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예레미야서
2장
첫사랑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1)”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2)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3) 주님의 말씀이다.
생수의 원천을 저버리다4)
야곱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족속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조상들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찾아냈기에 나에게서 멀어져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그들 자신도 헛것이 되었더란 말이냐?5)
그들은 이렇게 묻지 않았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올라오신 분,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분께서는 어디 계신가? 사막과 구렁의 땅에서 가뭄과 암흑의 땅에서 어떤 인간도 지나다니지 않고 어떤 사람도 살지 않는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께서는 어디 계신가?’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6) 목자들도7)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8)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다시 너희를 고소하고 너희 자손의 자손들도9) 고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키팀의10) 해변에 건너가 살펴보아라. 케다르에11) 사람을 보내어 자세히 조사해 보아라.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아라.
도대체 어떤 민족이 제 신들을 바꾼 적이 있더냐?12) 비록 그것들이 신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내 백성은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과 제 영광을 바꾸었다.13)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고통과 쓰라림
이스라엘이 종이더냐? 그가 씨종이더냐?14) 그런데 어찌하여 그가 약탈 대상이 되었단 말이냐?
힘센 사자들이 그에게 으르렁거리고 소리를 질러 댔다.15) 그들이 그의 땅을 폐허로 만드니 그의 성읍들은 주민들이 없는 빈터가 되었다.
게다가 멤피스와 타흐판헤스16) 사람들이 네 머리통을 부수었다.17)
이는 주 너의 하느님이 길을 따라 너를 이끌 때 네가 그를 저버려 스스로 만든 결과가 아니더냐?
그런데도 네가 나일강19) 물을 마시러 이집트로 내려가다니 웬 말이냐? 유프라테스강20) 물을 마시러 아시리아로 올라가다니 웬 말이냐?21)
네 악행이 너를 벌하고 네 배반이 너를 징계할 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 얼마나 나쁘고 쓰라린지 보고 깨달아라. 나에 대한 두려움이 너에게 없구나.22) 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고발당한 자의 변론에 대한 반박23)
나는 오래전에 네 멍에를 부러뜨리고 그 줄을 끊었다.24) 그런데도 너는 “더 이상 섬기지 않겠다!” 하고는 온갖 높은 언덕 위에서 온갖 푸른 나무 밑에서 드러누워 불륜을 저질렀다.25)
나는 좋은 포도나무로,26) 옹골찬 씨앗으로 너를 심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낯선 들포도나무로 변해 버렸느냐?
네가 비록 잿물로 네 몸을 씻고 비누를 아무리 많이 쓴다 해도 죄악의 얼룩은 그대로 내 앞에 남아 있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네가 어찌 부정하지 않다고, 바알들을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골짜기에서27) 걸었던 네 길을 살펴보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아라. 너는 가는 길 종잡을 수 없는28) 경박한 암낙타로구나.
광야에 익숙한 들나귀가 몸이 달아 암내를 풍기며 헐떡이니 누가 그 발정을 막겠느냐? 수컷들은 다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발정한 암컷을 쉬이 발견하리라.29)
너는 맨발이 되지 않도록 네 발을 보살피고 목마르지 않도록 네 목을 보살펴라. 그러나 너는 “안 돼요. 어쩔 수 없네요. 낯선 이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니30) 그네들을 따라다니겠어요.” 하고 말하였다.
도둑이 붙잡혀 수치를 당하듯31) 이스라엘 집안이 수치를 당하리라. 그들과 그 임금들과 제후들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수치를 당하리라.
그들은 나무에 대고 “당신께서 제 아버지이십니다.” 돌에 대고 “당신께서 저를 낳으셨습니다.” 하고 말한다.32) 그들은 정말 나에게 등을 돌리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재앙이 닥칠 때 그들은 “일어나시어 저희를 구해 주소서.” 하고 부르짖는다.
네가 스스로 만든 신들은 어디 있느냐? 너에게 재앙이 닥칠 때 그들이 너를 구할 수 있다면 일어나 보라지. 유다야, 너의 신들이 네 성읍의 수만큼이나 많지 않으냐?33)
그런데도 어찌하여 너희는 나에게 따지려 드느냐? 너희 모두 나에게 반역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34)
비난
내가 쓸데없이 너희 자녀들을 때렸구나. 그들은35)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희36) 칼이 예언자들을 삼키는데 약탈하는 사자 같았다.
이 세대 사람들아 너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37)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단 말이냐? 아니면 암흑의 땅이 되었단 말이냐? 어찌하여 내 백성이, “우리가 자유로워졌으니 이제 더 이상 당신께 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는가?
처녀가 노리개를 잊을 수 있으며 새색시가 각시 띠를38) 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내 백성은 셀 수도 없이 허구한 날 나를 잊었다.
너는 사랑을 찾아 제 갈 길을 어찌 그리 잘도 걷는가? 그리하여 너는 탕녀들에게조차 네 길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네 치맛자락에까지 죄 없는 가난한 이들의 피가 묻어 있구나.39) 그들이 집을 뚫고 들어오다가 너에게 들킨 것도 아닌데.40) 정말 이런 짓을 다 저지르고도41)
너는 말한다. “죄가 없으니 그분의 진노가 나에게서 분명 돌아설 수밖에.” 그러나 이제 “죄지은 적이 없다.”는42) 너의 말 때문에 나는 너를 심판하리라.
어찌 그다지도 지조 없게43) 네 길을 바꾸느냐? 네가 아시리아에게 수치를 당한 것처럼 이집트에게도 수치를 당하리라.44)
그곳에서도 너희는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나오리니45) 네가 믿었던 자들을 주님께서 배척하시어 그들로 말미암아 네가 번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호세 2,16-22에서처럼 예레미야는 광야 시절을 하느님의 놀라우신 위업들이 이루어진 때로 여기며,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자행한 반역을(시편 78,40; 95,10; 106,14; 에제 20,13) 문제 삼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오직 이 “씨 뿌리지 못하는”(직역: “씨 뿌려지지 않은”) 땅에서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백성의 충실성만을 생각하고 있다. 이 메마른 광야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더욱 힘차게 드러났고, 경신례는 겉치레가 없었으며(7,22; 아모 5,25 참조), 신앙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한 불충과는(20-28절) 대조적으로 매우 순수하였다. 레캅인들은 정착 자체를 거부하였다(35장).
직역: “이스라엘은 주님을 위해 거룩한 것”(23,9; 25,30; 31,23.40; 탈출 28,36 참조). 거룩한 사람이나 사물은 주님만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36,26; 시편 105,15 참조).
주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당신 백성을 저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창세 12,3; 민수 22─24).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곤경에서 보호하시고(창세 35,5; 지혜 10,11-12), 그들에게 손을 대는 자나(10,25; 창세 12,17; 20,3.7; 시편 105,14) 당신 친히 잠시 맡기신 사명을 남용하는 자는 누구든지 벌하신다(이사 10,5-19; 47,6-8; 즈카 1,15). 즈카 11,10 각주 참조.
이 신탁은(4-13절) 헛된 희망 때문에(18절) 자신의 모든 것이고(2-3절) “생수의 원천”이신 하느님을(13절) 저버린 죄 많은 신부, 곧 이스라엘에 대한 고소 내용을 담고 있다. 주님께서는 “허물”은 당신이 아니라(5절) 그들에게 있다고(6-8절) 항변하시며 입을 여신다. 그분께서는 변론을 펼치시며(9절) 비교를 통하여, 이스라엘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논거를 나열해 나가신다(10-13절).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다음 신탁)은 결국 “배반”에 대한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17절과 19절). 이스라엘은 분명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18절).
헛된 우상을 좇다 보면 그 우상이 숭배자를 헛된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시편 115,8; 135,18; 호세 9,10; 2코린 3,18).
미카에(미카 3,11) 이어 예레미야는 이 구절에서 계약의 백성을 이끄는 주요 지도자들의 배반을 고발하는데, 먼저 사제들의 배반이 문제이다. 사제들의 첫 번째 임무는 계약 조항들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하느님의 토라, 곧 “율법”을 전하는 일이었다(18,18; 레위 10,11; 민수 27,21; 신명 31,9-13; 33,10; 집회 45,17.26; 에제 7,26; 호세 4,6; 말라 2,7. 그리고 이사 2,3; 8,16 각주 참조). 이스라엘의 사제직에 대해서는 레위기 ‘입문’ 참조.
미카 3,11의 “우두머리들”에 해당하는 “목자들”은 나중에 유다 왕실에 대한 기록에서(21,1─23,8) 본격적으로 비난받게 될 임금들을 말한다.
가장 큰 배반은 다른 본문들에서(5,13.31; 6,13; 8,10; 14,13-15; 27,9.14-18; 28; 29,8-9.15; 37,9), 특히 예언자들을 거스른 신탁에서(23,9-40) 고발되고 있듯이 예언자들이 저지른 배신이다. 23,13의(1열왕 18 참조) 내용과 같이 살펴보면, 예레미야는 여기서 동시대 유다의 예언자들만이 아니라 북 왕국의 예언자들도 겨냥하는 것으로 보인다. 18,18에서는 “사제”와 “예언자”와 나란히 “현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현인들은 공동체의 신념과 체험에 바탕을 둔 가르침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서술하고 전하는 재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도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지니고, 백성들이 표류하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잠언 29,18).
어떤 히브리 말 수사본들과 대중 라틴 말 성경에는 단순히 “너희 자손들”이라고 되어 있다.
키팀은 키프로스섬 주민들뿐만 아니라, 지중해 동쪽 지역의 주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민수 24,24 각주와 이사 23,1 각주 참조).
케다르는 북쪽 아라비아의 한 부족이며(이사 21,16 참조), 49,28에서 다시 한번 언급된다.
당시의 종교는 국가 제도로서 백성의 삶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으므로, 섬기던 신들을 바꾼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꺼이 여러 신들을 모시는 국가의 만신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구약 성경에서 나아만은 이방인으로서 ‘참된 신’에게 개종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는데, 주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그는 가상으로나마 조국을 버려야만 하였다(2열왕 5,17 참조).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존귀한 존재이시며, 당신 인격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생명의 원천’(13절 참조)을 상으로 주시는 분이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듯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 ‘영광’(욥 19,9; 29,1-20: 시편 8,6)과 당신 ‘마음’을 주신다. 히브리 말에서 ‘마음’(간장)을 뜻하는 낱말은 ‘영광’을 뜻하는 낱말과 꼴이 매우 비슷하여 자주 혼동된다(애가 2,11 각주와 시편 7,6; 16,9; 30,13; 108,2 참조). 이민족들은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신들을 변함없이 섬기는데, 이스라엘은 그들의 영광인 하느님을 배반하였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당신 백성의 영광이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2코린 3,18; 콜로 1,11; 1베드 4,14 참조.
“씨종”을 직역하면 “집에서 태어난 종”이다(창세 14,14; 17,12-13.23.27; 레위 22,11 참조). 이 종은 돈을 주고 사들인 종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종의 신분을 지니는 종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다루어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이 사자들은 젊고 혈기 왕성한 사자를 말한다. 사자의 포효 소리에(12,8) 대해서는 이사 5,29 각주 참조.
히브리 말 본문에는 멤피스 대신 노프로 되어 있으나, 이는 멤피스로 더 잘 알려져 있어 흔히 멤피스로 옮긴다(에제 30,13.16; 호세 9,6). 이 도시는 나일강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왕국의 수도였다. 이집트라는 이름 자체도 멤피스의 또 다른 이름인 히쿱타(‘프타 영혼의 집’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구약 성경 시대와 후대의 그리스 시대에도 멤피스는 이집트의 가장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카이로 남쪽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소로 남아 있을 뿐이다. 타흐판헤스(43,7.9; 44,1; 에제 30,18)는 그리스 시대에 다프네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오늘날의 포트사이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35킬로미터쯤 떨어진 타니스와 펠루세 사이의 멘잘레 호숫가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46,14 각주와 이사 19,13 각주 참조.
“네 머리를 깎았다.”로 옮기기도 한다. 48,45 각주와 6,3; 시편 80,14 참조.
이 구절은 13절과 매우 잘 연결되므로, 그 사이에 위치한 14-17절은 하나의 삽입구로 여겨진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관계에서도 이 구절은 16절이 말하는 관계와(기원전 609년 느코 2세의 출정에서 비롯된 관계인 듯하다.) 다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
히브리 말 본문에는 나일 대신 ‘검정’이라는 뜻의 시호르로 되어 있다. 시호르는 타흐판헤스에 인접한 멘잘레 호수로 흘러드는 나일강 동쪽 지류의 이집트 이름으로 여겨진다(이사 23,3 참조). 여기서 예레미야서 저자가 “나일강”을 “시호르강”으로 대체시킨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중요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 이 강을 경멸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 말 본문에서 이 강은 그저 “강”으로만 되어 있으나, 문맥으로 보아 “유프라테스 강”이 틀림없다. 유프라테스 강은(창세 31,21; 탈출 23,31 등) 다른 곳에서 “큰 강”(창세 15,18; 신명 1,7; 여호 1,4)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시리아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고(이사 7,20 참조), 큰 도시들이(니네베, 켈라, 아시리아) 저 멀리 또 다른 큰 강, 티그리스강까지(다니 10,4) 줄지어 서 있었다.
남서쪽과 북동쪽의 두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어느 쪽에 기댈 것인가 저울질하고 있던 약소국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자들은 주님께만 의지하라고 설교한다(13절; 에제 29,16과 각주. 그리고 호세 5,13; 7,11; 8,9; 12,2; 14,4와 각주들 참조). 예레미야보다 한 세기 앞선 이사야는(이사 30,1 각주) 히즈키야가 결국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이집트와의 동맹을 지속적으로 반대했으며(이사 20,2 각주; 28,2), 예레미야 시대에 즈음해서는 나훔 예언자가 아시리아 제국의 쇠퇴를 선포하였다(나훔 1,9─2,3 참조). 예레미야 시대에 와서도 주변 정세의 변화는 있었지만 강대국 사이에서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북쪽에서는 바빌론이 니네베에게서 패권을 이어받으려 하고 있었으며, 남쪽 이집트에서는 누비아 왕조를 몰락시킨 기원전 663년의 대란 이후에, 제26대 왕조인 사이스 왕조에게서 재건이 시작되었다. 사이스 왕조가 이집트를 아시리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으므로, 한동안 유다의 모든 희망이 이 왕조를 통해서 굳어지는 듯하였다(37절).
이 구절은 지혜의 근본인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었음을 뜻한다(신명 4,6; 욥 28,28; 잠언 1,7; 9,20; 집회 1,16 참조). 주님께서는 언젠가 당신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계약의 삶을 지향하는 ‘귀환 공동체’를 세우실 것이다(32,40).
이 신탁에는 계약의 백성이 저지른 믿기 어려운 방종을 드러내는 표상들이 때로는 걸러지지 않은 채 풍부하게 나타나는데, 독자들은 이를 통하여 예언자가 오랫동안 참아 왔던 감정들을 폭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호세 1,2 참조). 다시 말해서 격한 감정이 표상들의 논리적인 일관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호세 1,2 각주). 또한 이 신탁에는 이 장의 첫 부분에 나왔던 소송 변론이(4절 앞 소제목 각주) 다시 등장하는데(28절. 그리고 26절 참조), 이 변론은 이후에도 가끔씩 되풀이된다(예를 들어 35절; 5,1-9).
칠십인역에는 주어가 단수 2인칭으로, 곧 “너는 오래전에 멍에를 부러뜨리고 그 줄을 끊었다.”로 되어 있다. “오래전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2절 각주 참조), 또는 이보다 앞서서 ‘이집트 탈출부터’(에제 20; 23; 사도 7,51)를 뜻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타락에 대하여(예를 들어 6,27-30; 8,4-7; 13,23), 곧 그 어떤 구속도 견디어 내지 못하고, 그 어떤 속박이든 이를 제멋대로 족쇄라고 판단하고서 울분을 참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하여 자주 언급한다. 우리는 여기서 호세아가 피력한 혼인에 대한 상징들, 이스라엘을 ‘고집만 부리는 부정한’ 여인에 비유한 표현들을 다시금 떠올린다(호세아서 ‘입문’ 참조). 다음 각주 참조.
다른 민족들처럼 이스라엘도 주님에 대한 경신례에, 자신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땅의 신이며 이 땅을 비옥하게 한다고 믿었던 바알 신 숭배를 결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11절 각주 참조). 사람들은 비옥함을 연상케 하는 장소에서(“푸른 나무” 숲: 3,6.13; 신명 12,2와 각주; 1열왕 14,23; 2열왕 16,4; 17,10; 이사 1,29와 각주; 57,5; 에제 6,13; 호세 4,13. 그리고 1열왕 3,2 각주 참조) 바알 신들에게 예배를 바쳤는데, 예언자들은 그 방탕한 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호세 2,15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경신례에 잡신들을 위한 예배가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나훔 1,2 각주; 야고 4,4-8 참조). 주님의 백성은 땅의 비옥함과 관련해서도 오로지 그분에게만 의탁해야 한다(호세아서 ‘입문’과 14,9 각주. 그리고 예레 3,3; 11,16 참조). 모든 우상 숭배, 특히 주님께서 그 이름이 불리는 것조차 원치 않으시는 혐오스러운 바알 신에 대한 숭배는(호세 2,19) ‘남편’에 대한 불충을 드러내는 행위이며(2절; 이사 54,5; 호세 2,18) 흔히 “불륜”으로 표현되는 간음 행위이다(3,1-4; 5,7; 13,27 등; 이사 57,3; 에제 16; 23; 호세 2,7; 4,10. 그리고 마태 12,39; 16,4; 마르 8,38; 요한 8,41; 야고 4,4 참조).
“포도나무”의 직역: “붉은(색으로 도금한) 은” 또는 “소렉”. 이것은 아마도 소렉 골짜기에서(판관 16,4) 생산된 나무를 암시하는 것 같다. 창세 49,11; 이사 5,2; 16,8 참조. 계약의 백성을 상징하는 포도나무에 대해서는 이사 5,1 각주 참조.
이 “골짜기”는 아마도 예루살렘을 서쪽과 남쪽에서 둘러싸고 있으며 “계곡 문”(느헤 2,13.15; 3,13 각주; 2역대 26,9)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는 “벤 힌놈 골짜기”(7,31-32; 19,6; 32,25. 그리고 여호 15,8 각주 참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벌어졌던 역겨운 종교 의식에 대해서는 2열왕 23,10 각주 참조. 이 골짜기는 결국 저주받은 장소의 상징이 되고 만다(마태 5,22 각주 참조).
절개 없고 변덕스러우며(20절 각주 참조) 불안정한 모습을 뜻한다.
발정한 암컷은 자진해서 수컷에게로 오므로 수컷이 암컷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거나, 또는 암컷이 임신 기간의 마지막 달에 이르러서는 발정했을 때처럼 저항하지 않으므로 그 암컷을 쉽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낯선 이들”은 우선 30,8; 51,51; 이사 1,7 등에서처럼 낯선 남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3,13; 5,19에서처럼(시편 44,21; 81,10 참조) 이민족의 신들을 뜻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행위는 언제나 자신의 남편에게(2절) 신실하지 못한 행위, 그러기에 끊임없이 고발되는 행위이다(20절 각주. 그리고 에제 16,32 참조). 이 “낯선 이들”은 너무도 유혹적이어서(에제 23), 이스라엘은 그들의 자태에 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직역: “붙잡혔을 때 도둑의 창피처럼.”
이는 산당에서 거행되던 우상 숭배를 색다르게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1열왕 3,2 각주 참조). 산당에는 잡신을 상징하던 석상과 목상이 서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단호히 배척하신다(신명 7,5; 16,21-22). 숭배자들에 대한 잡신들의 무기력한 부성(父性)에 대해서는 민수 21,29; 말라 2,11 참조.
칠십인역은 이 구절 뒤에 “바알에게 바쳐진 제사는 예루살렘의 골목만큼이나 많다.”(11,13; 호세 8,11 참조)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요시야는 경신례 장소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격렬하게 배척하였는데, 이는 다신교에 빠질 위험을 늘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신명 12,5 각주 참조).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인에도(35절), 그들이 정녕 당신을 저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현실에서든 그들의 의식 속에서든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될 경우 더 이상 참지 않으신다.
칠십인역은 “너희들”로 되어 있다.
칠십인역과 시리아 말 역본에는 “너희”가 없다.
“이 세대 사람들아”라는 호칭은 언제나 새롭게 ‘들어야’ 하는 “주님의 말씀”의 영속적인 현재성을 주지시키려고 후대의 편집자가 덧붙인 표현으로 보인다. “들어라”는 직역하면 “보아라”이다.
이는 이사 3,18-23에 열거된 목록에 따르면 여인들의 장신구 가운데 하나인 “가슴 띠”를 가리킨다(이사 3,20 각주 참조).
칠십인역에는 “네 치맛자락에까지” 대신에 “네 손에까지”로 되어 있다. 이것은 공공연하게 저질러진 죄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은밀히 저질러진 죄일 수도 있다.
“집을 뚫고 들어온” 도둑을 죽인 자는 죄가 없으나(탈출 22,1), “죄 없는 가난한 이들”은 그런 도둑이 아니므로 이스라엘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직역하면 “이 모든 것에 덧붙여”인데, 뜻이 분명하지 않다.
죄와 관련하여 통상적으로 쓰이던 표현이다.
“어찌 그다지도 갈피를 못 잡아”로 옮길 수도 있다.
18절 각주 참조. 그러나 36절은 아시리아 제국이 사라지고 난 다음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슬픔의 표시로서, 끌려 나오는 포로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