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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1. ‘위로자’ 나훔
열두 소예언자 가운데에서 일곱 번째로 나오는 나훔은 ‘위로받은 이’를 뜻한다. 위로를 받았기에 다른 이들도 위로할 수 있는(2코린 1,4), 이 ‘위로자’ 나훔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구약 성경에 없다. 어근과 뜻은 같으면서 그 변형꼴인 다른 이름이 있기는 하다. 곧 므나헴이다(2열왕 15; 사도 13,1. 그리고 사도 4,36 참조). 또 나훔과 어근이 같은 유명한 이름으로는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를 뜻하는 느헤미야가 있다(느헤미야기).
나훔은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힘으로 지탱해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위안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준 예언자이다(로마 15,4-5 참조). 그를 움직일뿐더러, 그 자신도 신앙의 커다란 힘으로 확언하는 이 희망은, 사자처럼 무서우면서도(2,12-14) 동시에 큰 유혹의 힘을 지닌(3,4) 적들이 지금은 한창 융성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기필코 승리하시리라는 것이다(1,12; 3,15-17).
2. 구조
나훔서는 이 근본 주제를 연이어지는 세 가지 형식으로 전개시킨다.
1) 먼저 시편이 나온다(1,2-8). 일부는 다른 예언서들의 서론과 같은 방식으로(아모 1,2; 미카 1,2-4; 스바 1,2-3), 그러나 그것들보다 훨씬 강력한 방법으로 이 시편은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서 온 세상의 지고의 심판자로서 지니시는 두려운 면이 부각되지만, 그분의 다른 모습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1,3.7 참조).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나중에 더욱 생생한 빛 속에 드러나게 된다(1,3 각주 참조). 이 단락은 전체적으로 매우 일반적이며 초시간적인 바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구원 역사에 관한 시사들은 은근하게 이루어질 따름이다(1,3-4 참조). 그러면서 결국 이 책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8).
2) 두 번째 부분에서(1,9─2,3) 이 역사적 맥락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제2부에 나오는 신탁들의 어떤 요소들은 이해하기에 까다로운 면들을 지니고 있다.
3) 세 번째 부분은 니네베 멸망의 경축이다(2,4─3,19). 더 정확하게는 니네베의 멸망을 기원하는 것, 또는 그 위력의 절정에 다다른 니네베의 파멸을 불러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저마다 통일성을 지니면서도 니네베 성읍과 그 파멸의 여러 가지 면을 부각시키는, 특별히 시사적인 일련의 장면들이 이어진다. 이 성읍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1,8 각주 참조). 마찬가지로 이 성읍과 그 임금에게 내린 벌도 보편적 교훈을 이룬다. 곧 하느님께서는 니네베를 본보기로 만드시는 것이다(3,6).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은, 그것도 비상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은, 결국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시고(3,19),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1,7; 2,1.3).
나훔서 전체와 그 세 부분에 대해서는 이러한 개요적인 설명만 하고, 이 책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논거들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3. 나훔과 니네베의 멸망
나훔서를 기원전 612년 가을, 주님께서 당신의 적들에게서 거두시는 승리를 특별히 돋보이게 하는 니네베 멸망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신년 축제 때에 거행된 전례의 소책자로 제시하려고 애쓰는 가설이 있다. 물론 특히 나훔의 예언이 성취된 다음, 감사 전례 중에 이루어지는 재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서두의 시편 덕분에 이 예언서가 지니는 어떤 경신례적 경향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예언자가 직접 하였을 신탁들의 선포 시기, 또 이 소책자의 저술 시기까지도, 기원전 612년의 니네베 멸망 이전, 더 나아가서 3장에서 시사되는 기원전 663년의 이집트 테베의 약탈 이전으로 잡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더 상세한 시점을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서, 1,13에 따르면 유다가 아직도 아시리아 제국의 폭정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은 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이때는 곧 아시리아 임금 아슈르바니팔이 죽기 전이다(1,13 각주 참조). 그러나 다른 한편, 2장과 3장에 나오는 인상적인 장면들의 생생함과 그 현실감 때문에, 그것들이 바빌론인들과 메디아인들의(2,4) 아시리아 침공(3,12-13), 곧 니네베 포위를(2,2.4-5; 3,2-3.14) 최근의 사건으로 상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묻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는, 환상적 서술에서 그것이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정확한 연대를 이끌어 내려는 것으로, 오히려 이 예언서 제2부가 더욱 확실하게 시사하는 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시도가 예언자의 의도, 그리고 예언자가 그와 같은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상기시키려고 하는 내용을 잘못 이해할 위험성은 없는지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훔의 관심사와 역할은 단순히 주어진 정치적 상황을 피상적으로 분석하여 어떤 직접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족 앞에서 신앙의 전망을 펼쳐 보이고, 자기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효과적 말씀을 선포하면서 이러한 전망을 역사 속에 끌어들이는 데에 이바지하는 일이다.
그래서 1971년에 출판된 어떤 나훔 주석서에서는 신탁의 선포와 나훔서의 집필 시기를, 기원전 612년 가까이로 잡는 것이 아니라, 기원전 663년의 대사건 직후 몇 개월로 보려고 한다. 각주에서도 부분적으로 지적되겠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자료를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4. 예언자 나훔
나훔서의 제목이라고도 할 수 있는 머리글의 “환시”라는 말은(1,1) 매우 시사적이다. 나훔은 자기가 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게 해 주는 예언자이다. 그런데 그의 환시에서 주의를 가장 많이 끄는 것은, 그를 움직이는 열정, 그의 믿음의 열성이다. 현실은 비록 반대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결국 하늘에서 주어지는 불굴의 확신 속에, 주님께서 승리하시리라고, 아니 이미 승리하셨다고 힘차게 확언한다.
예레미야와 같은 대예언자들과 나훔 사이에는 상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러한 피상적 상반 관계를 넘어서서, 바로 나훔 예언자에게서도 살아 계신 주 하느님, 역사와 모든 인간의 주님, 바로 그러한 분과 이루어진 특별한 통교에서 비롯되는 똑같은 역동성이 드러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1,13에 나오는 나훔의 말과 예레 28,11에 나오는 하난야의 말에는 비슷한 점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른 것들을 자세히 비교해 보기도 전에 곧바로, 나훔을 예레미야의 적수였던 거짓 예언자 하난야와 엇비슷한 부류로 분류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책장을 조금 더 넘기다 보면, 예레미야 자신도 비슷한 용어들을 써 가면서, 징벌 뒤의 해방을 예언하였음을 알 수 있다(예레 30,8). 이는 예레미야 이전의 이사야도 마찬가지다(예컨대 10,5-19.24-27). 나훔서는 세 장, 마흔일곱 절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소책자에서 예레미야서와 같은 대작에서 볼 수 있는, 예언자들의 설교의 거의 모든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경탄할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그 열정 때문에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1,2 각주 참조).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 보내시는 사자(使者)들의 목소리도 그 어조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동일한 전통의 원천에 속한다는 연대 의식 속에, 예언자들은 조심스럽게 서로 영감을 주고 받으며, 서로 확장시키고 보완할 줄 안다. 그래서 예컨대 요나서는 나훔의 지평을 이어받아 그것을 더 넓혀 간다. 그리고 간혹 나훔의 니네베 멸망의 서술에 들어 있는 어떤 요소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요엘은(요엘 2,4-9. 그리고 나훔 2,4-5.11; 3,2-3 참조), 나훔서의 내용을 확장시키는 가운데 더욱 보편적 효력을 지닌 사건을 선포하기 위하여 “주님의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비교는 다른 예언서들과도 많이 할 수 있다. 금세기 중반부에 사해 부근의 쿰란에서 ‘나훔 주해서’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약 100년경에 집필된 이 주해서는, 신앙인들이 나훔서에서 역사의 모든 순간을 비추는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름대로 증언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