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시서와 지혜서
입문
구약 성경은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하며 방대하다.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계약의 하느님과 이 백성 사이의 기나긴 대화, 기나긴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 체험기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바로 단일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갖는 의식을 특징으로 전개된다. 이 역사의식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을 이루며, ‘주님’(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이라는 고백 속에 요약된다. 사실 이 계약 공동체 안에서도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양하지만, ‘주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당신을 계시하셨고 이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셨다는 데에는 늘 일치를 보인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모세의 인도로 자신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그를 통하여 계약을 체결하셨으며, 끝내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땅으로 자신들을 이끌어 가셨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경신례를 통하여 현재화시켜 나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처럼 유일하신 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펼쳐진 역사였으며, 이 관계 자체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는 시편을 예외로 한다면, 이처럼 계약에서 비롯되는 역사의식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고, 그러면서도 경전(經典)으로서 구약 성경 46권을 구성하는 데에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소 이질적인 한 부류의 책들이 발견된다. 시서와 지혜서 또는 지혜 문학으로 분류되는 이 책들을 읽다 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 빠져든다. 계약이라는 주제를 벗어나 있으며 그 문학적인 틀 또한 상이하다. 모세 오경과 예언서의 중심 주제들인 이스라엘의 선택, 계약과 율법, 사제와 성전, 예언과 메시아적 희망 등은 거의 관심 밖이다. 더구나 이 책들이 이집트나 바빌론과 같은 고대 근동 지방의 지혜 문학 작품들과 상당한 공통점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책들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에 커다란 기여를 한 솔로몬(1열왕 3,16-28; 5,9-10) 시대에, 당시 활발하던 국제 무역을 틈타 많은 국가들과 문학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바로 이때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의 지혜 문학을 접하게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 지혜 문학의 중심인물이었던 현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율법 그리고 예언자들의 사상과 조화시켜 나갔다. 이들은 고대 근동 지방의 지혜 문학과 그 표현 방법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자신이 모세의 후손임을, 예언자들의 제자임을 결코 잊지 않았던 사람들로서, 세속적 지혜 문학을 종교적 지혜 문학으로, 더 정확하게는 ‘야훼 신앙’의 지혜 문학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간 사람들이다. 이렇게 해서 지혜 문학은 지혜의 원천이신 주 하느님을 찬미하는 문학, 인간들이 하느님에게서 참지혜를 간구하고 슬기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이끌어 주는 탁월한 문학으로 성경 안에 자리하게 된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시편 111,10; 욥 28,28; 잠언 1,7; 2,5; 9,10; 14,2; 15,33; 집회 1,14).
히브리 말 성경은 ‘율법’과 ‘예언서’,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세 번째 문서집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 번째 모음집은 동일한 문학 유형으로 짜여 있지 않으며, 커투빔, 곧 ‘문서들’[聖文書]이라는 제명이 말해 주듯이 특별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또한 다양한 그리스 말 수사본들과 교회의 성경 목록에서 커투빔에 속한 책들의 자리는 늘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어떤 책들은 ‘역사서’(룻기, 역대기,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에스테르기)나 ‘예언서’(애가, 다니엘서)에 배열되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책들은 종종 ‘시서와 지혜서’를 이루는데(욥기, 시편, 잠언, 코헬렛, 아가) 유다교가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지혜서와 집회서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가운데 욥기와 시편과 잠언은 때로 순서를 달리하기는 해도 언제나 함께 묶여 제시된다. 유배 시대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욥기는 부당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고뇌하는 이야기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루어지고 읊어진 150편의 종교적 시가들을 싣고 있는 시편은 찬양, 탄원, 신뢰, 감사, 교훈 시편 등 다양한 문학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으며, 문학과 종교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특히 영적인 측면에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잠언은 여러 시대와 여러 장소에서 유래한 작은 묶음들이 모여 이루어진 작품으로서, 상당 부분 세속적인 색채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담고 있다.
또한 히브리 말 성경에서 룻기, 애가, 에스테르기와 함께 ‘축제 오경’을 이루는 코헬렛과 아가는 유다교 관례에 따라, 코헬렛은 초막절에, 아가는 파스카 축제 때 봉독되었다. 코헬렛은 정통 신앙과 전통적 지혜의 가르침과는 거리를 두고서 냉철한 판단력으로 인생과 세상사를 관찰하고 있으며, 아가는 인간적인 순수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노래하고 있다.
한편 칠십인역을 통해 전해진 지혜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원전 50년경 무명의 어떤 저자가 그리스 말로 직접 쓴 작품으로 여겨진다. 지혜서는 지혜 문학 가운데서도 그 다양한 문체와 주제들로 놀라움을 자아내는데, 특히 의인들의 불사불멸과 지혜의 의인화가 대표적이다. 끝으로 기원전 2세기 초 벤 시라가 히브리 말로 저술하고 기원전 2세기 말 그의 손자가 그리스 말로 번역한 집회서는, 변화된 세상 안에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해서도 유다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유다 전통을 총체적으로 전수하고자 노력하는 작품이다. 집회서 저자는 유다교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이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또 새로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