 24장에서 지혜가 의인화되어 나타나는 경우에 더욱 분명해지는데 잠언 8장이나 욥 28장과도 비교할 만하다. 저자는 헬레니즘이 야기한 문제에 해답을 주고자 고심한 결과, 지혜를 시나이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동일시하게 된 것 같다(24,23; 바룩 4,1 참조). 주님을 경외하며 하느님의 뜻을 세심하게 살펴 나가는 저자에게 현자와 의인은 이제 동일한 존재가 된다.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라는 주제는,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사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회서에서 매우 자주 등장한다. 이 주제는 사실 종교 생활에(2,15-17) 관한 부분들에 매우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데, 거기에서 저자는 한없이 선하신 존재에 대한 사적인 신심 개념을 설명하는가 하면, 그분의 성성(聖性)은 인간도 거룩해지도록 순명이라는 좁은 길로 가기를 요구한다고 가르친다. 주님을 경외함은 결국 율법에 대한 충실성으로 드러나며 넓은 의미에서 지혜 개념과 동일시된다. 이 경외심 안에서 지혜의 길을 찾는 전통적인 사상은 이제 종교 생활에 관한 세세한 규범, 곧 글로 기록된 율법을(1,26; 6,37) 따라 사는 구체적인 생활 방식 안에 수렴된다. 율법을 연구하고 지혜를 추구하는 일은 이제 유다교 안에서 유일한 과업으로 드러난다. 지혜의 특성과 임무, 곧 신적인 기원, 창조 안에서 맡은 임무, 의인화 등은 율법에도 적용된다. 라삐 문학에서도 지혜의 선재 사상(先在思想)과 동일하게 율법의 선재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집회서 저자가 표현한 개념들을 좀 더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율법을 역설하는 벤 시라의 태도를 보고 그를 율법주의 종교의 사도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변적인 이론보다는 개인적인 체험에 기초한 그의 신관과,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개념은 참된 신심이 무엇인지를 밝혀 준다. 집회서 저자는 당시 유행하던 사조에 맞서서 전통적인 신앙을 옹호한다.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분이시며(18,1; 36,4; 42,21), 창조가 신비에 싸여 있고 모순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분은 완벽한 창조의 주인이시다(42,21.24). 이 창조 앞에서 벤 시라는 시편 저자처럼 경탄을 감추지 못한다(16,24─18,14; 39,12-35; 42,15─43,33).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며(42,18-25),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분은 ‘전부’이시다(43,27). 그분은 우주를 정의와 섭리로 다스리시며(16,17-23), 모든 피조물의 시간을 미리 정해 놓으시고 공정하게 되갚으시는 분이시다(33,13). 그분은 또한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다(2,11). 한마디로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탁월하신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17,17; 24,12) 모든 인간 각자의 아버지 하느님이시다(23,1). 이 마지막 개념은 유다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발전으로 볼 수 있다. 창조에 대한 벤 시라의 태도는 그의 저서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설명해 주는 흔들림 없는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다. 저자는 신앙을 바탕으로 낙관주의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30,21-25), 객관적으로 드러난 온갖 어려움과, 인간의 숙명과 운명에 따라오는 한계들을 극복해 나간다.
당대의 철학 사조는 인간의 자유와 악의 실존을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조화시키려고 고심하였다. 그러나 벤 시라는 상호 모순적인 이 두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그가 만족스러운 답안을 내놓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고(15,14), 악의 근원은 인간 안에 있지(21,27; 25,24) 하느님 안에 있지 않다(15,11-13). 인간의 마음에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은 라삐 문학의 인간론 안에서 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는 주인으로 머물 수 있으며(31,10), 통제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정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집회서에서 이 보상 개념은 전통적인 사상에 따라 아직 지상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행복을 벗어나지 못한다. 곧 보상은 구체적으로 건강과 장수, 많은 후손, 안락과 명성 등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의 선임자들처럼 저자는 죽은 자들의 거처(히브리 말로, 셔올)라는 암울한 말로 말고는 이승 너머의 저승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죽은 자들은 거기서 살아 있는 자들의 빛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상실한 채 축소된 삶을 영위할 것이다. 불사불멸과 부활 사상은 그가 죽은 지 오래지 않아 그리스 사상과 (또 아마도 페르시아 사상과) 함께 종교 박해의 충격으로 더욱 분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2마카 7,9; 다니 12,2-3). 이 사상은 그리스 말 역자가 조부 벤 시라의 작품을 재해석할 즈음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48,11). 벤 시라의 손자는 또한 불경한 자들이 저승에서 받게 될 벌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7,17). 그러나 집회서의 저자가 ‘불사불멸에 대한 온전한 희망’을 구체적으로 피력한 적이 없었기에 죽음의 불가피성을 강조할 때마다(8,7; 14,17; 28,6; 41,3) 실의에 찬 어조가 드러난다(40,1-11).
벤 시라의 종말론적 희망 역시 지상적이며 정치적, 민족주의적인 지평을 넘어서지 못한다. 성경 해설자들은 메시아사상이 이스라엘 안에 폭넓게 퍼져 있었음에도 집회서에서 다윗 왕조에 기초한 메시아사상의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36,1-17의 기도에서 유일하게 메시아사상에 대한 반향을 엿볼 수 있으나, 이 본문의 해석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부활 신앙에 대한 벤 시라의 태도, 경신례에 대한 애정, 차독 집안의 사제직에(히브리 말 본문 51,12 참조) 대한 존경심 말고도,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더욱 퍼져 나갈 메시아사상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벤 시라를 사두가이들의 선구자로 간주하려 한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그를 글로 기록된 율법에 집착한 보수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 대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복음서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소개한 사두가이들과 단순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벤 시라가 살았던 시대는 유다교 안에 아직 독자적 노선을 지닌 파당이 생겨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벤 시라는 이민족들을 언급할 때 전형적인 유다인의 태도를 견지한다. 예언자들이 앞서 구원의 보편 사상을 고취시킨 바가 있었지만, 유배 이후 시대의 어려운 상황들은 이스라엘을 특권주의로 몰고 갔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율법에 따른 생활 관습들은(할례, 안식일, 음식과 제사에 관한 정결 규정 등) 점점 더 강화되어 나간다. 인간을 우주의 한 시민으로 보는 헬레니즘의 일반적인 인간관도 저자가 선민에 속한다는 자긍심을 침해하지는 못하며, 이러한 저자의 의식 속에서 지혜 역시 특별한 거처를 마련한다(24,7 이하). 저자는 원칙적으로 선민들이 불경한 자들과 분리되어 있도록 권고하는데(11,33; 12,14; 13,17), 이러한 분리는 쿰란의 에세네파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몰아갔고 바리사이들에게는 바리사이(‘분리된 자’)라는 이름을 제공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세상은 두 부류로 구분되는데 선인들의 세상과 악인들의 세상, 또는 지혜로운 이들의 세상과 어리석은 이들의 세상이 그것이다(21,11-28). 다른 한편 집회서에는 유다교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우면서도 민감한 혁신적 요소들이 드리워져 있는데, 용서에 대한 진보적인 가르침은(27,30─28,7) 복음서의 내용과 흡사하다. 또한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모두 서로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은(28,4-5),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라는 개념을 이미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옛 유다인 주석가들은 레위 19,18을 흔히 ‘네 이웃을 또 다른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5. 집회서의 구조
주석가들은 이 작품의 구조에 대하여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선 집회서 저자가 셈족으로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이 책을 구성한 지혜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저자는 사료들을 수집하면서 주제를 연이어 나열해 놓는 구전의 형태를 따르는데, 이 과정에서 본 주제를 벗어난 상당수의 사료들도 포함시킴으로써 일정한 구조를 무시한 채 폭넓은 단락을 엮어 내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집회서에서 체계적인 구조를 찾아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다만 적어도 크게 두 부분, 1─23장과 24─50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들은 각각 지혜에 대한 찬미가로 시작된다. 51장은 감사의 노래와 지혜 탐구에 관한 시를 담고 있는 부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줄곧 언급되는 지혜에 대한 칭송을(1,1-20; 4,11; 6,18; 8,8 등) 중심으로 해서 이와 관련된 온갖 유형의 금언들을 한데 묶어 첫 부분으로(1,1─42,14), 창조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명상을(42,15─50,29) 둘째 부분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우리는 좀 더 분명하게 집회서를 다음과 같이 나누기로 한다.
머리글
제1부: 지혜와 금언들(1,1─16,23)
제2부: 하느님과 창조, 그리고 금언들(16,24─23,28)
제3부: 지혜와 율법, 그리고 금언들(24,1─32,13)
제4부: 하느님 경외와 처세(32,14─42,14)
제5부: 하느님의 영광(42,15─50,29)
부록(51,1-30)
6. 집회서의 중요성
집회서는 이스라엘이 구약 성경의 신앙에서 발전하여 유다교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증언하는 중요한 책으로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유다교의 특징을 보여 준다. 앞에서 우리가 유다교의 특징들 가운데 일부를 지적하였듯이, 벤 시라는 복합적 양상을 띤 유다교의 근본 요소들을 전해 주고 있는데, 이 요소들 위에서 그리스도교는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집회서는 바리사이들의 지배적인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유다교가 단일 양상을 띠었던 (기원후 70년 이후의) 라삐 유다교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이유로 집회서는 구약 성경의 폭넓은 묵시 문학과 지난 반세기에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여러 문헌과 함께 연구해야 할 것이다. 헬레니즘과 유다교의 대치 상황에서 집회서는 한편으로 헬레니즘의 어떤 요소들을 빌려 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요소들을 경계하거나 독설로 철저하게 배척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 요소들을 정확하게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벤 시라는 또한 거의 완성된 구약의 경전 구성에 대하여 중요한 증언을 하고 있다. 집회서의 머리글은 히브리 말 성경의 전통적 구분, 곧 “율법과 예언서와 다른 선조들의 글”(머리글 5. 그리고 38,34─39,3 참조) 이 셋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또한 모세 오경, 여호수아기, 사무엘기, 열왕기, 역대기, 욥기(히브리 말 본문 49,9),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열두 소예언서(특히 하까이서와 말라키서), 그리고 느헤미야기 등을 다소 분명하게 인용하거나 언급한다. 그리고 시편의 저자를 다윗으로, 잠언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명시하기도 한다.
벤 시라는 유다교가 선호하는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그의 저서는 탈무드에 자주 인용되었고 중세의 저자들에게까지 유다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되었다. ‘현인 아키카르의 이야기’(토빗기 ‘입문’ 3 참조)와 같은 고대 근동의 고전적인 지혜 문학 작품들과 유다의 가장 오래된 작품들을 참고한 저자는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창조적 정신을 소유한 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복음서의 지혜로운 율법 학자처럼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낼”(마태 13,52)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집회서는 속죄일 예식서와 같은 유다교 경신례의 중요한 예식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며, 36,1-17의 기도문은 ‘십팔 축복 기도’와 매우 유사하다.
신약 성경에도(특히, 야고보서) 집회서와 관련된 병행구들이 다수 발견되는데, 이는 이 책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었음을 입증하며, 이러한 평가는 초대 교회 전승이 약간의 망설임 끝에 이 책을 경전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면서 붙여준, ‘교회의 책’, 곧 집회서라는 책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종교 서적 모음집에 받아들여지고 또 우리가 살펴본 대로 드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이 책을 경전 목록에서 제외시켰다. 성경의 다른 책들에 비해 후대에 저술되었고, 기원후 70년 이후에 확립된 유다교의 정통 교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결정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잠시나마 이 책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를 망설이게 한 요인이 되었으며, 집회서 본문이 복잡한 전승 과정을 거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7. 본문의 전승 과정
집회서 원문은 히브리 말로 작성되었고, 4세기에 예로니모 성인은 그 수사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사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는 유다교 라삐들의 문헌에서나 그 단편적인 본문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엽 카이로에 있는 유다교 회당의 부속건물인 게니자에서 그리스 말 본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본문이 단편들로 발견되었다. 이 단편들 가운데 1910년 쉐히터(S. Schechter)가 출간한 수사본 A와 B가 가장 중요하며,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작은 단편들도 뒤이어 확인 작업을 거쳤다.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기타 히브리 말 단편들이 쿰란과 (기원후 73년 로마인들에게 함락된) 마싸다 요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단편들을 통해 우리는 카이로 수사본들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히브리 말 수사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19-20(쿰란)
3,6─16,26
18,31─19,2
20,5-7.13
25,8.13.17-24ㄱ
26,1-3.13-17
27,5-6.16
30,11─34,1
35,11─38,27ㄴ
39,15ㄷ─51,30
지금까지 발견된 히브리 말 수사본들은 두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나는 매우 오래된 수사본으로서(H-I) 기원전 130년경 벤 시라의 손자가 이집트에서 그리스 말로 번역할(G-I) 때 대본으로 삼았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후 50-150년 사이에) 바리사이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개정된 수사본으로서(H-II) 기원후 130-215년 사이에 그리스 말 번역본을 수정할(G-II) 때 사용된 것인데, 이러한 수정 작업은 일련의 그리스 말 수사본들로 입증된다. 시리아 말 역본 역시 히브리 말 수사본이 개정되던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리스 말 본문 G-I는 대문자 수사본 A(알렉산드리아 수사본), B(바티칸 수사본), C(에프렘 수사본), S(시나이 수사본)들과 같은 계열의 흘림체 수사본들에 포함되어 있다. 다른 그리스 말 본문 G-II는 히브리 말 본문을 새롭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미 번역된 G-I을 충실히 전달하면서 히브리 말 본문의 개정판을(H-II) 참고로 삼아 필요한 부분을 G-I에 삽입한 것이다(치글러의 견해). 한두 낱말을 바꾸거나 첨가하는 것 말고도 G-II는 GI에 없는 약 300개의 행을 덧붙였다. G-I은 전반적으로 히브리 말 본문에 충실하지만, 벤 시라의 손자가 히브리 말 표현과 어법을 잘못 이해한 경우가 적지 않고 본문의 전승 과정에서도 필경사들의 수많은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후에 히브리 말 본문의 수정본 H-II를 참조하여 펴낸 G-II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동시에 히브리 말 수정본들을 대본으로 하고 G-II를 참고로 삼아 번역한 시리아 말 역본과, 자매 역본들 가운데 G-II의 중요한 증인으로 알려진 대중 라틴 말 성경의 전신인 고대 라틴 말 역본과 아람 말 역본의 증언도 중요하다.
그리스 말 역본은 히브리 말 본문의 가장 중요한 증인이다. 유다교 전통과 그리스도교 전통이 후대에 전한 수사본은 바로 이 그리스 말 역본이었다. (비교가 가능한) 그리스 말 역본과 히브리 말 본문을 대조해 보면 이스라엘의 종교 개념들이 신학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변천하는 신학적, 역사적, 지정학적, 사회적 맥락에 적응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그리스 말 역본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시도들의 동기는 가능한 대로 본문의 각주에서 밝힐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공동체의 요구에 맞추어 현실화시킴으로써 성경을 미라로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미드라쉬적 경향에 힘입은 것이다.
우리말 번역 대본은 랄프스(A. Rahlfs)가 편집한 슈투트가르트판이(1935년) 아니라 철저한 본문 비평을 바탕으로 새롭게 편집한 치글러(J. Ziegler)의 괴팅겐판이다(1965년). 이 치글러의 그리스 말 본문에는 G-II의 첨부 내용들이 덧붙어 있고 이를 G-I과 구별하기 위해 작은 글자로 옮겨 놓았는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를 기울어진 글씨체로 표기하였다. 치글러의 괴팅겐판은 각 장의 절을 구분하는 데서 대부분은 랄프스의 슈투트가르트판과 일치하지만 30-36장에서는 매우 다르다. 이 부분에서 랄프스는 대다수 그리스 말 수사본들의 장과 절 구분을 무시한 반면 치글러는 그것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 말 수사본들은 33,13ㄴ─36,16ㄱ을 30장 24절과 25절 사이에 놓고, 30,25─33,13ㄱ을 36장 16ㄱ절과 16ㄴ절 사이에 놓았다.
랄프스 | 치글러 | |
30,24 | = | 30,24 |
우리말 번역에서는, 각 장의 순서는 히브리 말 본문과 시리아 말 역본과 대중 라틴 말 성경을 따른 랄프스의 것을 받아들이되 같은 장 내의 절 구분은 치글러의 것을 받아들인다. 또한 히브리 말 본문의 단편들은, 그리스 말 본문이 문법적으로 또는 의미상으로 모호할 때, 그리고 자체로서 그리스 말 본문의 내용과 전혀 다른 종교적 견해를 드러낼 때 우리말로 번역하여 각주 안에 소개한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 곧 그리스 말 역자가 명백하게 히브리 말 본문을 잘못 읽었거나 그리스 말 본문이 도무지 해독할 수 없는 표현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그리스 말 본문 대신 히브리 말 본문을 옮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 범위를 낱말 한두 개로 국한시켜, 되도록 그리스 말 본문에 충실하기로 한다.
종교간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교 고유의 문학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랫동안 유다교 전통을 키워 오고 2000년 이상 그리스도인들의 묵상과 기도에 수많은 주제를 제공해 온 이 작은 지혜의 책 집회서는, 오늘도 신약 성경의 메시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상계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7세의 통치 연대는 공동 통치 등으로 말미암아 자료마다 약간씩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