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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바룩서는 그리스 말 칠십인역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작품이다. 성 예로니모는 ‘히브리인들이 바룩서를 읽지도 않고 지니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라틴 말로 옮기지 않아, 대중 라틴 말 성경(Vulgata)에 수록된 바룩서 번역은 예로니모의 번역이 아니라 고대 라틴 말 역본(Vetus Latina)이다. 칠십인역에서 바룩서는 예레미야서와 애가 사이에 있고, ‘예레미야의 편지’는 애가와 에제키엘서 사이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중 라틴 말 성경 전통에 따라, 바룩서를 애가와 에제키엘서 사이에 놓고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인 6장에 싣는다. 이 ‘입문’에서는 칠십인역의 바룩서를 먼저 소개하고, 그다음에 ‘예레미야의 편지’를 설명하기로 한다.

1. 바룩서의 저자

예로부터 이 책의 저자로 불린 바룩(‘축복받은 이’라는 뜻)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비서이고 친구이며, 동시에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었다. 예레미야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룩은 예레미야의 명으로 그가 전한 신탁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백성들에게 읽어 주었으며(예레 36,1-8), 여호야킴 임금이 이를 칼로 조각내어 불태워 버리자 “비슷한 내용의 많은 말씀을 더 적어 넣어”(예레 36,32) 두루마리를 새로 엮어 낸 인물이다. 끝내 바룩은 친바빌론파로 몰려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끌려갔으며(예레 43,1-7), 그 이후 행적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바룩서의 저자가 예레미야서의 바룩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룩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비서’인 바룩은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남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저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빌론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배에 관해 당시의 문헌이 제공하는 정보와 바룩서의 자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예레미야의 ‘비서’를 이 책의 저자로 보기가 어렵다(1,1.2.8.10.12.14의 각주들 참조). 따라서 이 책은 가명 작품에 속한다. 가명 작품은 저자의 이름이 실제 저자의 이름과 다를 뿐 아니라 작품과 실제의 상황이나 그 대상도 본문의 진술과 다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바룩서를 읽어 나가면서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이다. 바룩서는 기원전 587년 네부카드네자르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배 기간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지만, 이 소재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추려고 적지 않은 수정을 하고 있다. 역사 속의 실제 상황과 본문의 역사적 상황 사이의 차이는 과거의 문제를 오늘의 문제로 현실화하는 과정을 잘 드러낸다. 바룩서를 공간과 시간 안에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이 책의 기능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본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 이면에서 실제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해야 한다.

2. 바룩서의 구조

바룩서를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혼합적인 작품의 구조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바룩서는 동일한 저자나 동일한 시대의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질적인 네 부분, 즉 역사적 서문과 참회 기도와 지혜에 관한 명상과 예루살렘을 향한 권고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이 네 단편은 각 단편이 구사하는 본디 언어만이 아니라 문학 유형과 사상 면에서도 서로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지금의 구조로 이루어진 이 모음집의 일관성과 그 전반적 기능이 문제로 제기된다.

1) 역사적 서문(1,1-14)

이 부분은 바룩서가 어떤 역사적 상황과 의도에서 쓰였는지를 밝혀 준다. 이 서문은 칠십인역에 친숙한 저자가 그리스 말로 직접 쓴 것인가? 아니면 본디 셈족 말을 사용하던 저자가 작성한 것인가? 이 두 가지 가설이 서로 맞서 왔으나 후자가 좀 더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서문은 바로 이어지는 기도의 머리글 구실을 한다. 참회 기도를 언제 그리고 왜 바쳐야 하는지와, 이 기도가 어떤 전례의 틀 안에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참회 기도(1,15─3,8)

이 부분은 고백과(1,15─2,10) 간청으로(2,11─3,8) 나눌 수 있다(1,15 “참회 기도” 각주 참조). 여러 성경 구절들을 짜깁기해 놓은 이 기도의 그리스 말 본문은 본디 히브리 말로 쓰인 기도문을 번역한 것 같다. 참회 기도는 민족적 고백 기도로 비교적 잘 알려진 문학 유형에 속한다. 이 문학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로는 에즈 9,6-15; 느헤 9; 시편 106; 다니 9,4-19가 있으며, 이 유형은 쿰란 문헌, 특히 제4동굴에서 발견된 ‘빛의 말씀’이라는 제목의 전례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기도의 시작 부분은(1,15─2,19) 다니엘의 기도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바룩은 특히 예루살렘과 그 무너진 성소에 관련된 다니엘서의 구절들을(다니 9,16.17ㄴ.18ㄴ.19) 생략하는 대신 유배살이하는 백성의 상황에 관해 좀 더 자세한 기록을 덧붙인다(2,3-5.13.14ㄴ). 이 같은 변화는 바룩의 참회 기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 이상 향유할 수 없거나 아니면 다니엘서에 묘사된 상황처럼 비극적인 상황에 처했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에서 나왔음을 시사한다. 연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다니엘서와 바룩서의 민족적 참회 기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바룩서가 다니엘서의 기도를 직접 빌려 왔다고 한다면 당연히 다니엘서의 기도가 바룩서의 기도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 그러나 이 두 민족적 고백 기도가 더욱 오래된 기도를 재인용한 것일 수도 있다. 옛 사상을 담고 있는 구절들이 그 좋은 예이다(2,17 각주 참조). 이 경우 두 작품의 저자는 같은 자료를 독자적인 방법에 따라 끼워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룩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례적 기능과 저술 일자와 장소에 대한 정보, 이를테면 단식과 애도,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 민족적 고백 등은 이 두 부분의 틀을 이루는 전례가 어떤 국가적 재앙이 지나간 뒤에 백성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목적으로 거행된 참회 전례임을 가리킨다. 매우 혼란스러웠던 몇몇 시대를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 치세에 발생했던 기원전 169년의 사건과 이후 수년간,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 또 기원후 70년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 등이 그런 시대들이다. 그러나 이 시대들 가운데 기원전 169년에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그로부터 5년 뒤인 164년에 유다 마카베오가 성전의 경신례를 정상화시킨 시대적 상황이(1,2.8 참조) 바룩서의 이 두 부분에 사용된 유형들의 현저한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네부카드네자르와 그의 아들 벨사차르를 위한 청원 기도는(1,11), 안티오코스 4세와 훗날 안티오코스 에우파토르가 될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로 생각할 수 있다. 바룩서의 이 두 부분이 저술된 공동체는 안티오코스 4세 치하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였을 것이다. 이 공동체는 대사제 메넬라오스와 같은 철저한 헬라 문화론자들과는 달리 유다의 종교적 전통에 강한 집착을 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는 군사적 저항에 반대하였다(1,11-12; 2,21.24).

3) 지혜에 관한 명상(3,9─4,4)

참회 기도 다음에 지혜에 관한 명상이 이어진다(3,9 앞 “지혜에 관한 명상” 각주 참조). 이 대목은 유배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불행의 이유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되는데, 그 대답은 지혜 문학 작품에 고유한 어휘를 토대로 펼쳐진다.

이 지혜에 관한 명상은 유다 지혜 문학 사상사(思想史)의 전환기에 자리한다. 범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지혜 개념은(잠언 8,17.31)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정의되는데(욥 28,28; 시편 111,10; 잠언 1,7; 9,10; 15,33), 이는 선민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받은 율법과 동일시되거나(4,1; 집회 24,8-12),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존재(잠언 8,22-30; 집회 24,9. 그리고 바룩 3,32-35와 각주 참조) 또는 사람들 사이에 사는 존재로 설명된다(잠언 8,31). 이후 후자의 개념은 신학적으로 발전하여 지혜를 메시아와 동일시하기에 이른다(1코린 1,24; 2,6-9; 요한 1,14). 바룩서에서는 이 두 개념이 하나로 모아지기도 한다(4,1과 3,38을 비교). 지혜를 율법과 동일시하는 사상은 그리스 말 본문에서 더욱 뚜렷하게 제시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혜를 메시아와 동일시하는 사상도 그리스 말 본문에 함께 나타나지만, 이 사상은 특히 바룩 3,38의 라틴 말 역본에 더 잘 드러난다. 고대 라틴 말 역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지혜를 야곱에게 맡기신 뒤에야 “땅 위에 그가 나타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말 본문은 “그”를 지혜를 가리키는 여성 단수 3인칭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라틴 말 본문은 남성 단수 3인칭으로 표현한다. 라틴 말 본문의 이 경미한 수정 작업은, 지혜와 율법을 동일시하는 경향에서 지혜를 메시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조심스럽게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 전체를 한꺼번에 매듭짓기에 충분하다(그러나 3,38 각주도 참조). 그리하여 교부들도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강생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바오로 사도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처음 두 장에서 바룩서의 이 부분을 다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룩서의 지혜에 관한 명상이 집회서와 교의적으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의 저술 연대를 기원전 2세기로 어림잡을 수 있으나, 그 이상의 정확한 연대를 밝히기는 어렵다. 이 부분이 어떤 언어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리스 말 원문을 가정하는 것이 무난하겠다. 이 부분을 바룩서의 다른 부분과 통합시키는 문제도 만족할 만한 해법을 찾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속죄의 날을 이용하여 선포된 설교의 흔적을 찾아낼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4)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4,5─5,9)

바룩서의 마지막 부분은 또 다른 문학 유형에 속하는 작품이다(4,5 앞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 각주 참조). 이 부분은 격려와 위로의 시로 짜여 있는데, 그 문체가 제2이사야서와 매우 가깝다. 이 부분의 원어가 히브리 말인가 그리스 말인가 하는 문제는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에 쓰인 ‘솔로몬의 열한 번째 시편’이 바룩서의 이 부분과 매우 가까우나,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바룩서의 이 부분이 솔로몬의 시편보다 오래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을 유배 생활 초기로 잡고 이민족과의 화평 정책을 권장하는 역사적 서문이나 참회 기도와는 달리, 이 부분은 이민족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곧 돌아올 것임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처음의 두 부분과 전혀 다른 시대적 상황과 세계를 배경으로 하며, 기원전 63년 이전, 아마도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셀레우코스 왕조와 거리를 두고 있으며 하스몬 가문의 정치적, 군사적 성공으로 용기를 얻게 된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가 저술했으리라 본다. 한편 예루살렘을 위한 이 권고는 별 어려움 없이 참회 전례의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 같다(4,20 각주 참조). 이 부분은 결국 이스라엘의 민족적 탄원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신탁 형식으로 주신 응답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3. 칠십인역 바룩서의 통일성

앞서 살펴보았던 대로 바룩서는, 예루살렘 출신 유다인들에게 참회 전례를 거행하도록 독려하는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가 남긴 기록이다. 가장 오래된 처음 두 부분은 기원전 164년의 사건들과 같은 시대에 또는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성된 작품으로서, 메넬라오스파와 마카베오파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중도 입장을 취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유래한 것 같다. 이와는 달리 이 두 부분에 덧붙여진 네 번째 부분은 유다의 독립으로 일어난 시대적 분위기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지혜에 관한 명상을 내용으로 하는 세 번째 부분은 그 출처를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문체, 특히 화자가 동일한 데서 오는 일관된 문체를 근거로 이 부분을 기꺼이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에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룩서는 전체적으로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최종적 틀을 갖춘 듯하다.

현재의 바룩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생긴 단절을 공인하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둘 사이의 화해로 끝난다. 단절에서 화해로 나아가는 과정은 죄에 관한 반성에 이어 율법과 동일시되는 지혜에 관한 명상으로 진행되는데, 이것이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룬다. 바룩서의 통일성은 그 전례적 기능에서도 발견된다. 바룩서는 아마도 참회를 위한 단식일의 안내서처럼 읽혔을 것이다. 이 책이 실제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전례서로 자리 잡은 것은 기원전 2세기 이후일 것이며, 특히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애도하려고 단식일에 읽었을 법하다. 유다 전승, 그 가운데서도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와 미쉬나는 기원전 587년과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가 똑같이 다섯째 달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으며, 라삐 문헌들은 즈카 7,3과 8,19가 암시하는 단식을 예로 들어 기원후 70년 이후에 참회를 위한 단식이 거행되었다고 언급하고, ‘사도 헌장’(V, 20,3)도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 기념일에 바룩서를 읽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바룩서가 성전 파괴를 애도하는 단식일에 읽혔다는 가설을 뒷받침해 준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에서도 바룩서의 몇몇 구절들을 봉독한다. 특히 바룩 3,9-15; 3,32─4,4는 부활 성야 독서의 일부를 이룬다.

4. 예레미야의 편지

예레미야의 편지는 번역본에 따라 애가 다음에 나오기도 하고 바룩서 다음에 나오기도 한다. 이 편지는 바룩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대중 라틴 말 성경에서는 바룩서 6장을 이룬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애가와 예레미야의 편지를 포함한 예레미야서’는 히브리 말 경전 22권 가운데 하나이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VI, 25 참조). 이와는 달리 예로니모는 이 편지를 외경으로 여겨, 대중 라틴 말 성경에는 이 편지의 고대 라틴 말 번역을 옮겨 놓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 본문의 구조와 내용

본문의 서두는 이 글이 예레미야가 저자로 되어 있는 편지의 사본이며, 편지의 수신인들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려는 사람들임을 밝힌다. 문학 유형상 서간보다는 설교에 속하는 이 글은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계심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예레미야서와 제2이사야서와 맥을 같이하면서(이사 44,9-20; 예레 10,1─16,21. 그리고 이사 40,19-20; 41,6-7; 46,1-9 참조) 이후 지혜서와(13─15장) 바오로 서간과(로마 1,18-32) 같은 작품에서 펼쳐질 신학적 사상을 준비시켜 준다.

본문은 후렴처럼 반복되는 권고를(4.14.22.28.39.44.51.56.64.68절) 기준으로 쉽게 나누어지지만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도입 부분에(1-6절) 이어 나오는 첫 번째 단락은 우상들을 무기력하고 썩어 없어질 피조물로(7-26절), 경멸해야 할 예식의 대상으로(27-32절), 무능한 존재로(33-39절) 단죄한다. 두 번째 단락은 같은 논지를 순서를 바꾸어 되풀이한다. 곧 우상 숭배(40-44절), 우상들의 속성(45-51절), 그것들의 무력함(52-57절) 순으로 소개한다. 끝으로 우상들이 실용적인 물건이나 자연 현상 또는 야생 동물들에 비해 훨씬 못난 것들임을 강조한 다음(58-68절), 본문은 이 우상들을 허수아비와 가시덤불과 주검과 비교하면서 쓸모없고 무기력하며 썩어 없어질 것들이라고 결론짓는다(69-71절).

2) 친저성과 원문의 언어

예레미야서의 정보들과 이 편지의 몇몇 자료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발견되며(예를 들어 2절 참조), 이 편지가 예레미야 예언자 이후의 작품들을 분명하게 인용하고 있고 히브리 말 경전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등은 이 편지를 예레미야의 작품으로 생각하려는 친저성 시도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 편지에 사용되었을 원어와 거기에 언급된 우상들의 신원을 근거로 내세워 어떤 사람들은 이 편지를 헬라 유다교에서 유래한 그리스 말 문서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바빌론의 유다 공동체를 수신인으로 삼아 셈족 말로 쓴 본문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 작품으로서 바빌론의 우상 숭배를 셀레우코스 시대의 우상 숭배와 연계시킨 것이라고 역설한다. 어떤 학자들은 잃어버린 셈족 말 본문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 역자의 실수로 몇몇 오역이나 잘못 이해한 부분들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 말 본문의 상당한 난제들을 설명하려 시도했지만, 이 주장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6,11.30.71 각주들 참조). 이 편지의 69절이 칠십인역에는 없는 예레 10,5의 히브리 말 본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편지의 원문이 히브리 말로 쓰였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된다. 셈족 말 원문이 있었다면 이 원문의 그리스 말 번역은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편지의 그리스 말 단편이 쿰란 제7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43-44절 참조), 이 단편은 ‘예레미야의 편지’의 가장 오래된 증거이며 기원전 100년경에 필사된 작품으로 추정한다.

3) 역사적 배경

우상들에 대한 고고학적인 묘사, 경신례와 사제직에 관련된 기록(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예레미야서와 이사야서를 되풀이할 뿐이다.) 등은 사태를 피상적으로만 보고 조직적인 적대감을 드러낸 어떤 사람의 작품인 듯하다. 그러나 몇몇 기록들은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작성한 것처럼 보인다. 비교적 상세한 이런 기록들은 특정한 경신례 분위기를 전하는데, 어떤 주석가들은 이 기록들이 셀레우코스 시대에 부흥된 바빌론의 경신례를 전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기록들에서 논쟁 요소를 제거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의 몸단장에 관한 기록은(12절) ‘입 세척’ 예식을 암시하고, 사제들이 희생 제물을 팔아 이득을 챙기는 행위는(27절) 우상에게 동물의 기름진 내장을 바친 다음에 사제들이 서로 희생 제물의 몫을 나누어 가지던 관습을 암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빌론의 지고의 신 벨은 므로닥을 말한다. ‘주술사’로서 사제들은 므로닥의 힘으로 질병의 악령을 몰아낸다고 주장한다(36절). 치유의 신인 므로닥은 또한 정의의 신(13절), 전쟁의 신(14절), 행운의 신(34절), 비의 신이기도(52절) 하다. 마지막으로 30-31절은 수레 행렬과 애도 의식을 언급하면서 신년 축제의 첫 번째 행사를 언급하는 것 같다. 신년 축제에서 므로닥과 그의 하급 신의 신상들은 수레에 얹혀 신전 구내에서 나와 도성 밖으로 행렬을 이루며 나아간다. 신이 도성에서 사라짐은 고통의 상황을 뜻하지만, 개선하여 돌아오면 그 고통은 끝난다. 또 다른 기록들, 특히 여사제직이나(28-29절) 신전 매음과(10절과 42-43절) 관련된 요소들은 전쟁과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 숭배를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 예레미야의 편지에서는 사랑의 여신으로서 이쉬타르 숭배만 부각된다. 이 첫 번째 가설에 따르면, 이 편지의 셈족 말 원문은 바빌론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가 당시 부흥하던 바빌론 종교와 어떠한 형태의 타협도 하지 않도록 경계시키기 위해서 보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편지에 나오는 우상들의 신원을 밝히려고 바빌론과 네부카드네자르(1-3절), 또는 칼데아인들에(40절) 대한 언급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 편지의 저자로 예레미야를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언급들은 이 편지를 가상의 역사적이며 지리적인 배경, 곧 바빌론 유배라는 배경 속에 자리 잡게 하려고 쓰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가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곧 이 편지는 시리아나 페니키아의 예배를 거슬러 논쟁을 펼치고 있다는 가설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닷과 아스타롯 숭배를 떠올릴 수 있다. 수레 행렬은 특별히 옛 시리아 동전에서 자주 나타난다. 또한 더 후대의 사모아 루치안의 증언에 따르면(시리아 여신, 6), 죽었다가 소생하는 아도니스를 기념하는 예식들이 비블로스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집전되었으며, 이 예식들은 죽음을 애도할 때에도 거행되었다. 예식 참가자들은 머리를 깎았고 그들에게는 매음 의식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견해들이 가설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할지라도 앞서의 견해들과 비교해 볼 때, 이 편지 안에서 헬라 유다 사상, 특히 우상들을 거슬러 ‘솔로몬의 지혜서’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의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몇몇 논쟁적 요소들을 밝혀내는 데 도움을 준다(17.45-47.59-67절 각주들 참조). 이 두 번째 가설은 편지의 원문이 셈족 말로 쓰였건 아니건 관계없이 이 편지가 그리스 시대에 시리아나 페니키아의 몇몇 유다 공동체들을 수신자로 작성되었음을 전제한다.

4) 작성 연대

마카베오 하권은(2,1-2), 예레미야가 유배자들에게 화려한 치장을 한 금은 신상들의 모습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문헌을 언급한다. 이 문헌이 예레미야의 편지에 대한 암시라면, 이 편지가 기원전 2세기 후반 이전에 쓰였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이 편지 2절과 예레 29,10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전자가 후자의 “일흔 해”를 “일곱 세대”, 곧 280년으로 바꾼 것은 일종의 현실 적용을 위한 표지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바탕으로 기원전 597년 1차 유배 또는 기원전 587년 2차 유배로부터 “일곱 세대”를 계산하여 내려가면 대략 기원전 4세기 말엽에 이르게 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저마다 취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편지의 작성 연대를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2세기 초반 사이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5) 문체

편지의 저자는 선임자들처럼 논쟁의 무기로 냉소적 문체를 구사한다. 그는 자신의 논쟁을 신랄하게 할 목적으로, 우상 숭배자들이 신을 형상화한 우상을 신 자체와 혼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우상들이 아무리 신성시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환영으로서 숭배자들에게 무기력한 존재로 남아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짐짓 모른 체한다. 사실 우상 숭배에 관한 비판은 그런 비판 의식을 견지하는 신학의 기능에 속한다. 편지에서는 이 신학이 암시될 뿐이라 해도, 여기에서 그 개요를 어림잡는 일은 어렵지 않다. 먼저 우상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기능과 특성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함축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특히 33-37절과 52-53절의 난외주 성경 구절 참조). 만들어지고(7절과 45-46절) 썩어 없어지는(19.23.54.71절) 우상들과는 달리 유다인의 하느님은 창조되지 않고 영원하신 분이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들, 피조물들의 피조물인 우상들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대조를 이룬다. 우상들은 수없이 많지만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며, 우상들은 생명이 없지만 그분은 ‘살아 계신 분’이시다. 우상들은 감옥처럼 신전 안에 갇혀 있지만 하느님은 공간의 제약 없이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며, 우상들은 사람들에 관한 일들이나 그들에게 직접 관계되는 일들을 안배할 능력이 없지만, 하느님은 만물을 섭리하시며 당신 스스로 온전한 충만을 누리는 분이시다. 이처럼 이교 신들을 형상화한 우상들에 대한 논쟁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초월성, 그분의 창조와 섭리 행위의 초월성을 새롭게 다지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