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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말 성경 역대기 상·하 두 권에는 ‘나날의 말씀(행적)들’, 곧 ‘나날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책’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책을 ‘하느님의 역사 전체의 연대기’로 부르기를 제안하였다. 이렇게 볼 때, 우리말 이름 “역대기”는 예로니모 성인이 제안한 제목을 간단하게 줄인 것이라 하겠다. 칠십인역에 따라 교회의 전통 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이름은 파랄리포메논(παραλειπομένων)인데, ‘옆에 빼 놓았던 것’, ‘곁들여 전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 책의 내용이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보충으로 여겨진 데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역대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 보충 자료와 더불어 신명기계 전승의 기록과는 다른 역사적, 신학적 전망 안에서, 많은 부분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내용을 옮겨 놓은 것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역대기 상·하권은 본디 에즈라-느헤미야기처럼 하나의 통일된 책이다. 따라서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는 역대기를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나아가 역대기 마지막 몇 구절과(2역대 36,22-23) 에즈라기의 처음 몇 구절은(에즈 1,1-3) 그 본문이 서로 겹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역대기-에즈라기-느헤미야기를 하나로 묶을 수도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히브리 말 경전 안에서 이 책들은 순서가 바뀌었다. 곧 내용으로 보아서는 역대기가 에즈라-느헤미야기보다 앞서야 하는데도, 편집 순서로는 에즈라-느헤미야기보다 나중이다. 이는 아마도 역대기가 에즈라-느헤미야기보다 늦게 유다교 경전 안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역대기의 내용이 사무엘기와 열왕기를 되풀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대 번역본들과 주요 현대 번역본들은 이 책들의 내용에 바탕을 둔 논리적 순서에 따라 역대기를 에즈라-느헤미야기 앞에 둔다. 우리말 성경도 이 순서를 따른다.
1. 역대기의 구조
역대기는 인간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바빌론 유배 이후 기원전 5세기까지 이어지는 대역사를 다룬다. 성경의 역사 문헌 가운데에서 역대기만큼 오랜 기간의 역사를 다룬 책은 없다.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이른바 신명기계 역사 문헌도 가나안 정복부터 바빌론 유배까지를 다룰 뿐이어서, 아담부터 키루스의 해방령까지 이어지는 역대기의 역사 범위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역대기의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1) 1역대 1─9: 아담부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거쳐 다윗에 이르는 조상들의 족보. 그러나 어떤 족보 목록에는 다윗 이후 시대의 인물들도 나온다(3장 참조).
2) 1역대 10─29: 다윗의 통치. 사울의 죽음부터 다윗의 죽음까지 다룬다.
3) 2역대 1─9: 솔로몬의 통치.
4) 2역대 10─36: 솔로몬의 죽음부터, 바빌론 유배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직전에 이르는 유다 왕국의 역사. 유배 이후 유다인들의 귀향과 유다교의 복구에 관한 이야기는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 이어진다.
2. 저자와 저작 시기
보통 역대기 상·하권과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저자, 어느 ‘역대기 사가’ 또는 ‘역대기 편찬자’의 작품으로 본다. 이 책들을 여러 저자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에는 거의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다. 이 책들 여기저기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내용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저자가 수집한 다양한 문헌들을 어떻게 이용하였느냐에 따라 생겨난 결과이다.
역대기 문헌들의 최종 편집 시기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건들로 결정된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은 실제로 기원전 5세기까지, 아마도 기원전 4세기 말까지 계속되다가 끝났을 것이다(에즈라-느헤미야기 ‘입문’ 참조). 따라서 이 문헌들의 편집 시기를 기원전 4세기 중엽, 곧 기원전 350-330년 이전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다.
또한 이 편집 시기를 후기 유다교 시대, 곧 기원전 2세기에 유다인들이 박해를 받고 마카베오 형제들의 지휘 아래 전투를 벌이던 시대까지 끌어내려서도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박해라는 시련의 시대를 맞기 이전,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330-250년 사이에 이 책들이 쓰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어떻든 역대기 저자의 책들 안에는 정확한 편집 시기를 결정할 만한 분명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도의 저작 시기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3. 저작과 편집 방법
역대기 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의 작품이 정확하게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더라도, 그가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편집하고 집필하였는지, 그 작업 방법에 관해서는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구약 성경 가운데에서 역대기는 그 저작 과정과 방법을 스스로 밝혀 준 유일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역대기 저자는 겨레의 옛 역사에 대한 자기 나름의 지식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엮어 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문헌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옮겨적었다. 물론 때때로 목적에 따라 사료의 인용 순서를 정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또 다른 문헌들이나 자신의 역사 개념에 따라 내용을 수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역대기 저자는 자기가 수집한 사료를 인용하면서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자기가 수집한 사료가 비록 불완전하고 때로는 불분명하더라도, 가능한 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였다.
역대기 저자가 역대기를 쓰는 데 이용하였다고 밝힌 사료들은 아래와 같다.
- 유다와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2역대 16,11)
- 이스라엘과 유다 임금들의 실록(2역대 27,7)
- 이스라엘 임금들의 (역사) 실록(1역대 9,1)
-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2역대 33,18)
- 임금들의 실록 주석서(2역대 24,27)
- 다윗 임금의 실록(1역대 27,24)
- 사무엘 선견자의 기록(1역대 29,29), 나탄 예언자의 기록(1역대 29,29), 가드 환시가의 기록(1역대 29,29), 스마야 예언자와 이또 환시가의 기록(2역대 12,15),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기록(2역대 20,34), 환시가들의 기록(2역대 33,19)
-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서(2역대 9,29)
- 이또 환시가의 환시록(2역대 9,29),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의 환시록(2역대 32,32)
- 이또 예언자의 주석서(2역대 13,22)
-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쓴 기록(2역대 26,22)
위의 문헌들 가운데 상당수는 서로 제목만 약간 다를 뿐 같은 문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두고 주석가들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지만, 역대기 저자가 적어도 세 종류의 문헌을 이용하였다고 하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중 먼저, 그가 때로는 이야기 전체를 그대로 옮겨 놓기도 하는 사무엘기와 열왕기를 꼽을 수 있다. 그다음으로, 그가 위 책들의 내용을 보충하려고 이용했을 다른 역사 문헌들(‘왕조 실록 주석’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문헌들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예언 전승을 포함한 문헌들을 꼽을 수 있는데, 역대기 저자는 이 문헌들에 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이 예언 전승들은 사무엘기/열왕기나(사무엘에 관한 전승) 구약의 예언서들(이사야서), 아니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료들에 바탕을 둔 것일 수 있다.
역대기의 핵심 내용을 구성하는 이 모든 자료에, 저자가 그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이용한 다른 자료들도 덧붙여야 한다. 그 자료들은 저자가 익히 알고 있고, 또 자주 참조한 구약 성경 다른 책들의 본문들이다. 역대기의 족보들은 대부분 창세기와 탈출기와 민수기와 여호수아기, 그리고 룻기에 나오는 족보들과 유사한 성격을 띤다. 또한 역대기의 어떤 장들은 시편의 전례 본문을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시편 96; 105; 106편이 역대기 상권에 인용된다).
역대기는 옛 문헌들을 단순히 모아 놓은 기록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의 개인적인 공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어떤 부분은 이 책이 다 완성된 다음에 후대의 자료들이 덧붙여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대기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그 저작 과정과 편집 방법을 자세히 분석해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 이 책의 편집 방법은 무엇인가? 이 작품의 세세한 내용을 살펴보지 않고 사무엘기/열왕기와 역대기를 대충 비교만 해 보아도, 역대기 저자가 책을 집필하면서 따랐던 몇 가지 원칙적인 지침을 알아낼 수 있다. 첫째, 저자는 선택과 생략의 방법을 이용한다. 그는 수집한 사료들에서 자신의 집필 의도에 따라 쓰고 싶은 이야기들만 골라낸다. 저자가 볼 때에 다윗의 통치와 그 왕조에 관한 역사는 하느님 백성과 그 운명에 관한 참된 역사였다. 따라서 왕국의 분열 다음에 이어지는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북 왕국의 역사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유다 왕국과 그 수도 예루살렘에 관한 역사만을 다룬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불리한 사건들이나 사실들도 한쪽에 제쳐 놓았다. 예를 들면 다윗의 간통, 압살롬의 반역, 솔로몬 통치 말년의 사치와 우상 숭배 등은 역대기에서 생략되었다. 이 밖에 바빌론 유배 시절에 관한 역사가 역대기에서 통째로 빠진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역대기에는 바빌론 유배부터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재건까지 한 세기가 넘는 긴 기간을 두고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둘째, 역대기 저자는 수집한 자료들을 다루면서 ‘적용’의 방법을 이용한다. 그는 자료들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을 자신만의 개성과 자기 시대에 비추어 묘사한다. 그것은 그가 정확한 연대에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이끌어 갔던 신학적 견해 때문일 수도 있다.
역대기 저자는 언제나, 임금과 백성에게 재앙이 닥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복은 사람들이 성전과 경신례에 관련된 모든 일에 열성을 가지고 충실하게 행동한 결과로 여겼다. 저자가 왜 때때로 연대의 순서를 바꾸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역사적인 이유보다는 신학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역대기의 저술들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문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객관적이고 완전한 역사를 훨씬 뛰어넘는 ‘역사 신학’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저자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며 부당한 평가이다. 역대기 저자의 작품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단순한 역사가의 작품이 아니라, 신앙인이자 신학자의 작품이다. 그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항구한 위업에 관한 증언을 찾고,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실제적인 하느님 나라의 표상을 본다.
역대기 저자가 사용한 또 다른 집필 방법은 ‘보충’이다. 저자는 주요 사료인 사무엘기와 열왕기에 나오는 자료들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그는 다른 문헌들과 기록, 구전 전승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 역사에 관하여 성경의 다른 책들에는 없는 내용을 상세하게 전한다. 그래서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유익하고 소중한 자료가 된다. 역대기에서 어떤 대목들은 저자의 개인적 반성이나 사물에 대한 저자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수많은 세부 묘사들이 모두 저자의 창조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사료들에서 저자가 발견한 내용일 수도 있다.
한편, 우리는 역대기와 사무엘기/열왕기의 병행 대목들을 비교함으로써 역대기 저자가 자신이 수집한 사료들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역대기에는 신학적 또는 문학적으로 재편집한 요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지만, 병행 대목들에서 나타나는 세부적인 변형들은 십중팔구 우연히 일어났을 것이다. 역대기 저자는 사무엘기/열왕기의 히브리 말 본문을 우리가 사용하는 본문보다는 더 오래된 형태로(이를 ‘원문’이라 부른다.) 알고 있었고, 전승 과정에서 사무엘기/열왕기는 물론 역대기도 저마다 필경사들의 실수를 피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이 책들의 본문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필사 과정의 오류들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다. 동시에 이런 비교 분석을 통하여 역대기 저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자기 사료들을 옮겨 적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사료들을 옮겨 적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때로는 수집된 사료들을 솜씨 있게 삭제, 정리하고 때로는 다른 보충 사료들의 정당한 도움을 받아, 이야기 전체를 조화 있게 엮어 나간다.
한마디로 역대기 저자의 저작 방법은 그의 역사 개념과 신학 사상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4. 역대기 저자의 신학
역대기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역대기 신학 전체를 다 파악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신학적 관점을 가려내서 강조할 수는 있다.
첫째, 역대기 저자는 다윗 왕국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자기 책의 중심에 놓았다. 다윗 시대 이전의 모든 역사는 아담까지 올라가는 족보로 처리하고(1역대 1─9), 그다음, 사울에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10장에만 짧게 언급한다. 사울의 죽음도 다루는 이 10장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왕국을 선호하시어 사울의 왕국을 배척하셨다. 역대기 상권의 나머지는 모두(11─29장) 다윗 왕국의 역사를 다룬다. 이 대목을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병행 대목과 비교해 보면, 적지 않은 차이점들이 발견된다. 역대기에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변덕스러운 통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 사울과의 갈등으로 쫓겨 다니던 몇 해 동안의 유랑 생활과 헤브론에서 유다를 통치하던 칠년 반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빠져 있다. 게다가 다윗 왕실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들, 곧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와 정을 통하고 저지른 좋지 않은 일들,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왕위 계승 분쟁, 압살롬의 반란 등, 2사무 9─23장에 간략하지만 생동감 있는 문체로 소개되는 고대 근동의 궁중 생활을 엿보게 하는 이야기들이 역대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 임금을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인물로 그린다.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임금으로서, 언제나 다윗 왕조의 시조로 남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성도로 만드는 데에, 그리고 성전 건축과 그곳에서 거행될 전례를 세세히 기획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모세 오경의 사제계 전승 안에 그려진 모세의 모습과 역대기에 그려진 다윗의 모습이 닮았다고 주장한다. 사실 두 인물은 비록 그들이 살던 시대는 다를지라도, 둘 다 백성의 수장이요 하느님의 위임을 받은 입법자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솔로몬 임금도 다윗처럼 이상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역대기 저자는 그의 인물 됨됨이를 손상시킬 만한 사건은 하나도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곧 그의 통치 초기에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사건들, 그리고 말년에 궁중을 어지럽혔던 사치와 우상 숭배와 방탕한 생활에 관해서는 역대기에 전혀 언급이 없다. 솔로몬은 부왕 다윗의 지시와 세세한 계획에 따라 성전을 지은 임금이다.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 저자보다 훨씬 더 장엄하고 풍부하게 성전 봉헌을 묘사한다.
성전과 경신례는 역대기 저자의 주요 관심사이다. 그래서 이 책의 첫째 목적이 성도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곳에서 거행되는 경신례의 역사를 정확하게 제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책의 시작에 나오는 족보들을 보면, 유다와 벤야민 지파의 족보가 다른 지파들의 족보보다 더 장황하다.이 두 지파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지역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후계자들의 역사는 성전에 집중되고, 성전의 재건이나 경신례의 개혁에 우선순위를 두는 임금들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아사와(2역대 14─16) 여호사팟(2역대 17─20), 특히 히즈키야와(2역대 29─32) 요시야가(2역대 34─35) 그런 임금들이었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를 보면 유배가 끝난 뒤에도 같은 관심사가 드러난다.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폐허가 된 성전 위에 제단을 다시 세우고(에즈 3) 성전을 다시 지었으며(에즈 4─6), 성도 예루살렘을 재건하고(느헤 1─4) 경신례를 복구하였다(느헤 8─9).
이와 관련하여 역대기 저자는 레위 지파에서 경신례를 주관하는 이들을 특별히 선호한다. 이들은 아론 집안 출신의 사제들이거나, 다른 집안으로서 레위 지파 출신의 레위인들이다. 모세 오경 전체는 사제들에 관하여 27번 언급하는 데 반하여, 에즈라-느헤미야기는 53번, 역대기는 무려 76번이나 언급한다. 레위 1,5와 민수 10,8의 전통을 받아들여, 역대기 저자도 나팔을 부는 임무와(1역대 15,24; 2역대 13,12) 제단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임무는(2역대 30,16) 사제에게 맡겨진 것으로 본다. 레위인들도 단순한 하급 직책이 아니다. 그들은 계약 궤를 옮기는 이들이고, 성전을 지키고 보호하는 문지기들이며, 성가와 악기 연주를 담당하는 이들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사제들을 도와 제사를 준비하기도 한다(2역대 29,34; 30,16-17). 그러나 제사를 거행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역대기가 소개하는 전례 예식들에는 기쁨과 찬미와 감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역대기 저자 자신이 레위인들과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레위인들의 평가 절하된 직능을 재확립하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흥미로운 또 다른 관점은, 역대기 저자가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과 그곳에서 거행되는 경신례의 유일한 합법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그리고 저자 자신의 시대에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서 다른 성소들을 세우고 다른 예식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특별히 사마리아인들 또는 분열을(이 분열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처음 일으킨 사람들에 대한 논쟁의 성격을 띤다. 이와 관련하여 역대기 저자가 솔로몬의 죽음에 이어진 왕국의 분열 다음부터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다. 역대기 저자의 견해로는 다윗 왕조로 유지되는 유다 왕국만이 합법적이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 왕국의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참된 백성을 대표할 수 없는 분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수도 사마리아와 그들의 전례 예식들은 바알 숭배로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일어난 그 땅의 백성과 유다 백성 사이의 갈등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그 땅의 백성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지만, 참하느님 백성인 유배자들의 후손들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에즈 4; 느헤 2,19-20; 4; 6).
이 상이한 신학적 관점들은 ‘신정’(神政)이라는 표현 안에서 적절하게 일종의 종합 개념으로 나아간다. 저자에게 하느님 백성의 역사란 자신이 속해 있는 유다 공동체 안에서 펼쳐지는 신정 왕국의 이상적 표상과 같다. 이 신정 왕국은 하느님께서 세우셨고, 그 머리에는 다윗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하느님만이 참임금이시고 다윗은 그분의 왕좌에 앉아 그분을 대리할 따름이다. 흘러간 역사의 사건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역대기 저자는 하느님의 왕국을 현시대에 맞추어 재현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성도 예루살렘의 유일한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경신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임금님이신 하느님께 충성과 기쁨과 찬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일은 그분의 백성이 매일의 삶 안에서 지켜야 할 첫 번째 의무였다.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지속적인 관계는 철저한 상선벌악의 개념에 바탕을 둔다.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모든 충성, 특히 예루살렘 왕좌에 앉은 임금들의 충성은 당연히 그분의 복을 불러들이는 데 반하여, 모든 잘못과 불순종, 특히 성전이나 전례와 관련된 잘못은 하느님의 징벌을 끌어들인다. 상선벌악의 철저한 적용은 다윗을 계승하는 임금들의 긴 역사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열왕기에는 백성의 행복과 불행에 원인을 제공하는 동기들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도 없는 반면에, 역대기 저자는 하느님의 상선벌악의 논리에 바탕을 둔 정의의 개념에 따라 모든 사건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시하려고 애쓴다. 므나쎄는 온갖 죄악을 저질렀지만 긴 세월 동안 나라를 통치하는 복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우상들을 치우고 성전을 정화하였기 때문이다(2역대 33). 반면에 요시야는 그토록 주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충실하였음에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는데, 이는 그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이집트 군사들이 아시리아를 도와 싸우러 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다(2역대 35).
묵시 문학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리려고 지상의 현실에서 표상을 끌어내어 미래에 투사한다. 이와 반대로 역대기 저자의 작품은 현실 안에서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려고 과거를 이상화한다. 저자는 유다인들에게 다윗 시대의 신정 왕국을 끊임없이 상기시킴으로써, 경신례는 어떻게 거행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율법에는 어떤 자세로 순종해야 하는지, 상선벌악에 바탕을 둔 그분의 정의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알려 준다.
이처럼 역대기 저자의 책들은 과거 지향의 신학 전망을 밝히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그 책들은 곧바로 메시아 희망의 기초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역대기 저자의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저자는 하느님과 그분의 율법과 그분에 대한 경신례에 어떻게 충실해야 하는지, 현재를 위하여 그 지침을 마련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