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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카르야 예언서도 이사야서처럼 한 예언자의 작품으로 간주할 수 없다. 즈카 1─8장이 9─14장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반부와 명백히 구분되는 전반부만 확실히 통일된 하나의 책으로서,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던 때의 하까이와 동시대인인 즈카르야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9─14장은 통상 제2즈카르야라 불리는 훨씬 후대의 저자에게서 비롯된다. 이러한 두 작품의 특성 때문에 이 둘을 따로 살펴보기로 한다.
I. 즈카르야서 1─8장
1. 즈카르야 예언자
이 책의 1─8장에 담겨서 우리에게까지 그 메시지가 전해진 즈카르야 예언자의 활동은, 하까이 예언자의 활동에 거의 곧바로 이어진다. 이 즈카르야의 첫 번째 등장은 기원전 520년 10-11월에(1,1), 곧 하까이가 마지막 신탁을 선포하기 한 달 전에 이루어진다(하까 2,10.20). 그리고 즈카르야 예언자의 활동은 적어도 기원전 518년 11월까지(7,1), 곧 새 성전이 기원전 515년에 봉헌되기 삼 년 전까지 이어진다.
하까이는 종교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한다(하까 1,14). 즈카르야는 동포들의 성실성에 호소함으로써,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을 선포함으로써 하까이가 시작한 운동을 강화한다. 다리우스 황제의 제국을 뒤흔든 정치적 소요가 가져온 상황을 기회로(하까이 예언서 ‘입문’ 참조), 유배자들의 여러 집단이 희망을 가득히 품고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2,10-13; 6,10).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통합을 이루지 못해 생겨나는 어려움으로, 그들은 곧바로 용기를 잃고 만다(5,3-4; 8,16-17). 또 근동 전역이 점점 평온해지면서(1,11) 신속한 변화를 바라던 그들의 희망도 무너지고 만다. 그리하여 실망만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는다.
즈카르야 예언자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 즈카르야라는 인물은 그의 작품 뒤에 숨겨져 있다. 이또의 손자로(1,1; 1,7), 또는 바로 이또의 아들로(에즈 5,1; 6,14) 소개되는 그는, 기원전 500년경까지도 이또 사제 집안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느헤 12,16). 사제로서 그의 특성이 성전의 역할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를 설명해 준다. 또한 즈카르야가 기념 단식의 존폐 여부에 관하여 자문을 청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대답을 전하는 것이나(7,1-3; 8,18-19), 제의적 자문에 응하는 일 역시 사제의 임무에 속한다. 끝으로 거룩한 땅의 정결과 성성에 관한 그의 염려도 그의 사제적 사고방식에 잘 상응한다(2,16; 5,1-4.5-11).
이 사제는 결연히 옛 예언자들의 노선을 따른다. 그들처럼 즈카르야도 회개를 호소하는데(1,3-6; 7,4-14; 8,16-17), 때로는 그들의 표현을 빌려 오기도 한다. 환시의 경우에도 그는 이전의 예언자들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곧 환시의 전반적인 내용은 아모 7장과, 측량줄을 쥔 천사는 에제 40,3-4와,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에제 2,9-10과 연관된다. 즈카르야 예언서의 전통은 그가 전한 메시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이러한 그의 예언적 자질을 여러 차례에 걸쳐 역설한다(2,13.15; 4,9; 6,15). 전해 내려오는 어떤 이야기는 이러한 즈카르야의 매력에 이끌려 결국 그가 순교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마태 23,35). 그러나 이는 요아스 임금에게 살해된,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 사제와 혼동한 데에서 비롯된다(2역대 24,20-22).
2. 즈카르야 예언서
이 예언서는 일인칭으로 작성된 일종의 일지로서, 공동체의 완전한 복구를 미리 서술하는 여덟 개의 ‘환시’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후(事後)에 완성된 이 이야기는 예언자 자신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1,7에서 기원전 519년 2월 중순이라는 정확한 날짜와 함께 도입되는 이 환시 이야기는, 그때가 예언자의 설교에서 중요한 시기이고, 이 예언서 전체가 발전하게 되는 중심임을 드러낸다.
이 환시의 소책자에는 중간중간에 신탁들이 삽입되는데, 그것들은 환시를 당시의 사건과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처럼 2,10-17은 유배자들에게 예루살렘 도성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는데, 이 도성의 새로운 상황이 둘째와 셋째 환시에서 분명하게 설명된다(2,1-9). 3장에서는, 예수아 대사제의 임직식에 관한 환시에 이어서(3,1-7.9ㄱ), 그에게 특별한 약속이 주어진다(3,8.9ㄷ.10). 4,6ㄴ-10ㄴ에는 즈루빠벨 총독을 위한 언질이 나오는데, 이는 새로운 공동체의 우두머리들과 관련된 환시에 삽입된 말씀이다.
이 소책자의 구조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처음 세 환시는(말 탄 기사, 뿔과 대장장이, 측량줄) 메시아적 복구의 준비 단계를 제시한다. 중간의 두 환시는(예수아 대사제, 등잔대와 두 올리브 나무) 새 공동체의 통치와 관련되고, 마지막 세 환시는(두루마리, 뒤주, 병거) 최종적 복구의 조건들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대사제의 착복식에 관한 넷째 환시가 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특별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환시에서는 예수아 대사제에게 더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는 반면, 그다음의 환시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아와 즈루빠벨, 두 사람이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원래의 소책자에는 환시가 일곱뿐이었는데, 나중에 가서 넷째 환시가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변경은 다윗 가문의 제후 즈루빠벨이 사라진 다음에, 사제들이 무엇을 중시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똑같은 변화를 6,9-14에서도 볼 수 있다. 본디는 즈루빠벨이 왕관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예수아 대사제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환시의 소책자는 설교와(1,1-6; 7,4-14) 미래에 관한 약속이(8,1-17.20-23) 그 기본 골격을 이룬다. 이 설교와 약속은 기원전 587년의 대참사를 기념하는 단식의 지속 여부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7,1-3과 8,18-19) 모아진다. 이 설교들과 신탁들에는 8,20-23처럼 상당히 나중의 것들까지도 수집되고 요약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즈카르야의 메시지가 후대의 세대들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3. 즈카르야의 메시지
즈카르야 예언서의 메시지는 이중의 내용을 지닌다.
이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개입하시는 방식에 어떤 변화가 있음을 증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유배 이전의 대예언자들과 직접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또는 친히 개입하시는 환시를 통하여 통교하신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초월적인 분이시며, 동시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손수 전개하고 관장하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즈카르야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일이 벌어지는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처럼 보인다. 예언자가 환시를 보게 해 주실 때에도, 그분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또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는 임무를 띤 존재로 천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은 천사나 기사(騎士) 같은 중개자들을 통하여 실현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세상과 멀리 떨어져 계시다는 것은 분명히 영성화의 노력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또한 더욱 실존적 체험, 곧 하느님의 어떤 부재(不在)의 체험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배의 시련과 귀향 후에도 부딪히는 가난의 어려움으로 ‘하느님께서는 정말 우리의 운명에 관여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제 신앙은 이러한 표면상의 공허를 메워 주고, 천상 세계와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을 가깝게 이어 주는 중개자들을 많이 소개함으로써 그러한 질문에 대답한다. 이 중개자들이, 후대의 묵시 문학에서는 신비로 가득한 상징으로써 하느님을 가리게 되겠지만, 즈카르야서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끈이 된다.
다른 한편, 즈카르야서 역시 전체적으로 희망을 증진시킨다. 물질적 어려움과 실망으로 회의나 체념에 빠지는 공동체에, 예언자는 행동을 이끌어 내는 희망을 불어넣는다. 성전의 재건축과 적법한 경신례의 복구가 바로 구원을 바라는 구체적 방식이라는 것이다.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려면 그러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다른 민족들도 이러한 새 시대에 동참할 것이다(2,15; 8,20-23). 즈카르야는 이 구원이 벌써 문밖까지 와 있다고 말한다. 즈루빠벨이 이 구원의 시대를 열어 갈 인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의 상징적 대관식이(6,9-14) 그러한 사실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그러나 제2의 인물 곧 대사제가 즈루빠벨과 조화를 이루는데, 이 둘은 대등한 입장에서 공동 작업을 펼쳐 나간다(4,14; 6,13). 이로써 사제와 제후가 분담하는 이원 체제의 통치에 관한 기대가 일어난다(이러한 생각은 중세의 신학에서 국가 권력과 교회 권한의 분리 원칙을 정당화시키는 데에 쓰이기도 한다). 즈루빠벨이 사라진 뒤에 이 기대는 변화하여 메시아의 역할이 사제에게 집중된다. 넷째 환시(3,1-7), 그리고 예수아와 “예표가 되는 사람들”인 그의 동료들에게 내린 특별한 약속이(3,8-10) 그러한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희망은 다시 새로운 형태로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유배 이후의 본문인 예레 33,14-26), 그리고 나중에는 외경과 쿰란의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또 히브리서는 이 희망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히브 3).
II. 즈카르야서 9─14장(제2즈카르야서)
1. 제2즈카르야서
즈카르야서의 이 둘째 부분은 첫째 부분과 동일한 저자의 작품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특징들을 드러낸다.
우선 역사적 상황이 바뀌었다. 공동체와 예루살렘과 성전의 복구는 더 이상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성전의 재건축과 즈루빠벨이라는 인물과 결부된 메시아 희망은, 가난한 임금-메시아(9,9-10), 배척당하는 착한 목자(11,4-14), ‘찔려 죽은 신비로운 존재’(12,1─13,1) 등,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들의 등장으로 사라진다. 첫째 부분에서는 분명하게 거명된 사람들이 둘째 부분에서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되는 포로들은(9,11-12; 10,8-11), 이제 기원전 587년에 끌려간 사람들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사는 이들을 일컫는다.
문학적인 면에서도 두 부분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 환시들, 그리고 즈루빠벨이나 예수아, 또는 백성 전체에게 하는 짧은 메시아적 신탁들은, 더욱 폭넓게 확장되고 독특한 서사시적 영감을 받은 말씀들로 대체된다. 첫째 부분에서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가 둘째 부분에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해석하는 천사도 마찬가지다. 첫째 부분에 나오는 어떤 개념과 특징적 표현들이 둘째 부분에서는 더 이상 쓰이지 않거나, 쓰이더라도 아주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둘째 부분의 개념이나 표현들도 대부분이 첫째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들이다. 이 밖에도 제2부는 “신탁”이라는 머리글로 시작된다(9,1). 12,1과 말라키서의 첫머리에서도 되풀이되는 이 머리글은, 열두 소예언서 마지막 부분의 특별한 유래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2. 9─14장의 문학적 수수께끼
현재의 9─14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단편들의 복합적 배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이 서로 독립된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한데 모아진 것일 따름이며, 그것들을 서로 묶어 주는 것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즈카르야서의 이 제2부에서 복잡하지만 균형이 잘 잡힌 구조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9─11장의 시는 공통된 특징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역사와 관련된 시사, 그리고 유다 공동체와 다른 민족들 사이의 관계가 특정한 성경 저자 또는 일정 집단의 관심사를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산문으로 편집되어 있으면서 공동체의 내적 변형을 위하여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뒤의 나머지 장들은, 다른 데에서 기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끝으로 마지막 편집자가, 어떤 것들은 유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9,9-10; 10,1-2; 11,1-3) 이 모든 단편을 활용하여 상당히 일관된 통일체를 구성하였을 것이다.
이 소책자의 저작 시기와 관련하여 제기된 가설들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곧 위로는 기원전 7-6세기 유배 이전 시대부터, 아래로는 기원전 2세기까지 제시된다. 기원전 2세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대사제 오니아스 3세(2마카 4,34) 또는 대사제 시몬의 죽음이(1마카 16,11-17), ‘찔려 죽은 이’라는 독특한 인물상을 떠올리게 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할 때에 이 소책자의 저작 시기를, 그리스 시대가 시작하는 기원전 330년과 기원전 300년 사이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기원전 332년 지중해 연안을 따라 전개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그리고 티로의 파괴가 9,1-8에서 비교적 정확히 서술된다. 9,11-12와 10,8-11에서 언급되는 포로들은 상징적으로 아시리아와 이집트라고 불리는 여러 지방에 갇혀 사는, 유다인들의 모든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을 말한다. 이 밖에도 기원전 312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다음, 유다인 포로들의 무리가 이집트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9,13에서 그리스를 하느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세력으로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제2즈카르야서의 저자는 이전의 대예언서들을 매우 독창적으로, 그리고 아주 능란한 솜씨로 이용한다. 이러한 기법은 이 예언서의 저작 시기를 기원전 587년의 유배에서 상당히 떨어진 시대로 잡게 한다.
9─14장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승리에 이어지는 종교적, 정신적 동요를 명백히 드러낸다. 이러한 동요는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산헤립이 침입하였을 때에 이미 있었고, 그다음으로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 종교적으로 각성하던 때에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동요나 불안은 마카베오 시대의 대박해 뒤에 일어나기도 한다.
3. 구조
현재 상태의 이 소책자는 구원 사업이 이중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두 부분이 대칭을 이루면서 구성되어 있다. 곧 백성이 실패의 늪으로 빠져드는 추락,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는 완전한 쇄신이다.
첫째 부분: 9,1─11,17
마치 승전보의 문구처럼 예언자는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예고한다. 정복당한 이웃 민족들은 정화된 다음에 신앙인들의 공동체에 통합된다(9,1-8). 곧바로 이어서 겸손한 모습으로 이상적 통치를 시작할 임금-메시아가 나타난다(9,9-10). 그리고 큰 전투들이 벌어지는데, 그 덕분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하느님 백성의 재결집이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전통적 국경들이 허물어진다(9,11-17과 10,3─11,3).
이 두 단락 사이에 자리 잡은 중간 구절인 10,1-2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 혼자 하시는 일로서, 그분 외에 다른 것이나 다른 존재에 의지하는 것은 헛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준비 작업이 이루어진 다음, 이번에는 목자로 소개되는 메시아가, “호의”와 “일치”라는 목자의 두 지팡이로 상징되는 자기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일에 착수한다. 그러나 우두머리들과 양 떼의 종교적 타락은, 결국 이 메시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배척받은 이 착한 목자는 쓸모없는 목자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그 목자는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양 떼를 돌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잡아먹기까지 한다(11,4-17).
둘째 부분: 12,1─14,21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찔려 죽은 이’의 희생이 복구를 가져온다. 외적에게서 구원된 백성이 새 영을 받는 것이다(12,1─13,1). 그리고 정화가 이어지고 계약의 갱신이 이루어진다(13,2-9).
이제 구원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모든 민족은 주님의 왕권을 고백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과 결합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14장은 후대의 작품일 수 있지만 즈카르야서 제2부 전체의 훌륭한 결론 역할을 한다.
4. 제2즈카르야서의 메시지
이 소책자의 전체 내용은 ‘메시아 도래의 서술’이라는 말로 종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메시아사상을 서로 보완하는 두 개의 개념이 책 전체에, 또 각 부분에 나란히 배열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1) 메시아 없는 메시아사상
9,1-8; 9,11-17; 10,3─11,3; 14,1-21에서 소개되는 메시아적 이상은, 이사야의 묵시록과 가깝다(이사 24─27). 구원의 모든 업적은 주님께서 손수 이루신다. 그분께서는 적들을 진압하시고 당신의 온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신다. 이러한 조건이 채워져 나갈 때, 이민족들도 이 공동체에 온전히 통합되기를 희망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이 이방인들은 유다의 씨족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들도 율법의 모든 요구 사항에 복종해야 한다. 이 요구 사항은 구체적으로 제의적 규정과(9,7) 예배 실천 규정으로(14,16-19) 표현된다. 이는 한편으로 관대한 조치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제한을 담고 있다. 곧 이민족들의 합류는 유다 공동체에 흡수되고 편입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 여러 모습을 지닌 메시아
하느님께서 혼자 이루시는 이 업적이 다른 단락들에서는 특별한 인물의 업적과 겹쳐진다. 이 인물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셋 가운데 어떤 것도 다른 두 모습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ㄱ. 임금-메시아: 9,9-10. 이와 관련된 용어들의 일부가 이 ‘임금-메시아’를 그 원형인 다윗이나 솔로몬과 연관 짓지만, 다른 것들은 ‘가난한 이와 의인’이라는 예언자적 이상과 연결된다. 이는 바로 ‘주님의 가난한 이들’의 종교적 이상으로 표현되는 메시아이다(시편 22,27; 69,33-34; 이사 49,13; 57,15; 61,1-2; 66,2; 스바 2,3; 3,11-13).
ㄴ. 착한 목자: 11,4-17과 13,7-9. 임금-메시아보다는 분명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메시아는, 왕정 사상과 덜 밀접하게 관련되는 대신에, 에제 34,11-22.31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주님 자신이신 목자의 표상에는 더욱 확실하게 연관된다. 사실 제2즈카르야서에 나오는 은유에서는, 예언자가 표현해 내는 목자가 여러 번에 걸쳐 어떠한 중간 과정도 없이 곧바로 주님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 ‘착한 목자’는, 배척을 당하고 팔아넘겨져 제거되며 또 그의 희생이(13,7) 계약의 복구에 이바지함으로써(13,9), 이미 ‘찔려 죽은 이’의 모습을 향하기도 한다.
ㄷ. 찔려 죽은 이: 12,9-14. 메시아의 이 모습은, 전혀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사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이어받는다. 이 주님의 종처럼, 이 메시아의 희생 역시 마음의 변화와(12,10) 정화의(13,1) 근원이 된다. 옛 임금과의 연결은 은근하게만 이루어진다. 이 연결은 다윗과 그 혈통을 되풀이하여 상기시키는 사실로써만 나타난다(12,7-8.10.12; 13,1). 메시아의 영광은 약탈당함과 패배로 대체된다. 그러나 이것들이 바로 구원의 원천이 된다.
제2즈카르야의 이렇게 심도 있는 메시아사상은 후대의 사고에 풍성한 양분을 제공한다. 이러한 연유로, 복음서 저자들 역시 특별히 수난하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역할을 제시하는 데에, 그토록 폭넓게 이 예언자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마태 21,4-5와 요한 12,15; 마태 26,31과 마르 14,27; 마태 27,9-10; 요한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