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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1)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2)”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3)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4) 그자들이5)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6)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7)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
바리사이들이 “당신이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으니,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9) 않소.”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10)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11)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12)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유효하다고 기록되어 있다.13)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14)”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15)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을 잡지 않았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신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6)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17)”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18)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19)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20)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21)”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22)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23)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24)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25)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26)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27)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28)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29)”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30)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31)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32)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33)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34)”
그들이 “우리 조상은35)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36)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37)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39)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40)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41) 있다고 입증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42)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모욕한다.
나는 내 영광을 찾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 주시고 또 심판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43) 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44)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45)”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46)”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이 규정에 관해서는 레위 20,10; 신명 22,22-24 참조.
직역: “당신은 그러므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율법의 규정을 상기시키심으로써(탈출 23,6-7; 신명 17,5-7) 이 적대자들이 쳐 놓은 올가미를 피하시려는 것, 또는 더 간단히, 그 여자를 고소한 자들에게 그들 자신도 죄인임을 상기시키시려는 것이다(마태 7,1-2 참조).
“여인아”라는 호칭에 관해서는 2,4 각주 참조.
“그자들”은 이 여자를 고소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가리킨다.
“선생님”에 관해서는 4,11 각주 참조.
일부 수사본들에는 “그리고”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첫 제자들 이후, 예수님께서는 많은 신앙인을 부르신다(1,37.38.41.43; 10,4.27; 12,26; 13,36-37; 21,19.22). 이들은 그 부르심을 받고 온갖 데에서 나와 그분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성부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빛” 그 자체로 알아보게 된다. 곧 예수님은 성부 곁에서 누리는 참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길을 밝히고 또 그 길을 걸어가게 해 주는 “빛”이신 것이다(1,4-5.9; 3,19-21; 9,5; 11,9-10; 12,35-36.46; 13,6; 1요한 1,5-7; 2,8-10).
“유효하지”에 관해서는 5,31 각주 참조. 다음에서도 계속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위한 증언은 유효하지 않다는 일반적인 법칙이(5,31) 예수님께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분은 성부에게서 오셨다가 성부께 돌아가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인간적인 증언만을 내놓는 다른 이들은 이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의 기준으로”의 직역: “육에 따라.” 이는 인간적 기준에 따라, 결국 외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이다(1코린 1,26; 2,8-16 참조). 그래서 “겉모습에 따라”로 옮기기도 한다.
예수님과 성부의 “심판”에 관해서는 3,16-21; 5,22-30; 9,39; 12,47 참조.
이러한 “두 사람의 증언”에 관해서는 민수 35,30; 신명 17,6; 19,15 참조.
이로써 두 사람 이상이 증언해야 그 증언이 유효하다는 율법의 원칙이 충족된다. 그러나 이 충족의 방식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아직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헌금함 곁에서”의 직역: “귀중품 창고에서.” 성전에는 귀중품들을 보관하는 방들이 있었는데, 일반인들은 물론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말은 그 창고 앞 광장까지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여자들도 다가가는 것으로 보아 ‘여자의 뜰’에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헌금함들이 세워져 있던 곳을 의미할 수도 있다(마르 12,41-43; 루카 21,1-4 참조).
예수님을 신앙으로 참되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죄와 그것의 결과인 죽음을 벗어나게 해 준다(‘죽음’이라는 말에 관해서는 5,25 각주 참조).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지금 믿지 않기 때문에 또는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멸망이 이제 확정되려는 참이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성부 곁으로 건너가는 것이다(7,33; 9,41; 12,32 참조).
자살은 유다교에서 가장 큰 죄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어떤 표현이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자살한다는 말도 여기에 속한다(이미 7,35의 말도 이러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말을 발설한 자들은 알 리가 없었지만, 이 복음서를 읽는 이들은 그것을 예언적 의미로 알아듣게 된다. 곧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놓으신다는 사실을(10,1-18) 예고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은 역설적으로 유다인들을 예수님의 운명을 예고하는 예언자로 만든다. 나중에 카야파와(11,51; 18,14) 빌라도도 마찬가지다(19,22).
존재의 이 두 차원 사이의 대립에 관해서는 3,31 참조.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을 “정녕 ‘나는 나다.’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으로 옮길 수도 있다.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은 전적으로,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아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나는 나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표현하신다. 이로써 “나는 생명의 빵이다.”(6,48) 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의 구원자로서 당신께서 수행하시는 역할을 서술하신 형식을 상기시키시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형식이 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서 잘 알려진 어떤 표현법을 가리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신명 32,39; 이사 43,10; 41,4; 46,4; 48,12). 이사 43,10에서 이 형식은 ‘나는 (늘) 같은 존재이다.’를 뜻한다. 이는 또한 시나이산에서 이루어진 대계시(大啓示), 곧 “나는 있는 나다.”를 시사할 수도 있다(탈출 3,14-16). 이 경우, 위의 형식은 예수님께서 성부와 같은 차원의 신적인 존재, 그럼으로써 절대적으로 성실하시고 또 믿을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그리스 말 본문의 뜻이 분명하지 않아, 이 밖에도 “대관절 내가 왜 너희에게 말해야 하느냐?”, “도대체 내가 왜 계속 너희와 이야기해야 하느냐?”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과 사명에 관하여 줄곧 똑같은 가르침을 제시하신다. 그러나 청중들은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성부의 말씀만을 하신다는 것에 관해서는 7,17; 12,49; 14,10 참조.
일부 수사본들에는 “그들에게”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내가 나임을”에 관해서는 24절 각주 참조.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지실 때,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도 들어 올려지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3,14-15; 12,32.34). 그리고 그분께서 신적인 존재시라는 사실이,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진실하시다는 점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명백해진다는 것이다(7,39 각주 참조).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구약 성경의 표현을(탈출 3,12; 여호 1,5; 1사무 10,7; 예레 1,8; 아모 5,1),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신다. 그리하여 이 표현은 이제 더욱 강력한 뜻을 지니게 된다(16,32 참조). 이는 또한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하느님 아버지만을 섬기신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4,34; 5,30; 6,38).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관해서는 2,23; 4,39-41; 7,31; 10,42; 12,11.42 참조.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결국,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표현해 내시는 예수님을 열렬히 추종함을 뜻한다(비슷한 표현이 나오는 5,38; 6,56; 8,37; 15,7; 2요한 9도 참조).
요한 복음서에서 “진리”는, 사람들에게 충만하고 참된 생명을 가져다주고 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을 한데 결합시키는, 하느님의 실재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예수님에게서 드러나고 또 그분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을 믿음은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1,14.17; 14,6.17; 15,26; 16,7.13; 17,17-19; 18,37-38; 1요한 1,6.8; 2요한 1).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도 아니고, 현인이 인간 현실에 대한 숙고의 결과로 도달하게 되는 내적 자유도 아니다. 요한 복음서는 거짓말(44절),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자유를 이야기한다(24절과 51절). 이 자유는 성부와 성자와 일치를 이루면서(17,3)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 주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유를 종말론적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님에게서 받는 진리와 관련된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잘 이해한다(정치적으로 유다는 자주 외국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신앙 안에서 얻어야 한다. 그래서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또는, 종족)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더 이상 이러한 자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아브라함의 참후손이기 때문이다(마태 3,9; 로마 4; 갈라 4,21-31 참조).
아들의 신분과 종의 신분은 서로 대립되는데, 자유는 아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다. 죄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죄를 짓게 되면 종살이를 하게 되고 소외된 삶을 살게 된다. 성자만이 성부와 일치를 이루시어, 결정적이고 확실한 방식으로 언제나 “집”에서 사실 수 있다(종과 아들의 대립 관계에 관해서는 창세 21,10; 예레 2,14─3,22; 갈라 4,1-9; 5,1 참조). 그리고 이 성자께서는 믿는 이들도 당신처럼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생물학적이나 사회적 사실만이 아니라, 이 성조(聖祖)가 실천한 삶의 자세에 부합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이렇게 부합하는 삶은 실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이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알아 모시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로마 4,1.11-25; 9,7; 갈라 3,6-16 참조).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는 그렇게 하려는 자들이 육적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드러내는 명백한 표지가 된다.
이 말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사실 많은 수사본에는 이 말이 덧붙어 있다.
후반부를 “너희도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해야 한다.”로 옮길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의 “너희”는 바로 앞 절이 말하듯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 절에서 말하는 “아버지”는 44절의 “악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 말에서는 “조상”과 (앞 절에 나오는) “아버지”(아비)가 같은 말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이들의 본보기이다(창세 15,6; 집회 44,20-21; 로마 4,3.18.20; 히브 11,8-19; 야고 2,21-24 참조).
일부 수사본들에는 “그래서”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유다인들은 44절에서 분명하게 표현되는 예수님의 질타를 이미 알아듣고, 자기들이 정당함을 강조하려고 한다. 곧 자기들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정당한 자녀로서, 불법적인 ‘간음’이나 ‘매춘’의 결과로 태어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곧잘 혼인에 비기고, 하느님을 저버리는 우상 숭배, 곧 선택된 백성이 하느님에 대해서 저지르는 불충을 ‘매춘’으로 이야기한다(이사 57,7-13; 예레 3,1-4; 에제 16,33; 호세 1─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들어야 하는데도 그러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세계에 속하지 않음을 드러낸다(18,37 참조).
“악마”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존재 그 자체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대항은 그분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생명을 파괴해 버리려는 의지로 표현된다(창세 3; 지혜 1,13-16; 2,24; 로마 5,12; 1요한 3,8-15 참조). 그래서 악마를 “살인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도 생명을 파괴하려는 그러한 욕망에서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죄”는 진리와(15,24)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류와 거짓을 뜻한다.
사마리아인에 관해서는 4,9 각주 참조. 유다인들의 눈에 사마리아인은 선택된 민족에게서 갈라져 나가 오류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통파라고 자부하는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귀에 들렸다는 것은 상투적인 인신공격이었다(마태 9,34; 11,18-19; 12,24-37; 루카 11,15-26. 그리고 요한 7,20; 10,20 참조).
“죽음”에 관해서는 8,24; 11,25-26 참조.
구약 성경에서는 심판의 날 또는 메시아 나라가 시작하는 날인 ‘주님의 날’을 자주 이야기한다(이사 13,6; 에제 30,3; 아모 5,18; 요엘 1,15 등). 이 표현이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에 적용된 것이다(루카 17,24; 1코린 1,8; 5,5; 2코린 1,14 참조).
옛날에 죽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을 보았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희망 속에서 어느 정도 그 일을 미리 보는 예언적 환시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그분의 영광을 보는’ 이사야 예언자와 관련된 12,41 참조).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의 희망을 실현시켜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사후의 세계에서) 실제로 보았음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다(루카 16,27 참조).
직역: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다.” “나는 - 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24절과 28절에 나오는 “내가 나임”과 똑같다. 그래서 이 말은 “나는 - 나다.”로 번역될 수도 있다. 위의 말은 성자께서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1,1-3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