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요한 복음서

6장

오천 명을 먹이시다1)(마태 14,13-21; 마르 6,30-44; 루카 9,10-17)

1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2)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3)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4)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5)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6)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7)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8)

물 위를 걸으시다(마태 14,22-33; 마르 6,45-52)

16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9)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10)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11)

생명의 빵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12)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13)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14)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15)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16)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17) 믿게 하시겠습니까?18)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19)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20)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21)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22)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23) 나를 믿지 않는다.24)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25)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26)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27)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28)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29)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30) 아버지를 보았다.31)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32)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3)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34)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35)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37)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38)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39)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40)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41)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42)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43)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44)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45)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46)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47)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48)

69

스승님께서49)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50)

7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51)

71

이는 시몬 이스카리옷의52) 아들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사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머지않아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였다.

주석
1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한 기적 이야기는 여기에서도 공관 복음서에서처럼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마태 14,13-21; 15,32-38; 마르 6,35-44; 8,1-9; 루카 9,10-17. 그리고 2열왕 4,42-44 참조).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활동의 정점이자 종결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부하느냐는 결정적 선택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2

그리스 말 본문에는 “호수” 대신에 “바다”로 되어 있다. “바다”는 셈족 말식 표현으로 호수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직접 “호수”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루카와는 달리, 요한도 마태오와 마르코처럼 갈릴래아 호수를 “바다”라고 부른다. 우리는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바다”로 되어 있는 본문을 계속 “호수”로 옮긴다. 티베리아스는 헤로데가 기원후 17-22년에 갈릴래아 호수 남서쪽 물가에 지어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봉헌한 고을이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갈릴래아 호수가 자주 “티베리아스 호수”로 불린다.

3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축제 때에 의미 깊은 행동을 하셨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복음서 저자의 시대에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이렇게 2,13.23; 6,4; 11,55; 12,1; 13,1; 18,28.39는 파스카, 7,2는 초막절, 10,22는 성전 봉헌 축일과 관련된다). 이제 진정한 파스카는 유다인들의 파스카가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성자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축제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이 가장 폭력적으로 드러나는 때이기도 하다.

4

요한이 전하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아신다(2,25; 4,44; 13,11). 예수님의 물음은 제자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떠보려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필립보의 대답은 예수님의 제자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이지만, 앞으로 일어날 기적이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5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기 때문에(마태 20,2), 이것의 이백 배는 상당한 액수이다.

6

이 이야기에는 초대 교회 성찬례의 상징이 명백히 보존되어 있다. 빵을 많게 한 이 기적은 요한에게 무엇보다도, 26-58절에 펼쳐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입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양식이시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배불리 먹이신다(33절).

7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은 이렇게 그분의 신분과 사명에 관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보장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시기로 되어 있는 종말의 예언자 또는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절에 나오듯이,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나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야 비로소 임금으로 선포되신다(19,19 참조).

8

나중에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실 예수님께서는(18,36), 여기에서도 군중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왕권을 받기를 거부하신다. 여기에서부터 이미 종말과 현세적 메시아사상에 대한 군중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9

한 스타디온은 185미터가량이므로 “서른 스타디온”은 도합 5킬로미터 정도가 되는데, 이는 배가 갈릴래아 호수 거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뜻이다.

10

마르 6,50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심을 밝히신다. 그런데 “나다.”라는 말은 탈출기에서 하느님 이름의 한 부분을 이룬다(탈출 3,14). 요한은 이러한 “나다.”라는 표현을 더욱 발전시키는데,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낸다(4,26; 8,24 각주; 8,28.58; 13,19; 18,5.6.8 참조).

11

이는 또 다른 기적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시편 107,23-32 참조).

12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는 말은, 이 단락 전체가 초대 교회에서 거행되던 성찬례의 맥락 속에 전개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3

군중은 예수님의 권능을 사실로 인정하지만, 그 사실의 참의미는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 권능에서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표징’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생겨난다(2,11의 “표징”에 관한 각주 참조).

14

군중은 빵을 먹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빵을 많게 하신 분을 보고 열광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이시고 또 살리시는 분이시다. 요한에게 “영원한 생명”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과 ‘믿음’은 결국 하나이다.

15

직역: “그에게 아버지께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인장을 찍으셨기 때문이다”(또는, “아버지께서, 하느님께서 인장을 찍어 그를 봉인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서 그분께서 행하시는 표징들은, 하느님께서 그분 활동의 정통성을 보장해 주시는 것이며(3,33) 또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어떤 학자들은 ‘인장을 찍다’라는 표현을, 예수님의 세례를 시사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세례 신학에 똑같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그 근거로 삼는다(에페 1,13; 4,30; 묵시 7,3-4 참조).

16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유일한 길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17

직역: “당신을.”

18

요한에게 참다운 ‘봄’은 표징을 일으키시는 분의 온 실체를 알아보는 것이다.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은 믿음이다. 큰 기적을 본다고 눈이 그냥 열리지 않는다. 예수님에 대한 위와 같은 요청은 늘 오해에서 나온다. 사람은 표징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인들이 보았던 기적들보다 더 훌륭한 이적을 일으키셔서 메시아라는 당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19

요한은 여기에서 시편 78,24 또는 느헤 9,15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 같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매일 받아먹은 만나를 일부에서는, 이집트 탈출 때의 기적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으로 간주하였다(탈출 16,15; 민수 11,7; 21,5; 신명 8,3; 지혜 16,20).

20

예수님에게서 구약 성경의 약속들이 실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1,17; 5,45-46; 7,19.24), 야곱(4,4-15), 아브라함(8,31-59) 등은 모두 지난 과거에 속한 인물로서,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도래를 증언한다. 이렇게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된다.

21

“선생님”에 관해서는 4,11 각주 참조.

2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생명”이나 “빛”과 같은 하느님의 선물을 가져다주신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선물이 당신 자신 안에서 완성된다고 말씀하시는, 곧 당신 자신을 그러한 선물의 완성으로 내세우시는 표현을 가끔 사용한다(8,12; 10,7.9; 11,25; 14,6; 15,1). 예수님을 믿음은 참생명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그분은 “생명의 빵이시다”(51절).

23

일부 수사본들에는 “나를”이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보다’에 관해서는 30절 각주 참조.

2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진정으로 믿는 이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의 참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증언하신다. 믿음은 시각의 통찰력을 더욱 날카롭게 해 주는 것이다(9,41 참조).

25

예수님께 오는 이들은 사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께 주신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께서 이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하시는 것이다(17,6-15). 요한은 여기에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인간적인 그 어떠한 것으로도 제어할 수 없이 지고한 것임을 강조한다.

26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에 관해서는 4,34; 5,19-30 참조. 성부께서 성자를 파견하셨다든가(3,34 각주 참조)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신다고 요한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과 하느님의 일치,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27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는다는 생각을 10,28-29; 17,12; 18,9에서도 볼 수 있다(마태 18,14 참조).

28

탈출 16,2-8의 이야기에서처럼, 군중은 저희끼리 수군거리고 이렇다 저렇다 말함으로써 믿음이 없음을 드러낸다.

29

이사 54,13을 자유롭게 옮긴 것이다(예레 31,33-34; 1테살 4,9 참조).

30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의 직역: “그이만.”

31

같은 내용이 1,18에도 나온다. 복음서 저자는 직전에 인용한 구약 성경의 말씀이 야기할 수 있는 잘못된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시킨다. 구약 성경의 약속은 홀로 성부를 직접적이고 완전하게 아시는 예수님과 관련해서만 성취된다.

32

일부 수사본들에는 이 앞에 “나를”이라는 말이 더 들어가 있다.

33

죽음과 생명에 관해서는 5,25 각주와 11,26 각주 참조.

34

51ㄷ절(또는, 48절)부터 58절까지는 전적으로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만 나온다. “살”이라는 낱말은 가능성과 나약성까지 포함하여 인간의 실체를 이루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1,14와 각주; 3,6과 각주; 8,15와 각주; 1요한 4,2 참조). 여기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중에 사용하신 아람 말 비스라(= 살)를 그대로 그리스 말로 번역한 독립적 전례 전통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말씀으로 요한은 예수님께서 “살”이 되심, 곧 사람이 되신 그 구원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지니는 세상 구원의 차원을 드러내는 전통적 표현이 담겨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곧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사실과 그분의 죽음 사이에는 관련이 있다. 그래서 생명을 가능하게 해 주는 “빵”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10,11.15; 11,50-52; 15,13; 17,19; 18,14; 1요한 3,16 참조).

35

일부 수사본들에는 “자기”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36

앞에서 제시된 주제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제 다시 나온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것들이 이제 성체성사의 빛깔을 띠게 된다.

37

직역: “너희 안에.”

38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그리 올라가신다. 그분을 믿고 또 그분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동참하는 이들은, 그분 안에 있는 이 천상적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된다. 그리하여 성체성사는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누룩’과 같은 것이 된다(5,21-29; 6,39.40.44 참조).

39

최후의 만찬 때에 빵과 포도주,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생명을 보장하는 양식과 음료의 목적을 탁월한 방식으로 완수한다.

40

산다는 것은 성자와, 또 그분을 통하여 성부와 일치를 이룸을 뜻한다. 성찬례가 바로 이 일치를 특권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다.

41

“너희”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아예 이 말이 들어가 있다.

42

“듣고 있을 수” 대신에 “받아들일 수”로 옮기기도 한다.

43

직역: “이것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

44

“어떻게 하겠느냐”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십자가는 지고의 ‘스캔들’(= 걸려 넘어지게 하는것: 직전의 각주 참조)이면서도 동시에 신앙의 눈에는, 성자께서 창조 이전부터 누리시던 영광 속으로 다시 올라가시는 것이다(1,15; 17,5.24).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도, 그분께서 영광스럽게 되시고 또 성령께서 내리시면(7,39) 그 모든 의미가 밝혀지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과 십자가를 꿰뚫어(13,7 참조) 그분의 영광을 식별하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의 진실성과 권능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45

“영”은 하느님 또는 예수님에게서 오는 “영”을 가리킨다(7,39; 17,2 참조). “육”(또는, “살”)은 자기 자신에게만 내맡겨진, 제한된 가능성 안에 갇힌 인간을 뜻한다. “육”으로서 인간은 혼자 힘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믿지도 못한다(37절 각주 참조). 반대로 “영”은 인간을 비추어 주는 생명의 힘으로서, 그의 눈을 열어 주고 예수님에게서 표현되는 “말씀”을 식별하게 해 준다.

46

예수님의 앎에 관해서는 1,42 각주 참조. 예수님의 말씀이 불러일으킨 파장과 그 걸림돌을 뛰어넘지 못하는 믿음은 헛되다. 요한 복음서는 이미 여기에서부터 유다의 배신을 예고한다(13,11.18.21-30). 그리고 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수난을 주관하시며, 수난의 “때”를 아시고(13,1; 18,4) 그 “때”에 앞서 나아가신다(2,4 각주; 12,27과 각주 참조).

47

“이 일 때문에”, “이러한 이유로”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48

직역: “당신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셨습니다.”

49

직역: “당신께서.”

50

참다운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또 실제로 가져다주시는 분을 전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베드로가 한 고백을 생각하게 한다(마태 16,16-23; 마르 8,27-33, 특히 루카 9,18-22 참조).

5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다고 해서 그 선택이 그들의 자유를 묵살하지도 않고, 그들 가운데 하나로서 누군가 그분을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지도 않는다. 그분을 팔아넘긴 자는 사실 사탄의 도구가 된 것이다(13,2.27. 그리고 8,44 참조).

52

이스카리옷에 관해서는 마태 10,4 각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