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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구약 성경은 유다인들이 흔히 타낙(TANAK)이라 부르는 문서집이다. 타낙은 히브리 말 성경의 세 부분을 가리키는 명칭, 곧 ‘율법’(Torah)과 ‘예언서’(Nebiim)와 ‘문서’(Ketubim)의 첫 글자 사이에 모음 A를 붙인 이름이다. 때로는 ‘독본’(Miqra), 곧 ‘유다교 회당에서 읽는 책’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한 책들이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체결된 ‘새로운 계약’(또는 ‘신약’)의 규정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믿고서, 그 이전의 거룩한 책들에 ‘옛 계약’ 곧 ‘구약’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히브리 말 성경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동서양의 교회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는 그리스 말 성경은 네 부분, 곧 (‘율법’과 동일한) ‘모세 오경’, (‘예언서’의 첫 부분과 ‘문서’에 속하는 몇몇 책들을 규합하는) ‘역사서’, (‘문서’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성문서’, (‘예언서’의 둘째 부분과 다니엘서로 구성되는) ‘예언서’로 나뉘어 있다. 그리스 말 성경은 이 밖에 히브리 말 성경에 없는 몇 권의 책들을 더 담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이 책들을 구약 성경의 일부로 받아들이나, 개신교는 ‘사등분’의 구조는 견지하면서도 히브리 말 성경에 실려 있는 성경만을 구약 성경으로 인정한다.
이 ‘입문’에서는 구약 성경이 탄생한 지리적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소개하고, 구약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책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되었고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었는지를 요약한 다음, 이 책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I. 성경의 나라
1. 비옥한 초승달 지대
성경은 ‘가나안 땅’이라 하고 지리학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티나(곧 ‘필리스티아인들의 땅’)라 일컫는 이스라엘의 땅은 지리적으로 ‘비옥한 초승달’이라 불리는 넓은 지대의 한 작은 지역을 가리킨다. 실제로 활 모양을 한 이 지대의 중심부에는, 옛날에는 거의 지나갈 수 없었던 지역, 곧 아라비아반도 북쪽에 있는 시리아 사막의 고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초승달 지대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오론테스, 리타니, 요르단과 같은 중요한 강들이 물을 대고 있다. 한편 이 지대에는 그 연장선처럼 보이는 중요한 나일강 계곡을 덧붙여야 한다. 비록 지리학자들이 이 계곡을 엄밀한 의미에서 초승달 지대에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 초승달 지대의 경계 안쪽은 사막과 이어지는 반사막 지역으로 이루어진 반면, 바깥쪽에는 이란고원, 아르메니아, 타우루스산맥과 같은 산악 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 초승달 지대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는 가장 비좁은 지역인데, 지중해와 사막 사이에 낀 폭이 채 백 킬로미터가 안 되는 통로로서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계곡을 이어 준다.
초승달 지대는 일찍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여러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나일강의 계곡과 삼각주, 그리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하류에 집중되었다. 이 두 지역 사이에는 왕래 또한 빈번했는데, 그 기본 도로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르다가 팔미라와 다마스쿠스를 거쳐 시리아를 지나고, 므기또와 야포를 거쳐 팔레스티나를 통과한 다음, 가자와 라피아를 거쳐 이집트에 다다랐다. 이와는 달리 사막 가장자리에 있는 다마스쿠스에서 요르단 동쪽 길을 잡으면 아라비아와 에일라트에 이르고, 여기서 시나이반도를 거쳐 이집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운송을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노선은 유프라테스강에서 직접 페니키아의 항구(비블로스, 시돈, 티로)로 가서 바다를 건너 이집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상인들과 군인들이 이러한 대로를 통하여 왕래하였으며, 여러 사상들 또한 전파되어 나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닫혀 있던 세계가 아니었다. 직접 아라비아와 교류하고, 이집트와 누비아를 통하여 아프리카와, 이란을 거쳐 인도와 교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에 속하는 키프로스, 크레타, 그리스의 섬들, 이오니아, 더 나중에는 그리스 본토와 이탈리아와도 관계를 맺어 나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지중해 연안 사이에는 언제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하여 지중해 연안과 고대 근동의 국가들 사이에는 문화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이 형성되었다.
2. 팔레스티나의 구조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팔레스티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통로 구실을 하였지만, 그리 대단한 지역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사실 팔레스티나의 중심부는 교류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지만 기타 지역은 주민들이 고립 생활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통행이 가로막혀 있었다.
팔레스티나는 북에서 남으로 간략하게 네 지대로 분류할 수 있다.
가) 해안 지대:
항구 건설이 용이하지 않은 비좁은 지중해 연안을 말하며, 언덕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낮기만 한 “평원 지대”(신명 1,7; 여호 9,1; 10,40; 11,2 등)가 동쪽 경계를 이루고 여러 개의 작은 벌판들로 단절되어 있는 지대이다.
나) 중부 산악 지대:
남쪽 유다에서 1,000미터에 이를 정도로 높은 지대이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즈르엘평야를 향하여 낮아지다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하여 이스라엘 북부의 최고봉에 이르며 끝내 레바논산맥으로 이어진다. 이 지대를 가로지르는 침하 현상에 따라 세 지역, 곧 유다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로 나뉜다. 이 침하 현상이 두드러진 곳이 이즈르엘평야인데, 그 동쪽은 카르멜산 기슭에 이른다.
다) 대 침하 지대:
요르단 계곡과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가 차지하고 있는 지대이며, 아라바 계곡을 타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아카바만에 이른다. 아프리카의 거대한 호수들까지 이어지는 이 침하 지대는 육지에서 가장 깊은 구렁을 이루고 있다. 사해의 경우 지중해 수면에서 392미터 아래에 있다.
라) 요르단강 동쪽 고원 지대:
서쪽은 요르단 계곡 위로 돌출해 있는 지대이며, 남쪽 지대는 요르단강과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르논이나 야뽁과 같은 지류들로 갈라져 있다. 비교적 덜 가파른 북쪽은 중부 산악 지대보다 더 높은 산맥을 이루며, 더 올라가면 헤르몬산과 안티레바논산이 있다.
3. 팔레스티나의 생활 조건
팔레스티나의 기후는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일조량이 풍부한 대신 비는 겨우 며칠만 간간히 내릴 뿐이다. 오월부터 시월까지는 건기이며, 강수량은 매우 불규칙하다. 어떤 해는 예년보다 두 배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
평균 강수량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빠르게 감소하며, 이에 따라 팔레스티나의 기후는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 해안에서 중부 산악 지대로 이어지는 지역: 강수량은 평균에 이르며, 지중해성 농작물인 밀, 보리, 포도, 올리브, 과일, 채소 등이 재배된다.
- 유다 산악 지대의 동쪽과 네겝 지역: 반사막 지역으로 계절에 따른 농작물 재배와 목양이 가능한 곳이다.
- 사막과 초원 지역: 계절에 따라 목장이 되는 지역이다.
마지막 두 지역에 수량이 풍부한 오아시스들이 있지만, 면적이 그리 넓은 것은 아니다.
비교적 메마른 지역에 비해 물이 많은 지역은 하나의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여길 수 있었지만, 팔레스티나의 삶은 늘 불안하고, 그 땅은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성경 시대에 팔레스티나의 주민 수는 백만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 같다. 양대 도시인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주민은 겨우 삼만 명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그 밖에 다른 도시들은 작은 성읍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인구는 샘물 주위에 모인 촌락에 살았다.
II. 이스라엘과 이민족들
1.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단계
가) 이스라엘의 기원:
기원사는 대부분 다른 민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규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기원전 1200년경 이스라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기 이전, 형성의 시대가 앞섰을 것이나 역사가들의 접근을 벗어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셈족 가운데 반유목민으로서, 기원전 2000년대 내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반사막 지역 주변에서 양 떼를 치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반유목민들은 점차 몇몇 집단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으며, 때로는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반유목민 집단 가운데 후에 아모리인들과 아람인들의 시조가 된 두 집단이 잘 알려져 있다. 아모리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정착했으며, 아람인들은 기원전 13세기경 시리아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헌들은 또 다른 여러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과 이집트에 끊임없이 잠입해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 이스라엘 지파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스라엘의 시대를 자리하게 할 수 있겠는가? 전승이 이들 성조들의 것으로 전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역사적 가치를 판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실 성경 저자들은 성조들을 역사적 인물로 묘사하기보다는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적인 선조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고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이스라엘 백성의 탄생:
추측컨대 기원전 13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복잡한 과정이다. (기원전 1225년경) 이집트 파라오 메르네프타의 기념비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티나의 소수 주민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집단과, 이집트에 정착해 살다가 모세의 인도로 탈출한 셈족 집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모세는 셈족 집단을 가나안을 향하여 이끌어 갔다. 성경 전승에 따르면 모세는 주님께서 구원하신 이 집단에게 주님께 올려야 할 경신례를 가르치며, 이 집단을 하나의 백성으로 조직하기 시작한다. 성경은 이들 기본적인 사건들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으며, 이 사건들을 이스라엘의 출생증명서로,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으로 소개한다.
모세가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느보산에서 죽자 여호수아가 이 집단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간다. 여러 지파로 구성된 한 백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지파 연맹은, 그 시작은 잘 알 수 없어도, 기원전 12세기와 11세기 동안 이루어지나, 해양 민족 특히 기원전 12세기 초 팔레스티나 해안에 상륙한 필리스티아인들의 출현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는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영토를 넓힐 목적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이 살고 있던 고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들 지파들은 이웃 민족들의 제도를 본받아 임금을 우두머리로 내세워 지파 연맹을 강화하며 저항하기로 작정한다.
다) 왕정 제도:
사울의 왕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끝내 필리스티아인들과 전투 중에 사울 임금이 죽자(1사무 31), 유다 지파의 다윗이 점차 모든 지파의 인정을 받아, 먼저 유다의 임금으로(2사무 2), 이어서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즉위한다(2사무 5). 수도로 예루살렘을 선택한 다음 다윗은 인접한 왕국들, 특히 요르단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향하여 세력을 펼쳐 나간다. 그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 와서 왕국은 체제를 더욱 정비한다. 솔로몬 치세에 관한 기록, 때로는 지나치게 서정적인 기록(1열왕 3─10)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 건축만큼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1열왕 6─8). 이스라엘은 이 성전에서 당신 백성 한가운데 머무르시는 주님의 항구한 현존에 대한 표징을 본다. 그러나 솔로몬 치세 종말은 적대 세력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웠다. 솔로몬의 후계자인 르하브암은 이스라엘 왕국이 표면상으로만 통일을 이루고 있었음에도 적대 세력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북쪽 지파들은 르하브암 임금이 조세 감면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히자 기원전 933년 반기를 들어 독립된 왕국, 곧 (북)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다. 유다와 벤야민 지파만이 르하브암을 섬기며 (남) 유다 왕국을 형성한다. 이후 2세기 동안 두 왕국은 때로는 대립하면서 공존 관계를 유지한다.
더 풍요롭고 더 많은 주민이 살던 지역들로 형성된 북 왕국은 특히 사마리아 도성을 창건한 오므리 임금과(기원전 886-875년), 그의 뒤를 이은 아합과(기원전 875-853년) 예로보암 2세(기원전 787-747년) 치세에 번영의 시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만성적인 왕조의 불안으로 쇠약해진 북 왕국은 아시리아의 세력 확대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다가 결국 기원전 737년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에게 굴복하고, 이후 전개된 몇몇 저항 운동 역시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함락과 함께 그 끝을 본다.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유배지로 압송되고 왕국의 영토는 아시리아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된다.
북 왕국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경제적으로도 빈약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왕국들과 이웃해 있던 남 왕국은 역사적으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이집트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이 왕국은 그래도 아사와 여호사팟, 특히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함락 이후 북 왕국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였던 히즈키야와, 유다가 독립에 대한 마지막 의지를 불태웠던 요시야와 같은 임금들의 시대에 와서는 이민족들 사이에서 제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왕국 역시 북 왕국이 멸망한 후 한 세기가 조금 지나 무너져 버린다. 바빌론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도성을 파괴하고 주민 가운데 일부를 유배지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기원전 587년).
바빌론으로 흩어졌거나 이집트로 피신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옛 주민들은 그 나라의 백성들과 동화되어 살아갔으나, 몇몇 소규모 집단들은 성전이 멀리 떨어져 있고 더 이상 제사를 바칠 수 없게 되었어도 종교 생활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응집력을 견지해 나갈 줄 알았다. 유배 생활은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이와 같은 징벌의 이유에 대하여 깊이 있게 반성하고 근래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성경의 여러 본문들이 이를 반향하고 있다.
라) 유다 공동체:
유다 왕국이 몰락한 지 오십 년이 채 되지 않아 상황은 다시금 바뀌어 페르시아인들의 침입으로 바빌론 제국이 붕괴된다. 페르시아 제국은 일찌감치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며, 이 성전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이 다시 모여든다. 아직 미소하지만 이 공동체는 수많은 난제들을 극복해 가면서 서서히 성장해 나가게 된다. 우선 그 땅에 남아 있던 잔류민들의 적대감에 직면해야 했으나, 이 공동체는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업적으로 분명한 조직을 갖춘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나 종교와 관련하여 깊이 있는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며, 바로 이즈음 구약 성경의 대부분이 결정적인 형태를 갖는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페르시아의 통치를 종결시키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의 승리를 보장한다. 마케도니아 제국에 병합된 이스라엘은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사이에 전개될 충돌을 감수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 세기 반 동안 유다 공동체는 그리스 세계와 평화롭게 지내나 기원전 167년에 이르러 분쟁이 발생한다.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의 특별한 지위를 박탈하고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의 종교 의식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다. 이에 마카베오 형제들은 무력으로 저항 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승리로 이끈다. 대사제로 인정받은 시몬 마카베오가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고(기원전 142년),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시몬의 자손들, 곧 임금으로 불리던 하스몬가의 사람들이 이 상황을 유지하지만, 기원전 63년 로마인들이 이 상황을 끝낸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다를 로마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시킨 것이다(‘신약 성경 입문’ 4 참조). 한편 이 시기 동안 유다 공동체는 스켐 성소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전통과 대립되는 지파들의 전통을 물려받은 사마리아인들과 서서히 결별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과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제국의 침입으로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기타 지역으로 흩어져 살았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기원전 538년 이후 유다로 귀환하지 않았고, 수많은 백성들이 그리스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근동 전역과 지중해 연안, 특히 이집트를 향한 이주가 수월하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다보다 더 많은 유다인들이 살았으며, 이들의 활발한 선교 활동으로 유다교에 많은 개종자들, 곧 ‘새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국에 거주하던 이 모든 유다인들은 디아스포라(분산)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그 절반이 유다인들이 아니었던 팔레스티나의 인구보다 많았다.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예루살렘과 성전에 큰 애착을 보였던 이들 유다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했으며, 동시에 자신들이 함께 살고 있던 다른 민족들의 삶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유다교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도록 이끌었으며,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큰 시련을 극복하도록 준비시키기도 하였다. 이 시련은 로마인들을 거슬러 일으킨 유다 항쟁을 말하며, 이 전쟁은 성전 파괴로 끝났고, 바르 코크바의 최후 저항(135년) 이후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거주 자체가 금지되었다.
2. 이스라엘의 주변 민족들
오랜 세월 동안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여러 지방과 문화와 종교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던 장소였으며,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이 사람들과 긴밀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가) 인접 민족: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거의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는 주민들로 구성된 작은 왕국들이 여럿 있었다.
남동부에는 에돔인들이 세이르 산악 지대와 아라바 계곡과 페트라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북부로는 (곧 사해 동쪽으로는) 모압 왕국과 암몬(지금의 암만) 왕국이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에는 아람인들의 왕국들이(다마스쿠스, 하맛) 자리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왕국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면서도 그 백성들과 혈연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족보 제시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암몬과 모압은 아브라함의 종손이고, 에돔(에사우)은 야곱의 형제이며, 아람 사람 라반은 야곱의 외삼촌이며 장인이었다.
북서부에는 지금의 레바논 해안을 따라 항구 도시가 일렬로 들어섰다. (나중에 비블로스라 불린) 그발, 지중해 연안에 교역소나 식민지를 건설하고서 바다를 종횡으로 항해하던 선원들과 상인들이 살았던 시돈과 티로 등이다. 이 지방은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페니키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혼혈족이 살았던 이 지방은 예전에는 가나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 정치 구도와 달리,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일한 언어이면서도 여러 방언으로 구성된 가나안 말을 사용했으며, 이 언어의 원형은 이집트의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바빌론 서판들에 나타난 몇몇 설형 문자 어휘에서 엿볼 수 있다. 가나안의 문명과 종교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문헌은 없으나, 기원전 14세기에 우가리트 말로 기록된 북 시리아의 라스 사므라에서 발견된 문헌들이 밝혀 주는 내용들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끝으로 남서부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던 거의 같은 시기에 해안 지방에 도착한 필리스티아인들이 살았다. 이들의 종교와 관습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 백성들의 것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오히려 크레타와 그리스의 것들과 유사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나안의 상당한 신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나) 강대국:
인접한 소왕국들 못지않게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을 번갈아 가며 지배했던 강대국들과도 운명적인 관계를 피할 수 없었다. 팔레스티나는, 그리 흔치는 않았지만, 강대국들이 약세에 접어들었을 때 비로소 세력을 과시할 수 있었으며, 다윗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틈타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는 이 강대국들의 억압 아래에 있었다.
우선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이미 대단히 앞선 문명을 자랑하던 대국이었다. 나일강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던 이집트는 (누비아를 통해) 아프리카를 향해, 나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향해 열려 있었다. 파라오들은 늘 팔레스티나를 지배하고자 기회를 엿보았으며, 그 결과 오랜 세기 동안 팔레스티나는 이집트의 속령 또는 보호령에 속해 있었다. 거의 모든 유다의 임금들이 이집트와 동맹 또는 종속 관계에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 (특히 지혜 문학 작품에) 중요한 흔적을 남길 만큼 이집트의 문화적 영향이 지대했음을 잘 설명해 준다.
다음 메소포타미아는 언제나 복잡한 세계에 속했다. 여러 종족들이 뒤섞여 공존하고 있었으며, 제국들이 전쟁을 통하여 교대로 군림했다. 팔레스티나를 지배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첫 번째 제국은 기원전 9세기경 서쪽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나갔던 아시리아 제국이다. 이 제국은 기원전 735년에 북 이스라엘 왕국을 굴복시키고 마침내 기원전 722년에 이 왕국을 제거했으며, 남 유다 왕국은 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아시리아의 지배는 성경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기원전 606년에 끝내 전쟁에서 패한 아시리아는 그 세력을 칼데아인들(동부 아람인들)이 통치하던 바빌론 제국에 넘겼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거의 모든 옛 아시리아 제국에 자기의 패권을 행사했으며 결국 기원전 587년에는 유다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는 이 제국을 파멸시키고서 이 제국의 속령들을 더욱 광활한 제국에 편입시켰으며, 그렇게 두 세기 이상을 버텼다. 페르시아 정부는 정복된 민족들의 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펼쳤으므로, 유다 공동체는 재편되고 번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세력들과 대치하기에 앞서서 팔레스티나는 이미 그 지방의 문명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적어도 기원전 30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수메르인들(우르, 라가스), 아카드인들(아카드), 아모리인들(바빌론, 마리), 후리인들(누지), 아시리아인들(니네베), 칼데아인들, 페르시아인들과 기타 민족들이 잇따라 지배했던 메소포타미아는 한결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탄생은 여기에 이란의 인도-유럽적인 색채를 더해 주었다.
끝으로 ‘그리스 세계’가 있다. 기원전 이천 년대부터 가나안은 에게 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이 영향은 페르시아 지배 시대부터 더욱 커져 갔으며, 기원전 4세기에 와서 절정에 달하였다. 수년 사이에 마케도니아 사람 알렉산드로스는 아드리아해에서 인더스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기원전 323년 그가 죽자 그의 장수들이 이 제국을 분할하였다. 팔레스티나는 우선 이집트를 지배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국가에(알렉산드리아) 속해 있다가 후에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포괄했던 셀레우코스의 국가에(안티오코스) 예속되었다. 헬레니즘이라는 동일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음에도 이 두 국가는 끊임없는 갈등 관계에 있었으며, 이 때문에 팔레스티나는 주인을 여러 번 바꾸었다. 한편 그리스인들이 이 땅을 점령해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문화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문화에 동화된 상당수의 주민들이 팔레스티나에 정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유다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독자성을 견지해 왔기에 그리스의 영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극히 피상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투쟁이 없이 독자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마카베오기 상·하권). 헬레니즘의 영향은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에게는 더욱 중대한 문제였다. 비록 이들이 모든 일에서 이스라엘의 문화와 종교를 중시하고 이를 준거로 삼았음에도 말이다.
III. 구약의 경전
구약 성경은 히브리 민족이 저술한 문학의 총체가 아니다. 이는 권위를 인정받은 책들을 대상으로 선별한 결과이며, 이런 이유로 ‘경전’이라 불린다(그리스 말로 ‘경전’은 ‘규범’을 의미한다).
1. 유다교 경전
유다교에서 토라(또는 ‘율법’)는, 에즈라가 이를 확정하고 기원전 398년경 공포한 이래 공적인 결정의 척도가 되었다. 페르시아 당국은 이때부터 다섯 권으로 된 ‘모세의 책들’을 이 제국의 모든 유다인들을 다스리는 헌장으로 인정하였으며, 제국의 유다인들 또한 이 책들에 신앙과 실천 생활에 관한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규범적 가치를 부여했다. 이 책들은 이렇게 규범적인 책들, 곧 삶을 조정하는 책들이 되었다. 토라에 이어 두번째 모음집, 곧 ‘예언서’가 집대성되었으며, 이 예언서는 또한 전기 예언서와(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후기 예언서로(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열두 소예언서) 나뉘었다. 이 예언서는 토라에 버금가는 규범적 권위를 지니지는 못했지만 율법을 실천적으로 주해하는 기초 역할을 했고 율법의 효력을 넓혀 나갔다. 끝으로 구약 성경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경신례와 회당 집회 때 사용되었는데, 전례를 위한 기도문이었던 ‘시편’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모음집에 속한 책들은 권위 면에서나 경전의 수용 면에서나 그 사정이 각기 달랐다. 특히 각 권의 권위는 그 용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유다교의 경우 거룩한 책들의 목록은 한동안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23년에 사망)의 원정 이후 거룩한 책들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유다인 공동체가 기원전 4세기 말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졌으며, 이때에는 유다 역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왕조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했던 것처럼 페르시아 제국이 이미 부여한 적이 있던 종교적 특권을 유다인들에게 허용하였다. 이러한 특권으로 유다인들은 국가의 보호 아래 고유한 율법으로 관리되는 ‘민족’을 이루면서 자신들의 경신례와 문화적 특수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의 유다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점차 그리스 말을 수용하게 되자 ‘율법’ 역시 곧 그리스 말로 번역되었다.
‘아리스테아의 편지’라 불리는 유다 문서에 따르면 이 번역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2-246년) 시대에 왕명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루살렘의 대사제가 선정한 팔레스티나의 일흔두 유다인 학자들이 이 일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 ‘칠십인역’이라는 이름이 나왔는데 처음에는 ‘율법’ 번역만을 대상으로 하다가 후에는 구약 성경 옛 그리스 말 번역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아리스테아의 편지’가 비록 역사적인 가치는 없다 하더라도 여기에 나오는 연대만큼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이 편지에서는, 그리스 말을 사용하는 유다인들이 이 율법 번역을 히브리 말 율법과 동일한 규범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한 사실이 드러난다. 율법에 이어 유다교의 신앙과 삶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들이 번역되었는데, 예언서와 시편이 먼저 번역되었고 기타 문서들이 작품의 영향력과 권위에 따라 그 뒤를 이었다(집회서의 머리글 참조).
기원전 1세기와, 예루살렘 멸망에(기원후 70년) 이은 유다인들의 재건 사이에 여러 유다교 정착지에서 공적으로 인정되고 사용되던 경전의 범위가 어떠했는지를 단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로마인들에 맞서 싸웠던 유다인들의 최후 저항 요새였던 마싸다에서(기원후 73년 함락) 집회서 두루마리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유다교 회당에서 이 집회서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모든 종교적 분파 역시 동일한 경전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사두가이들은 율법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으며, 다른 어떤 책에도 이와 같은 권위를 공인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쿰란의 에세네 공동체가 그 권위를 인정했던 다니엘서를 경전에서 제외시켰다. 한편 쿰란 공동체는 토빗기와 집회서는 물론 바룩서도 사용했으며, 에녹서나 희년서와 같은 몇몇 외경들과, 공동체 생활을 규제했던 공적인 문서(공동체 규칙서, 성전[聖戰] 규칙서, 찬미가 모음집, 새 예루살렘서 등)에도 동일한 권위를 부여했다. 더욱 폭넓은 경전 목록을 수용했던 이러한 공동체와는 달리, 기원후 초세기에 성경 본문을 확정하고 그리스 말 역본을 개정하려고 시도했던 노력들이 입증하고 있듯이, 성경을 더 좁은 의미로 정의했던 공동체도 있었다.
기원후 80년과 100년 사이에 가서야 비로소 바리사이 유다인 학자들이 얌니아에 모여 경전 목록 작성에 아직 문제로 남아 있던 불확실한 점들을 정리했다. 이들은 우선 문제시되던 몇몇 책들의 권위를 확인했으며(코헬렛, 아가, 에스테르기), 그들이 보기에 최후의 예언서들인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와 말라키서 이후의 책들은 경전 목록에서 제쳐 놓았다. 이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의 유다교는 (가톨릭 교회가 기원후 16세기 식스토 5세 교황 이후 경전에 관한 전문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제2경전’에 속하는 책들은(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전체와, 그리스 말 역본에만 나오는 에스테르기와 다니엘서 일부) 물론 주요 외경들까지 경전으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여기에 어떤 확신이 작용했을까?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얌니아에서 확정된 경전에 대하여 그리스 말 공동체와 팔레스티나 학자들 사이에 어떤 갈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나, 성경 각 권에 부여된 권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아무튼 얌니아의 결정 이후에도 경전 목록 이외의 몇몇 책들이 필요에 따라 경전처럼 계속해서 인용되었으며, 이는 라삐의 지도를 받던 유다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집회서가 자주 인용되었다. 결국 제2경전의 책들은 경전으로서의 규범적 권위는 인정받지 못했어도 신앙 교육에 유익한 책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교 경전
그리스도교와 유다교가 완전히 결별하기까지, 유다교 회당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거룩한 책들을 물려받았다. 그리스도교는 그 뿌리를 내렸던 나라들, 곧 팔레스티나,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등의 유다교 공동체에서 중시되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던 대로 이 경전의 범위가 기원후 1세기 말경까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시대에 유다교 경전 목록은 아직 확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신약 성경에서 인용되거나 암시되는 구약 성경 본문을 살펴보면 어떤 책들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제2경전 가운데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옛 그리스 말 역본의 다니엘서가 분명히 인용되고 있으며, 지혜서 역시 알려져 있었고 집회서 또한 그러했던 것 같다. 몇몇 외경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물려받은 유다교의 유산을 이루었다(유다 서간 9절과 14-15절 참조). 얌니아 이후 유다교 경전이 확정되자 유다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그리스도교는 물론, 유다교와 논쟁을 벌이기로 작정한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와 논쟁을 벌일 때 양자 모두 인정하는 제1경전만을 사용하도록 독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유다교 경전에서 제외된 상당수의 책들을, 이미 작업이 끝난 그리스 말 역본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사용하였다. 3세기 초반, 오리게네스는 이 폭넓은 경전 사용을 잘 증언해 준다. 이 증언은 매우 중요한데, 여기서 그는 성경의 본문을 적극적으로 대조해 나가는 가운데 경전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얌니아에서 확정된 ‘유다교 성경’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던 자들을 거슬러, 구약 성경의 그리스 말 역본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교 성경’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경전은 경전성에 대하여 ‘논란이 전혀 없던’ 작품들에 ‘부분적으로 논란이 있던’ 작품들을 포함시키면서 점진적으로 확정되어 나갔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 언어권의 동방 교회는 경전을 확정할 규범 마련을 위해 어떠한 법적인 결정도 내려 본 적이 없었으므로, 성경 사용에 다양한 입장을 보여 왔다. 오늘날에도 그리스 말 성경이 제2경전을 담고 있음에도 이 경전의 권위에 대해 동방 교회 신학자들의 견해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서방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는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교회 회의와 인노첸시오 1세 교황의 편지가 입증하고 있듯이 4세기 초부터 제2경전을 포함한 공통 목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대에 라틴 서방 세계에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새로운 역자인 예로니모 성인은 제2경전 가운데 몇 권을 번역하고(토빗기와 유딧기), 히브리 말 성경을 대본으로 번역한 역본의 부록에 에스테르기와 다니엘서의 그리스 말 첨가 부분을 덧붙여 놓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밖에 다른 책들은 번역하지 않았다. 아마도 예로니모가 성경 번역을 위해 팔레스티나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그곳 유다교와 자연스럽게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가 제2경전 번역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던 것 같다. 16세기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유다교가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책들을 경전에서 제외시켜 부록에 수록해 놓고서는, 신심을 키우는 데는 유익하나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없는 책들로 취급하려 하자, 서방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1545-1563년) 통하여 이 책들을 교회의 경전으로 다시 천명하였으며 그 결과가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공의회 이후 교회의 공인 성경으로 불가타, 곧 ‘대중 라틴 말 성경’이 출간되었으며, 이 성경은 그리스 말 성경의 범례에 따라 제2경전을 오경 이외의 구약 성경 세 부분(역사서, 시서, 예언서)에 분산시켜 놓았다.
IV. 구약 성경 본문과 전수 과정
1. 구약 성경의 언어
구약 성경은 대부분 히브리 말로 저술되었다. 이 언어는 셈족의 언어 가운데 하나로서 아랍 말과 아카드 말과 가깝다. 이 성경 각주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 언어의 몇 가지 특징을 알아 두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구약 성경의 또 다른 언어인 아람 말도 그렇다.
히브리 말은 다른 셈족 언어와 마찬가지로 자음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왕정 시대의 비문들이 입증하고 있듯이) 처음에는 페니키아 문자의 도움을 받아 기록되었고, 6세기부터는 아람 말 알파벳(네모꼴 글자)과 함께 사용된 언어이다.
- (동사와 명사들과 같은) 대부분의 낱말들은 (일반적으로 세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어근에서 유래한다. (어형에 따라 변하는) 모음과 상당수의 접두사나 접미사는 명사의 성(性)과 수(數), 동사의 활용 등과 같은 문법적인 기능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축복’이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어근 ברך(로마자로, BRK)는 여러 형태를 지니는데, barek은 ‘축복하다’, berak은 ‘그가 축복했다.’, bereku는 ‘그들이 축복했다.’, yebarek은 ‘그가 축복할 것이다.’, baruk은 ‘축복된 자’(남성), beruka는 ‘축복된 자’(여성), beraka는 ‘축복’을 의미한다.
문맥에 따라 낱말의 뜻이 결정되기에 본문을 읽어 나가면서 각 낱말에 어떤 모음들이 나타나야 하는지를 살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히브리 말은 살아 있는 언어로 머무는 동안 (모음이 없는) 축약 문자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언어가 사용되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자 모음들을 표기하려는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 히브리 말에서 동사들은 특히 동작의 양상을 나타낸다. 동작이 펼쳐지는 시점을 가리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문맥을 통하여 결정되기에 동사의 형태는 그 동작이 완료되었는지 아니면 아직 완료되지 않았는지를 묘사할 뿐이다. 완료형은 흔히 과거로 번역되나 행위를 총체적으로, 곧 완성된 하나의 현실로 볼 때 미래를 의미할 수도 있다. 미완료형은 일반적으로 미래로 번역되나 행위가 지속 또는 반복되는 경우 현재와 과거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해당 행위가 과거에 속하는지 아니면 미래에 속하는지 분별하게 해 주는 것은 여전히 문맥뿐이다. 그럼에도 어려운 점은 문맥의 의미 자체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며, 이런 이유로 성경의 다양한 역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 말은 적지 않은 관용어법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성전을 말할 때 ‘그분 거룩함의 성전’이라 하고, 길을 떠나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는 일어나 갔다.’고 하며, 하느님 앞에 나서는 일을 가리켜 ‘하느님의 얼굴 앞에 나섰다.’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의 첫 그리스 말 역본들은 그리스 어법에 어울리지 않게 이러한 유형의 표현들과 히브리 말 특유의 또 다른 어법들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이 역본들은 ‘성경 그리스 말’이라는 특수 언어를 하나 만들어 냈다. 이 언어는 구약 성경에 사용되었으며 신약 성경의 언어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구조는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지중해 연안 모든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그리스 말의 구조와 거의 같다. 그러나 많은 낱말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생긴 관용어는 히브리 말과 아람 말에 고유한 어법을 기꺼이 활용하기도 한다.
2. 성경 본문 전수
1) 히브리 말(또는, 아람 말)로 전수된 책들
가) 마소라 본문
기원후 1세기 말 유다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이 거룩한 책들로 인정한 39권의 본문들은 원어인 히브리 말과 아람 말(다니엘서 일부와 에즈라기의 몇몇 구절)로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히브리 말 문자가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때로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경우를 낳았다. 그리하여 기원후 7세기경 유다교 학자들은 자음으로 된 본문에 각종 점과 줄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모음을 기록하고, 문장의 전통적 발성법과 구성 요소를 가리키는 확실한 방법 하나를 찾아냈으며, 이렇게 해서 성경을 읽고 주해하는 전승 하나가 글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 전승은 기원후 천 년대에 유다교 안에서 발전을 거듭해 왔던 것이며, 이에 대한 증거를 (히브리 말 성경을 아람 말로 번역한 작품인) 타르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사용하던 그리스 말 역본, 곧 칠십인역과 차별화를 원했던 유다교 라삐들은 기원후 두 세기 동안 (테오도시온, 아퀼라, 심마쿠스와 같은) 몇몇 그리스 말 역본들을 탄생시키는데, 이 역본들은 주해 전승의 역사를 더욱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기원후 10세기경 유다교가 공식적으로 확정한 히브리 말 성경 본문을 가리켜 ‘마소라 본문’이라 하는데, 이 시대는 가장 유명한 마소라 학자들(본문의 ‘지킴이들’, 곧 본문 전승을 확정하고 전수하는 자들을 말한다.)이 벤 아세르 집안이 살던 티베리아스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때였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마소라 수사본은 기원후 820-850년경 필사된 것으로 모세 오경만을 보여 준다. 마소라 본문 전체를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수사본은 기원후 10세기 초반에 필사된 것으로 ‘Codex Alep’(코덱스 알레프)라 불리나 오늘날 불행히도 훼손되어 전해지고 있다. 현대 히브리 말 성경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공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사본 B19A(L)가 1008년경 옮겨 쓴 마소라 본문을 복제한 것들이나, 대부분의 유다교 공동체들은 다른 여러 수사본들을 기초로 새롭게 구성한 히브리 말 본문을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 원(原)마소라 본문과 비(非)마소라 본문들
마소라 학자들의 작업 기초가 되었던 ‘자음 본문’(원마소라 본문)은 기원후 1세기 말경 유다교에서 이미 다른 본문들보다 우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47년부터 사해 주변의 키르벳 쿰란1) 유적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동굴에서 기원후 1세기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의 완벽한 성경 각 권을 담고 있는 몇몇 두루마리들과 수많은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성경 책들이 원마소라 본문과 다른 본문 형태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사실 우리는 쿰란과 유다 광야의 수사본 발견 이전에 이미 구약 성경의 본문과 다른 상당수의 비마소라 본문들을 알고 있었다. 모세 오경과 관련해서는 사마리아인 공동체가 간직해 온 본문이나, 가장 오래된 그리스 말 번역인 칠십인역의 원문 역할을 했을 본문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두 본문은 유다 광야의 수사본들에 비해 후기에 작성된 수사본에 담겨 있기는 하나 그래도 기원전 3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다.
마소라 본문을 앞서는 이 본문들은 때로 마소라 본문과 다른 본문을 전해 주기도 하며, 마소라 본문보다 명료하고 이해가 쉬운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기에 주석가들은 마소라 본문이 변질되었다고 판단하는 경우 이를 수정하기 위하여 이 본문들을 자주 참조한다.
다) 본문 변질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수의 변질된 본문들이 원마소라 본문을 원히브리 말 본문으로부터 갈라놓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 예를 들어 필경사가 실수로, 한 낱말에서 그 아래 줄에 있는 비슷한 다른 낱말로 건너뜀으로써 그 사이의 본문 전체를 누락할 때가 있다.
- 또한 글자가 불완전하게 쓰였을 경우 그다음 필경사가 이를 잘못 읽고 옮겨 쓰는 때가 있다.
- 또 어떤 필경사가 원문의 여백에 기록되어 있던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낱말들을 그가 옮겨 쓴 본문에, 때로 자리를 잘못 골라 삽입하는 때가 있다. 이 난외 여백에는 일반적으로 잊힌 용어, 다른 사본, 설명, 주석 등이 적혀 있었다.
- 나아가 몇몇 신심 깊은 필경사들은 교의적으로 위험한 해석으로 의심되는 어떤 표현을 ‘신학적으로 수정하여’, 본래의 본문을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렇게 변질된 본문들 가운데 상당수는 차이가 분명한 경우 비마소라 본문의 도움으로 밝혀지고 수정될 수 있다.
라) 본문 비평
어떤 본문의 형태를 선택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가능한 한 원본에 가까운 히브리 말 본문을 얻을 수 있겠는가? 몇몇 비평가들은 문학적 이유든 신학적 이유든 마소라 본문이 마음에 내키지 않을 때마다 이를 ‘수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비평가들은 원칙적으로 마소라 본문으로 만족했으며, 이 본문을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경우에만 이러저러한 오래된 번역본에서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이본(異本)을 찾으려 노력했다. 전자의 방법은 물론 매우 주관적인 방법에 속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본 전체를 주의 깊게 연구하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증언들, 곧 마소라 본문, 쿰란의 다양한 수사본들, 사마리아 오경, 칠십인역(그리고 뒤따른 세 가지 개정본)과 테오도시온 같은 그리스 말 역본들, 타르굼 같은 아람 말 역본들, 시리아 말 역본들, 고대 라틴 말 역본들과 예로니모의 대중 라틴 말 성경, 콥트 말 역본들, 아르메니아 말 역본들 같은 증언들에 대한 ‘계통수’(系統樹)를 작성하는 일이다. 이로써 이 모든 증언들의 바탕이 되는 원문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원문은 기원전 3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다소 긴 시대 차이 때문에 원형과 구별된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원문에서 원형에 이르려면 잘 정립된 본문 비평 원칙을 신중하게 적용하면서 몇몇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다.
쿰란 수사본 대부분은 현재 출간되어 있으나 본문 비평 작업은 수사본 분석에 관한 한 시간이 아직도 더 필요하다. 임의적이며 편파적인 수정에서 오는 위험을 방지하고자 우리말 성경 번역은 (프랑스의 ‘공동 번역 성경’ 책임자들처럼) 가능한 한 마소라 본문을 따르면서 다른 중요한 사본들, 또는 마소라 본문이 제기하는 문제점들을 각주에 명시하기로 한다.
2) 그리스 말로 전수된 책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설립 초기부터 그리스 언어권 유다교로부터 몇 권의 책들을 물려받았으며, 가톨릭 교회는 이 책들을 전통적으로 ‘제2경전’이라 불렀다.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이 이 책들을 그들의 거룩한 책 공식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이후 유다교는 기원후 1세기 동안 이 책들의 본문 전승 보장을 중지했다는 점에서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통일된 본문 전승을 보여 주지 못하며, 대부분 그 번역 대본으로 사용했을 셈족 말로 된 원문을 잃어버린 상태다. 성경 각 권 ‘입문’에서 본문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V. 구약 성경의 의미
구약 성경의 의미는 성경을 읽는 독자들, 서로 다른 종교 공동체에 속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또는 불가지론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드러날 수 있다. 구약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단 하나의 유다교적 방법 또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두 종교 안에 고고학적 발굴과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중시하는 더욱 ‘열린’ 독자들이 있는 것처럼 라삐들 또는 교부들의 전통적 해석을 기초로 삼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설명은, 유다교에서는 히브리 말 성경,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몇 가지 틀을 제시하려는 것일 뿐이다.
1. 유다교
히브리 말 성경을 구성하는 세 부분은(율법, 예언서, 성문서) 유다교 안에서 동등한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이 세 부분 사이의 관계는 율법 곧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유다교 입장에서 율법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영감을 받아 저술된 작품이기는 하나, 이 세 부분이 동일한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예언서와 성문서는 율법과 관련하여 읽고 이해할 때에만 가치를 지닌다. 이 점에서 히브리 말 성경의 두 부분, 여호수아기로 시작되는 예언서와 시편으로 열리는 성문서가 각각 모세의 율법에 대한 명백한 언급으로 시작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율법서의 말씀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밤낮으로 되뇌어, 거기에 쓰인 것을 모두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네 길이 번창하고 네가 성공할 것이다”(여호 1,8).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 율법)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 율법)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3).
모세 오경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라삐들은 ‘성문 율법’ 곧 모세 오경과 대비하여 ‘구전 율법’이라 불렸던 하나의 주해용 전승을 엮어 냈다. 라삐 전승에 따르면, 구전 율법도 모세가 알려 준 율법이므로 성문 율법만큼 중요하다. 이 ‘구전 율법’ 또는 (문서의 중개 없이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직접 전해지는) ‘선조들의 전통’은 체계화의 과정을 거친 다음 우선 미쉬나에, 이어서 탈무드와 다양한 주해 모음집에 글로 쓰여 담기게 된다. 구전 율법은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방법을 통하여 발전되어 나갔다. 하나는 종교적으로 숙고해 볼 내용을 제공할 목적으로 서술체 본문들을 설교식으로 자유롭게 주해하는 방법이었으며(학가다),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정의할 목적으로 법률집들을 주해하는 방법이었다(할라카). 처음에는 유다교 회당에서 읽힌 모세 오경과 예언서 일부가 주해의 대상이었으나, 후에는 다른 성경 본문에까지 확대되었다.
‘성문 율법’과 ‘구전 율법’은 이처럼 유다교의 종교 전통을 이룬다. 이 전통은 조직적인 교의가 아니라 토론식 전통이다. 탈무드는 사실 성경 본문 해설에 관한 라삐들의 격론을 담고 있으며, 상반되는 견해 사이의 논쟁이 해결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본문의 의미가 토론을 통해서도 밝혀지며, 부동의 고정된 의미란 있을 수 없다. 독자들 또한 스승들의 토론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성경 본문은 헬레니즘 시대 필론의 우의적 해석이나 중세기의 대학자 마이모니데스(히브리 말로, 모세 벤 마이몬)의 성경 율법에 대한 합리주의적 해설과 같은 수많은 주석 방법을 불러일으켰다. (11세기) 라쉬의 주석은 유다교를 세상에 알리게 했으며, 모세 오경에 대한 그의 해설은 최초로 인쇄된 히브리 말 책이 되었다. 지금도 유다교에서 라쉬는 비할 데 없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세기부터 자유주의 유다인 사회는 성경 본문의 역사 비평 연구에 매진했으며, 종종 라삐들의 견해를 역사 비평에 기초한 주석의 결과와 비교하며 대화를 모색하였다.
유다교의 여러 흐름 속에서 율법은 유다인 정체성의 신적 토대로 남아 있다. 율법은 유다인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한 백성, 바로 이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건네시는 호소를 삶과 행동으로 증언하도록 초대받은 한 백성의 구성원이라는 독자성을 견지하도록 이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에서 구약 성경은 ‘신약’,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계약과 비교하여 ‘구약’, 곧 옛 계약에 관한 성경이다. 그러나 마치 옛 계약과 이를 증언하는 구약 성경이 그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이 두 계약 사이의 차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기원후 2세기에 마르키온이라는 사람이 드러냈다. 그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고서 배척했던 사람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드러났다. 이는 신약 성경 자체에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구약 성경은 예수님과 초대 교회의 유일한 성경이었다. 예수님은 당신 복음의 기초로서 구약 성경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셨다.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본문의 본래 의미를 초월하는 완전한 경지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 희망의 근거였던 약속의 실제 내용을 인간이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성경 말씀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구원의 신비를 가리켰다.
이처럼 어디를 보나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신앙의 밑거름이 되었던 구약 성경을 친히 완성하신 분으로 보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교회는 유다교의 거룩한 책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데 필요한 출발점을 찾았다. 교회는 부활 사건에 비추어 예수님에 관한 사건과 행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고자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서로 대비되는 사건들, 성공과 실패, 죄인들과 성인들의 역사와 더불어 예비의 역사를 상기시켜 준 옛 본문들을 모두 다시 읽어 나갔다. 예수님의 메시지, 그분의 중개 사명, 모든 민족들의 구원, 이 모든 것들이 이미 첫 번째 성경 안에 기초되고 예고되고 예시되지 않았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신약 성경의 적지 않은 책들은, 구약 성경에 담긴 긍정적 가르침을 잃지 않고서 메시아 곧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예고를 찾아내고자 구약 성경의 본문들을 새롭게 해석해 나갔다. 또한 신약 성경은 그 자체가 자족하는 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약 성경은 그 완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구약 성경의 ‘연속’일 때에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교가 구약 성경에 대하여 일정한 자립성을 견지해 왔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메시지를 변경시키려고 성경 본문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뿌리이기도 한 바로 그 뿌리 위에 접목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복음서의 내용을 분명하게 밝히고 유다인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자 그리스도교의 첫 신학 체계가 이루어졌다. 아담과 모세, 다윗과 고통받는 종, 임마누엘과 구름을 타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상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언어를 엮어 내도록 이끌었다. 분명 신약 성경의 언어는 부정할 수 없는 다양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언어는 성경의 저자들과 독자들이 살고 있는 문화 세계의 자원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밀도 있는 낱말과 문장으로 짜여 있다.
이렇게 히브리 말 성경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바탕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의 서막 정도로 읽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서 환원적인 독서 방법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여러 주제들, 예를 들어 인간의 기원 문제, 사회생활, 나아가 이해하기 힘들고 아득하기만 한 문제로 보이는 하느님 체험 등과 같은 주제들은 신약 성경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독자를 첫 번째 성경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성경의 이 첫 번째 부분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모호할 뿐만 아니라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구약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전쟁에 개입하시는 문제, 학살 문제, 또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관습 문제 등이 있다. 물론 이런 문제에 관한 본문들을 배척하거나 애써 정당화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본문들은 우리가 성경 본문과 역사적 문화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이 본문들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오늘을 위한 의미를 찾아내려면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성경 각 권의 입문과 각주가 이 점에서 독자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성경 본문에서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고자 힘쓰고 있다. 그러기에 성경 전체가, 잦은 역사적 비극으로 갈라진 교회들의 공동 보화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듣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교회 일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표지가 아닐까?
첫 수사본들이 발견되었을 때 이를 ‘사해 수사본’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이 ‘쿰란 수사본’ 또는 경우에 따라 ‘유다 광야 수사본’이라는 이름보다 더 적합한 것 같다. 다른 발굴 작업들이 쿰란 지역을 넘어 사해에서 가까운 여러 동굴들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