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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을 비롯한 묵시 문학은 예언 문학이 특이하게 발전해 나아간 한줄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원전 2세기부터 성경과 외경에 묵시 문학의 영향이 명백히 나타난다(예컨대 다니 7─12 참조). 그러나 이 문학 유형은 에제키엘서를 비롯하여 요엘서와 즈카르야서, 그리고 이사야서 24─27장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묵시 문학’의 일반적 성격
1) 계시의 형태
예언 문학은 가끔 환시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신탁(神託)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신탁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또는 직접 체험하였다고 믿는 예언자가 그분의 이름으로 전하는 말씀이다.
반면에 묵시 문학에서는 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이 무엇보다도 환시가이다. 그는 ‘하늘이 조금 열린 것’을 본 사람이다. 또는 일종의 ‘승천’을 체험하여 ‘천상 세계’의 일부를 보고 또 일반 사람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그곳의 실체들을 살펴볼 기회를 얻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지는 자기들이 ‘엿볼’ 수 있었던 것을 서술하고 해설하는 형태로 전승될 수밖에 없다. 표상이 이야기보다 먼저이다. 그리고 말은 먼저 장면이 펼쳐지고 난 뒤에 그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보통은 장면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보충할 때에만 나온다.
2) 상징의 사용
묵시 문학의 환시가들이 바라본 천상 실재는 그 본성상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상위 범주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도 못하고 자세히 정의하지도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기가 접한 이 ‘전혀 다른’ 영역, 거룩함 그 자체인 세계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려면 조금씩 다가가는 접근법을 쓸 수밖에 없다. 곧 특이하기도 하고 엄청나기도 하며 때로는 역설적이기까지 한 유추(類推)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이미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 현현의 서술이라든가 그리스-동방의 다양한 종교적 표현과 의식(儀式)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상징의 이용은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의 은밀성을 강조하고, 또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하는 것을 부각시킨다. 우의(寓意)와 암시와 수수께끼 같은 말이 가득한 묵시 문학은 거기에 입문한 이들만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곧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들만 천상 비밀의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3) 묵시 문학적 환시의 대상
그리스 종교에서는 곧잘 진리를 깨닫거나 표본적 실체를 관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반면에 성경의 계시는 하느님의 뜻, 그리고 인간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밝힌다. 그래서 계시에는 자연히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이 전제되고, 하느님의 행동 방식에 따라 살아가라는 부르심이 뒤따른다.
이른바 고전 예언서에서는 사람들을 권고하고 독려하는 노력이 직접적으로, 또 통상 분명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그들이 받은 소명과 특권적 운명을 상기시키면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계약이 현 시점에서 그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선포한다. 이때에 경이로운 과거를 상기시킴으로써 하느님께 마땅히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새로운 복이나 벌을 예고하여 영적 또는 도덕적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각오를 불러일으킨다.
묵시 문학에서도 충성이나 회개에 대한 권고와 독려는 근본적인 사항이다. 그러나 예언 문학에서보다는 덜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묵시 문학의 환시는 역사의 신비를 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하느님 계획의 중대한 최종 단계들이 거침없이 전개되는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새 시대가 다가오고 그것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준비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하여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참목적을 신자들에게 밝혀 준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는 그 자체로서는 경고의 의미만을 지닌다. 곧 박해받는 이들에게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태도가 미온적인 이들에게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길 잃은 이들에게는 회개를 권유한다.
예언자들의 설교에서는 회개와 충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유지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반면에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밝히는 묵시 문학에서는, 인내하고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이 계시 그 자체 안에 내포되어 있다.
4) 계시의 절박성, 발생 시기와 가명성(假名性)의 문제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신탁과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는 묵시 문학의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절박한 것으로 드러난다. 독자는 “주님의 날”과 심판 날이 다가왔음을 예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긴박성은 여러 방식으로 시사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흔한 방식이 계시의 발생 시기를 끌어올리는 것과 계시를 받는 주체를 가명으로 하는 것이다. 곧 먼 옛날 유명 인사가 받은 계시가 일련의 입문자(入門者)의 손을 거쳐 전승되거나 훗날 기적적으로 발견된 것으로 제시된다(예컨대 바룩의 묵시록, 에녹서, 모세 승천기, 제4에즈라기 등 참조). 계시가 이렇게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특권을 받은 인물에게서 유래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계시가 중요함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계시의 시점을 옛날로 잡음으로써, 사람들이 계시의 글을 읽을 당시에 이미 이루어진 역사를 미래의 일로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여 능란한 솜씨로 채택된 투명한 상징들로 서술된 최근의 사건들이 바로 세상 종말을 가리키는 마지막 표징이 된다. 그래서 시대를 계산할 줄 아는 독자들은 이제 곧 의인들의 승리와 악인들의 처벌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선포의 의도는 명백하다. 종말의 시대가 가까웠으므로 지금의 때가 매우 중대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계속 열정을 간직하고 신앙을 위하여 투신하게 한다.
5) 세상과 역사에 관한 해석
예언자들의 설교에서는 연이어지는 시간 안에서, 그리고 선택된 백성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틀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묵시 문학에서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이 있음을 전제한다. 현재는 죄악과 사악한 세력들의 지배가 특징을 이루는 시대이고, 미래는 하느님과 그분께 선택된 이들의 승리가 그 힘을 완전히 행사하는 시대이다. 갈등과 시련의 때인 현시대가 다하고 이제 하느님의 질서가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일이 이렇게 벌어지는 데에 불확실성의 여지란 전혀 없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다. 기간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일반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하느님 홀로 역사의 주님이시며 심판관이시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 도래와 관련된다. 그래서 종말에 관한 묵시 문학의 환시는 창조 때와 같이 우주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묵시 문학의 관념은 비관적이면서 동시에 낙관적이기도 하다. 현 세상이 사악하고 또 때가 다 되었음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비관적이고, 악이 우세한 듯이 보이지만 결국은 하느님께서 승리하실 것임을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낙관적이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위기의 때에 활발히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묵시 문학 작품들은 박해 때에 저술된다.
2. 요한 묵시록의 특성
요한 묵시록은 이러한 묵시 문학의 방식과 구조를 대부분 이어받는다. 그러면서도 신약 성경의 이 마지막 책은 전통적 묵시 문학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은 명백히 묵시 문학의 형태에 속하지 않는다. 아시아 속주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간은(2─3장)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설교에 더 가깝다. 여기에서는 예언 문학에서처럼 저자가 자신을 밝히고 또 동시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요한 묵시록은 무엇보다도 신앙에 따른 역사 해석과 그 주된 관심사 때문에, 묵시 문학 유형에 속하는 대부분의 다른 작품과 구별된다.
1) 그리스도교적 역사 해석
세상 종말에 관한 요한 묵시록의 환시에는 자연히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의 몇몇 본질적인 신념이 스며들어 있다. 우선 유다교 묵시 문학에서 선포하고 고대하던 새 시대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열렸다. 이제 마지막 때가 시작되었고 메시아 시대의 은총이 베풀어졌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 위에 내려오셨고(사도 2,16-21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이다(콜로 3,1 참조).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나라는 늘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계시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은 그것을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는 완전히 실현되어 영광스러운 그 모습이 드러나는 시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관점에 따라 “주님의 날”은 이중의 성격을 지닌다. 이 “날”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하느님 오른편으로 오르시어 주권을 쥐신 일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날로서,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영광에 찬 그 모습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때를 가리킨다. 지금은 ‘현시대’와 ‘새 시대’가 교차하는 시점이다. 교회는 현재의 시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미래의 시대에 속한다. 그래서 교회는 종말론적 실재이다. 곧 교회는 옛 예언의 성취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닥칠 세말에 대한 예언적 보증이기도 하다.
2) 환시의 목적
이렇게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다교 묵시 문학에서 말하는 현시대와 새 시대의 단절은 새로운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곧 두 가지 다른 단계보다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질서를 가리키게 된다. 곧 역사적 질서와 종말론적 질서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목적으로 세말의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환시의 유일한 역할이 아니다. 묵시록의 환시는 오히려 이미 개시되고 알려진 신비로운 실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신학이 역사에 관한 묵시 문학적 서술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전망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승리로 이끄시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라는 부르심에서도 힘을 얻는다.
결과적으로, 전통적 묵시 문학에 흔히 나타나는 절박성이 묵시록에서는 종말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보다는 종말이 지체되는 것과 더 관련된다. 묵시록에서 이 주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계획의 결정적 단계가 파스카 사건으로 계시되고 또 시작되었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곧 마지막 때가 임박하였다.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림은 종말의 행복과 관련되는데, 그 행복의 첫 부분이 이미 지금부터 베풀어지는 만큼 더욱 확고하고 활발하다.
이런 식으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건들을 숙고하고 교회의 상태를 더욱 깊이있게 고찰함으로써,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계약의 기적을 상기시키고 이스라엘의 소명을 기억시켜 영적 각성을 일으키려는 예언자들의 설교와 가깝게 된다. 이렇게 하여 묵시록에서는,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느냐는 것보다는 그 나라의 신비 자체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 묵시 문학에서는 주로 임박한 “주님의 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계산을 할 수 있도록 가명(假名)을 쓰고 계시의 발생 시기를 끌어올리는 것과 같은 방식이 쓰이는 데 반해, 요한 묵시록에서는 그러한 방식들이 채택되지 않는다.
3. 저자와 저작 동기
묵시록은 저자와 관련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또 하느님의 종 예언자라고 밝힌다(1,1.4.9; 22,8-9). 그는 어디에서도 자신을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이미 2세기에서부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확고한 전통에서는, 요한 사도가 넷째 복음서와 함께 묵시록도 저술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전통에서는 묵시록의 저자 문제와 관련하여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 공동체들에서는 이 책이 사도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에 대하여 오랫동안 의심을 품기도 하였다.
현대 주석가들은 여러 견해로 갈라져 있다. 어떤 이들은 묵시록과 넷째 복음서를 한 저자가 저술하였다고 보기에는 문체와 분위기와 신학이 너무 다르다고 판단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이와 반대로, 이 두 작품이 보이는 주제와 교리의 유사성에다가 셈족의 배경까지 강조한다. 이들은 묵시록과 넷째 복음이, 틀림없이 에페소의 요한계 편집자들이었을 특정 인물들을 통해서 요한 사도의 가르침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묵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다(1,4.11; 2─3). 이는 현재의 소아시아 서남쪽, 에페소를 주도(州都)로 하는 아시아 속주(屬州)의 신자 공동체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일곱은 일주간처럼 어떤 것이 완전히 찼음을 의미하는 수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가 특별히 아는 몇 군데 특정 공동체만이 아니라 전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집필 동기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분명한 표지가 드러나는데, 그렇더라도 집필 연대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다. 우선, 교회는 이미 박해를 겪었고, 또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반대에 봉착한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고대하던 그리스도의 재림이 늦어지고 또 지체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어떤 이들은 타협적인 자세와 비열성적 태도를 보이고 다른 이들은 실망하고 의문을 품으며 조급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항들을 염두에 둘 때, 저작 시기에 관해서는 주로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네로 황제의 박해와 예루살렘의 파괴 사이, 곧 65-70년이다. 둘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말기, 곧 91-96년이다. 첫째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전과(11,1-2) 이어지는 로마의 왕위 계승을 시사하는(17,10-11) 내용이 제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둘째 가설의 가능성을 더 크게 본다. 이 가설이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의 증언과도 부합한다. 또한 도미티아누스가 스스로 나서서 황제 숭배를 촉진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가설은 묵시록이 주 예수님의 통치와 황제의 신성 모독적인 통치가 정면으로 배치됨을 강조한다는 것에도 잘 들어맞는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학자들은 이 작품의 저작 동기가 이보다 더 복합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묵시록이 한꺼번에 저술되어 전체적으로 동질성이 유지된 작품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1세기 말엽 수십 년 동안에 저술되고 손질된 다양한 단편들이 서투르게 조합된 작품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4. 구조와 그 해석
묵시록의 특정 단편들이나 단락들은 본디 서로 관련 없는 글들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온 이 문헌은 일정한 구조를 드러낸다. 이 구조는 물론 현대인들의 저술 관습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동일한 흐름과 상당히 일관성 있는 방식을 엿보게 해 준다.
이 책은 첫눈에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교회에 보내는 서간’ 형태로 제시되는 예언 부분(1,9─3,22), 그리고 좁은 의미의 묵시 문학에 속하는 부분이다(4,1─22,5). 둘째 부분에서는 전체적으로 묵시 문학의 관습적 도식을 볼 수 있다. 곧, 세말의 전조(6,1─11,19) → 직접적인 시련과 대격돌(12,1─20,15) → 완결과 최종 현시이다(21,1─22,5). 그런데 요한 묵시록에서는 이러한 도식이 (일곱 인장,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 이른바 ‘칠진법’(七進法)과 환시의 활용으로 더욱 풍부해지고 복잡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암시를 더욱 늘려가고 구약 성경의 많은 본문을 요약하며 교회와 현시대의 신비에 관한 묵상을 펼쳐 갈 수 있게 된다.
자세한 구조를 제시하는 것은 모험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주된 어려움은 연이어지는 환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임박한 재림을 향하여 역사가 다가가는 과정을 다소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종말을 향한 과정의 여러 단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와 교회의 상황과 세상 심판의 다양한 면을 차례로 서술하려는 가상의 틀에 불과한가? 이에 대한 선택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묵시록 전체의 주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묵시 문학의 전통적 관습은 첫째 가설 곧 연대기적 해석을 지지한다. 그러나 특정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여러 환시의 자리를 옮기거나 그것들이 우연히 그 자리에 배치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의 주요 주석 경향에서는, 묵시록의 여러 단락 사이의 병행성과 칠진법(七進法)이 쓰인 단원들 사이의 병행성을 고려할 때에 환시의 연속이 인위적 기교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 작품 전체에 걸쳐 똑같은 확신과 똑같은 메시지가 뚜렷이 나타난다. 다만 그러한 확신과 메시지를 새롭게 적용하거나 설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양한 표상으로 같은 내용을 되풀이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5. 메시지와 의의
모든 예언자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묵시록도 하느님 계획의 현시성과, 그에 따라 우리의 전 존재를 투신해야 하는 절박성을 선포한다. 묵시록의 이러한 선포는 현시대와 그 끝을 초자연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가운데에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일은 이미 종점에 다다랐다. 우리는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릴 뿐이다(1,7; 22,20).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승리를 거두는 중이시고, 그분의 나라는 벌써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시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유일한 주님이 된 분이시다(5,5-14; 11,15-17; 12,10; 19,11-16). 우리는 마지막 때에 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원을 미리 맛보며 또 심판의 전조를 이미 보며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두 부류로 나뉜다.
ㄱ.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분의 승리에 동참한다. 이들이 바로 메시아 시대의 백성의 모습을 실현시키는 하느님의 백성이다(7,9-17; 14,1-5; 15,2-4; 17,14; 19,1-9; 20,4-6).
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 하느님께 적대적인 상태를 견지한다. “땅의 주민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하느님의 권능을 부정한 방식으로 찬탈하려는 사탄의 공범으로, 사탄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사탄과 함께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6,15-17; 9,20-21; 13,7-8.14-17; 14,9-11; 17,8-14; 18,9-19; 19,19-22; 20,7-9).
교회는 그 깊은 차원에서부터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업적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ㄱ. 교회는 선택된 공동체이며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대상이다(1,5ㄴ; 3,9; 7,3-4; 12,6; 19,7-9).
ㄴ.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되었다(1,5ㄴ; 5,9; 7,14; 14,3-4).
ㄷ.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개시하는 주체로, 왕적이며 사제적인 백성이다(1,6; 5,10; 7,15; 20,4-6).
이러한 본질적 관계에서부터 ‘실존적’ 친교가 흘러나온다. 그리하여 교회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운명과 결합된 것으로 간주된다.
ㄱ. 그리스도는 예언자시며 “성실한 증인”(1,5; 3,14; 19,11)이셨다. 교회 역시 증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소명을 지닌다(11,3-6; 12,17; 19,10; 22,9).
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적인 세상의 반대에 부딪혀 수난하시면서까지 증인의 길을 가셨다(1,5; 5,6). 교회도 마찬가지로 시련 속에서 자기 사명을 완수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투쟁을 하기도 하고 순교를 겪기도 한다(6,9; 7,14; 11,7-10; 12,2.4.11; 16,6; 18,24; 20,4).
ㄷ.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한 승리자이시다(1,5.18; 5,5; 12,5; 17,14; 19,11-21). 교회는 이미 이 승리에 동참한다. 교회는 선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고 또 마지막 부활을 미리 맛보며 살아간다(6,11; 7,16-17; 11,11-12; 12,11; 17,14; 20,4-6).
ㄹ.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속에 들어 올려지시어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주권을 행사하신다(1,5.12-16; 19,16). 교회는 이미 사제적인 왕국이다. 교회는 지금부터 전례 중에 천상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제 곧 교회의 승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7,9-12.15; 14,3; 20,4.6).
이렇게 교회는 현세에서 다양한 면을 지닌 그리스도 신비를 따라 살아간다. 곧 교회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라간다(14,4). 이러한 합일성에 여러 가지 도덕적이고 영성적인 자세가 포함된다.
ㄱ.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서 증언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는 충실한 삶이 요구된다(1,3; 2,10.13.26; 3,8; 14,12; 22,7.9).
ㄴ. 교회는 유배살이를 하는 이 땅에서 박해를 받지만, 하느님에게서 보호를 받고 부활의 첫 열매로 힘을 얻는다. 한편으로는 시련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영광의 보증을 받은 이러한 상태에 상응하는 자세는 바로 충실성의 특별한 형태인 항구함이다. 이는 증언의 특별한 형태가 또 순교인 것과 같다(1,9; 2,2.3.10; 3,10-11; 13,10; 14,12).
ㄷ. 교회는 또한 자기의 참고향인 천상 예루살렘의 계시를 향하여 행진하는 탈출의 여정에 있다. 그러면서 자기 주님의 완전한 현현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준비한다. 현재 시련을 겪고 있으면서도 미래의 영광을 내다봄으로써 교회 안에는 희망에 찬 긴장이 형성된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6,10; 10,7; 11,17-18; 12,10-12; 15,3-4; 19,7-9; 20,3-4; 22,17.20).
묵시록의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이 메시지는 단순히, 때와 방식이 불확실한 미래의 어떤 재림을 선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현세에 실망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실을 도피하도록 이끄는 천상 본향에 대한 막연한 향수에 신자들이 젖어들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미래에 언젠가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현실이다. 묵시록에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마지막 심판이 마치 하나의 각본처럼 그려져 있다. 사람들의 행위는 단순히 지금 일어났다가 바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그러한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신비 속에서 이루어진다. 묵시록의 ‘각본’은 바로 이러한 의미로 오늘 이루어지는 것을 하느님의 빛 속에, 영원의 동시성 속에 투영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매 순간 인간은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는지를 드러내고 그에 따라 자기 운명을 만들어 간다. 매 순간 그 믿음의 진실성이 밝혀지고 그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그를 둘러싸고, 또 그 안에서 현세의 우상 숭배와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사이에 양보할 수 없는 대결이 벌어진다. 묵시록에 적힌 “예언의 말씀”(1,3) 곧 하느님의 말씀은 신자들에게 매 순간의 영원한 의미를 잘 헤아리라고 권유한다. 이 말씀은 방심도 경솔도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자기의 전 존재를 직접 투신하도록 유도한다. 묵시록은 인간의 현존을 재림의 전망 속에 배치함으로써, 주 예수님께서 역사의 근원에 계신 것과 같이 역사의 종말에도 계시다는 사실을, 현실이 가시적 차원을 넘어 하느님의 계획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다른 한편, 묵시록은 전례의 상징들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신자 공동체에게 전례를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만남으로, 주님의 파스카 신비에 동화되라는 부르심으로 받아들여 생활화하라고 권유한다. 또한 교회 공동체는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는 표징인데, 전례를 그러한 천상 본향의 현현에 대한 선포와 고대로서 받아들이고 생활화하라고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