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입문
1. 내용과 구성
에페소서의 중심 주제는 “신비”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다. 이 계획은 창조 이전 영원의 차원에서 미리 결정되어 인류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에 가려져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행된다. 그 뒤에 이 신비는 사도에게 계시되어 교회 안에서 펼쳐진다. 이 서간에서는 교회가 이미 보편적인, 그리고 현세적이면서 동시에 천상적인 실체로 기려진다. 달리 말해서,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 곧 새로운 창조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러한 교회의 “머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이 “머리”에서 시작하여, 하느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팽창해 나아간다. 서간의 필자는 바로 이러한 전망으로 신자들을 이끌어 간다. 그는 교회의 이러한 역동성을 ‘몸의 성장’과 ‘하느님 집의 건설’이라는 두 가지 표상을 교차시켜 가면서 표현해 낸다. 교회는 이스라엘인들과 이민족들로 이루어진 한 공동체이다. 세례로 이 “몸”의 지체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그리고 진리를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면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에 동참하게 된다. 그들도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상이, 그리고 우주가 다시 하나가 되는 과정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에페소서는 분량이 거의 같은 두 부분으로 쉽게 나누어진다.
1) 첫째 부분에서는(1─3장) 전례와 교리 교육에서 쓰이는 특징적인 문체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지향하는 귀결점이 바로 교회임을 드러낸다. 먼저 인사에 이어(1,1-2), 특별히 유다교 전례에서 쓰이던 문학 유형으로 하느님의 가없는 은총을 노래하는 찬양이 펼쳐진다(1,3-14). 그다음, 깨달음을 주시기를 비는 기도에, 우주의 으뜸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기리는 찬미가 이어진다(1,15-23). 2장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대전환을 노래한다. 이 대전환 덕분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들이 되살아나고(2,1-10), 분열되고 소외되었던 이들이 다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된다(2,11-22). 은총으로써 구원이 각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그 결과로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 이렇게 이스라엘인들과 이민족들을 가르는 장벽이 사라져 둘이 화해하게 되었는데, 이는 온 우주의 화해를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화해를 개시하는 것이 바로 사도이다. 그래서 3장은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밝힌다(3,1-13). 이 첫째 부분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노래하는 찬미 기도와(3,14-19) 하느님을 기리는 영광송으로 끝을 맺는다(3,20-21).
2) 둘째 부분은(4─6장) 세례를 받은 신자들에 대한 훈계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이 훈계는 첫째 부분의 찬미와 가르침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도는 일치 속에 살아갈 것을 공동체에 권유한다. 그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유하려고, 직무 수행자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한다(4,1-16). 이어지는 훈계는 초대 교회에서 이행한 교리 교육의 전통적 주제들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곧 옛 생활 방식을 버리고 새 생활 방식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어야 하고(4,17-31) 하느님을 본받아야 하며(4,32─5,2) 어둠을 벗어나 빛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5,3-20). 필자는 이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정립된 가정 내의 인간관계, 곧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를 펼쳐 보인다(5,21─6,9).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가 부부와 같은 관계를 이룬다는 설명이 포함된다(5,25-32). 끝으로 악의 세력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그리스도적 무장을 갖추라는 권고가 나온다(6,10-17). 이때에 사용되는 표상이나 주제는 구약 성경에서 빌려 온 것들인데, 때로는 유다교의 한 분파였던 쿰란의 사상이나 당시의 대중 철학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빛으로 그러한 것들을 새롭게 조명하여 이용한다.
이 에페소서는 기도하라는 권유와(6,18-20) 짧은 소식에 이어(6,21-22) 마지막 인사말로 끝을 맺는다(6,23-24).
2. 성격
가. 에페소서는 전통적으로 필리피서, 콜로새서, 필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간’이라고 불린다. 이 서간의 역사적 틀은 콜로새서나 필레몬서와 같다.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 있다(3,1; 4,1; 6,20. 그리고 콜로 4,3.10.18; 필레 9.10.13.27 참조). 감옥 속에서도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그는, 이 서간과 콜로새서에서 똑같은 일을 티키코스에게 맡긴다(6,21-22; 콜로 4,7-8).
나. 그런데 에페소서가 다른 서간과 비슷하다는 사실에서 문제가 일어난다. 에페소서에서 역사적 자료의 형태를 지닌 모든 사항이 콜로새서에도 거의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서간의 관계는, 에페소서가 콜로새서를 이용한다는 사실로 정리된다(에페 6,21-22). 게다가 이 서간에 따르면, 사도는 자기가 서간을 써 보내는 신자들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1,15). 그래서 이 서간의 수신 공동체는 에페소의 교회가 될 수 없다. 바오로가 그곳에 비교적 오랜 기간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 서간의 1장 1절에서부터 벌써 시작된다. 에페소서에서는 수신인이 이 절 한 곳에서만 “에페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일부 수사본들에는 “에페소에 있는”이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다(1,1 각주 참조). 그래서 옛날부터 이 서간이 본디는 에페소 교회가 아니라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보낸 서신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콜로 4,16이 그러한 추측의 근거로 제시된다. 이 구절에 따르면, 바오로는 콜로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라오디케이아에 서신을 써 보냈는데, 현재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다. 에페소서와 콜로새서는 역사적 배경만이 아니라 문체도 비슷하다. 곧 전례적 설명의 이용, 과중한 문장 구성, 풍부한 동의어의 사용, 연이어지는 보어(補語), 분사절을 애용하는 표현법, 어휘의 유사성, 지혜 문학의 영향 등이 두 서간에 공통된 현상이다. 콜로새서의 특징들이 에페소서에서 더욱 두드러지고, 히브리 말과 아람 말식 표현도 더욱 많이 나타난다.
라. 에페소서와 콜로새서에는 내용이 비슷하거나 표현까지 거의 같은 구절이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다음의 것들이 특별히 돋보인다.
에페소서 | 콜로새서 |
1,6-7 | 1,13-14 |
에페소서와 콜로새서의 관계는 신약 성경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수수께끼에 관해서 아직도 완전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까지 제시된 주요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에페소서가 본디 바오로의 서간이었는데 나중에 어떤 필자가 자기 메시지의 무게를 더하려고 이 서간을 손질하여 콜로새서를 내놓았다는 가설이 있었지만, 현재 이를 지지하는 학자는 별로 없다.
(2) 과거에 가장 널리 퍼졌던 견해에 따르면, 에페소서와 콜로새서는 바오로가 거의 같은 시기에 인접한 여러 교회에 보낸 두 서간인데 콜로새서를 먼저 쓰고 동일한 구상에 따라 에페소서를 집필한다. 이 경우, 에페소서는 이 사도가 펼치는 사상의 마지막 단계를 드러낸다. 로마에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구원과 교회의 신비에 관하여 깊이 묵상한 바를, 아마도 회람 서간의 형태로, 여러 공동체에 물려주고 싶어 하였다는 것이다.
(3) 일부 학자들은, 바오로가 콜로새서를 쓴 다음에 비서나 측근 제자에게 둘째 서간 곧 에페소서를 쓰는 임무를 맡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이 두 서간에 나타나는 유사성과 상이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4)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이유로 에페소서가 후대의 작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도 이후 시대이면서도 사도의 자취가 아직 생생한 집단에서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에페소서가 보이는 성격을 고려할 때, 이 서간은 본디 전례 중에 이루어졌던 찬미와 훈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글로 쓰인 다음, 바오로 사도의 서간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서간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에페소서에서는 다른 곳에서 전개된 주제들이 되풀이된다. 그렇다고 에페소서, 그리고 바오로가 직접 쓴 다른 서간들 곧 로마서, 코린토 1서, 갈라티아서, 거기에다 콜로새서의 관계가 직접적인 종속 관계로 이해된다는 것은 아니다. 곧 에페소서는 기존의 바오로 서간들을 간추려 내놓은 글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도가 직접 설교한 것에서 주제들을 회상하고 나름대로 되풀이하여 작성한 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문체와 진행 방식에서는 콜로새서가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에 더 가깝다. 그러나 에페소서에는 바오로의 전형적인 주제가 더욱 풍부하게 나온다(예컨대 은총에 의한 구원, 하느님의 백성, 성령 등은 콜로새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쿰란과의 유사성도 에페소서에 더 많다.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에세네파는, 사도 이후의 세대 곧 그리스도교의 제2세대에 통용되던 교리 교육에 더 한층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지혜 문학이 에페소서에서 수행하는 역할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러한 역할은 이미 콜로새서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곧 지혜, 신비, 충만함을 가리키는 어휘들이 에페소서에서 더욱 많아지는데, 이것들은 결국 영지주의(靈智主義)로 이어지는 작업의 흔적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에페소서의 집필 시기를 바오로 이후 시대로 잡을 경우, 에페소서와 사목 서간(= 티모테오 1·2서와 티토서. 물론 이 서간들이 바오로 이후 시대에 집필되었다는 전제 아래), 그리고 요한 전통 사이에 드러나는 관계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이것들은 전부 한곳을 가리키게 된다. 곧 바오로가 상당 기간 체류하였던 에페소이다. 그러나 에페소서의 신학을 살펴보고 나서야 이 서간의 특수한 성격을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3. 신학: 뿌리내린 바오로 사상과 그 새로운 지평
필자와 집필 시기 같은 외적 문제가 어떠하든 간에, 에페소서가 바오로 사도의 사상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이러한 인상적인 연계가 없었다면 이 서간을 둘러싼 문제도 자연히 덜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주제를 간략히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수된 하느님의 큰 구원 사업이 이 서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운명에 결정적으로 참여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 하느님 은총의 선포와 찬양이, 서두의 찬미에서부터(1,3-14) 마지막 훈계에 이르기까지 이 서간 본문 전체의 어조를 결정짓는다.
- 세상의 화해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을 가르던 장벽을 없애는 것과 직결된다. 이민족들도 이제는 정식으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다(2,11-22).
- 바오로의 사도직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3,2-13).
-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된다. 이 에페소서는 교회와 관련하여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까지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느님의 계시는 어떤 이론이라든가 어떤 체제를 매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 그리고 이 공동체를 통하여 주어진다. 이 공동체야말로 하느님의 “신비”를 명백히 드러내는 실체이다.
이와 같은 바오로의 유산은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 변화가 단순히 에페소서보다 먼저 쓰인 콜로새서에 새롭게 나타나는 여러 주제에서 유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에페소서는 바오로의 유산을 이어받기는 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내용이 너무나 뚜렷하여 전체적으로 독창적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의 서간들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던 세상 종말에 대한 고대가 이 서간에서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오로에게는 세말에 관한 생각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긴장 관계가 중요하였지만, 이제는 다른 종류의 긴장 관계가 이어진다. 곧 구원을 둘러싼 긴장 관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고 교회에 계시된 구원은, 천상 영역에까지 반향을 일으키는(1,22; 4,8-10)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과 더불어 충만히 펼쳐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원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실체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이들이다(2,8). 세례를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영광 속에 들어간’ 이들이다.
에페소서에서는 하느님의 은총도 더 이상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벌어지는 대심판이라는 종말론적 맥락 안에서 선포되지 않는다. 이제 법적 범주 대신에 ‘신비적’ 범주들이 쓰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발전이 에페소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곧 그리스도교를 인간의 구원을 선포하는 여타의 종교들에 근접시켜 가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 사이의 관계도 사정이 비슷하다. 예컨대 로마서에서는 이 둘의 일치가 이스라엘 전체와 이민족 전체가 단순히 합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둘은 계속 구분된다. 그러나 에페소서에서는 이 둘의 일치가 완전한 결합으로 이루어져, 둘 사이의 다른 점은 이미 전부 과거의 일일 따름이다. 한편에서는 이스라엘의 최종적 회개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와 자기 백성에 대한 사도의 염려가 여전히 계속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에서 이미 실현된 만남에 대한 확실성이 두드러진다. 로마서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 또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 사이의 관계가 이를테면 법적인 관점에서 고찰된다. 반면에 에페소서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민족들의 화해가 윤리적인 동시에 우주적인 성격을 지닌다(로마 9─11과 에페 2,11-21 참조).
이전의 서간들에서는 교회가 일반적으로 지역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에페소서에서는 콜로새서에 이어, 교회가 하나의 우주적 실체로, ‘하느님의 지혜’와 같이 거의 의인화한 실체로 간주된다. 코린토 1서에 나타나는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이 에페소서에서는 우주적 차원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시간 안에 자리 잡은 역사적 실체로만 여겨지던 교회가 이 서간에서는 영원한 실체로 등장한다. 콜로새서에서는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페소서에서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함’ 곧 그리스도로 충만해져 있는 실체이다. 그리고 우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이 이제는 교회에 관한 말이 된다. 하느님의 집이라는 주제와 밀접히 혼합된 몸이라는 주제의 전개도 그 표현이 이제 절정에 다다른다. 거기에다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합일이라는 신비에 관한 새로운 설명이 첨가되면서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해진다. 이 합일은 부부의 결합을 모형으로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과 교회의 책임성을 명백히 드러낸다.
에페소서를 바오로 자신이 말년에 썼든, 그가 남긴 지침을 이용하는 그의 서기 가운데 한 사람이나 그의 영적 유산을 이어받은 어떤 제자가 썼든(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 사도들의 세대 이후에 그리스도교가 헤쳐 가야 하는 위기 상황이 이 서간의 배경을 이룬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태오 복음서라든가 루카 복음서, 그리고 요한 복음서의 저자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에 관하여 중요한 대답을 제시한다. 에페소서의 필자 역시 이들과 함께 그 대답 가운데 하나를 그려서 보여 준다. 그는 신자들을 이끌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어 하늘에 좌정하신 결과로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높이 기린다. 그리고 이 은총이 이미 교회가 탄생하고 성장하는 데에서 뚜렷이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또한 역사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향하여 계속 전진하는 것을 교회가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에페소서는 물론 과거의 특정 상황에서 태어난 문헌이다. 그러나 이 서간이 말하는 믿음은 오늘날에도 효력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 서간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시적이고 교육적인 설명으로 읽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