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루카 복음서
1장
머리말1)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2)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3)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4)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5)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6)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7)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8)
유다9) 임금 헤로데10)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11)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12)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13)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14)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15)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16)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17)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18)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19)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20)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21)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22)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23)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24)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25)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26)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27)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28)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29)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30)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31)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32)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33)”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34)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35)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36)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37)”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38)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39)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40)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41) 주님께서 굽어보시어42)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예수님의 탄생 예고43)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44)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45) 처녀를46)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47) 기뻐하여라.48)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4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50)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51)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52)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53)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54)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55)”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56)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57)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58)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59)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60)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61)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62)”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63)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64)”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65)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66)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67)”
마리아의 노래68)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69)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70)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71)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72)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73)”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74)
세례자 요한의 출생75)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76)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77)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78)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79)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80)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81)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82)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83)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84)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85)
즈카르야의 노래86)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87)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88)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89)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90) 일으키셨습니다.91)
당신의 거룩한92)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9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94)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95)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96)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97)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98)
높은 곳에서 별이99)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100)
우리 발을 평화의101)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102)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103)
이 소제목을 “머리말” 대신에 “헌사”(獻辭)라고 할 수도 있다. 루카는 당시의 그리스 저자들이 하는 식으로 자기의 작품을 시작한다. 그는 이미 같은 작업을 한 선배들, 자료 수집에 기울인 자기의 노력, 그리고 문학적 구성 원칙을 언급하고 나서, 자기의 책을 중요한 인물에게 바친다는 말을 한다. 이러는 가운데 거룩한 역사를 다루는 이 저자의 목적이 드러난다. 루카는 전통을 바탕으로 복음서를 저술하려는 것이다.
루카가 저술하려는 이 작품의 소재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명 수행을 둘러싼 모든 일이다. ‘이루다’라는 동사의 수동태가 조심스럽게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일들은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복음서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히 수가 많지 않았을(위 문장의 “많은”은 당시의 머리말에서 관습적으로 쓰이던 강조형 표현이다.) 루카의 선배들 가운데에는 마르코 복음서 저자도 들어간다. 그런데 루카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현재에는 본문이 전해지지 않는 다른 사료들도 저자가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공관 복음서 입문’ 참조).
“엮은 것입니다”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말씀”은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이다(사도 4,31; 6,2.7; 11,1). 저자는 위의 말로써 이 책의 모든 자료를 전통에서 이어받았음을 밝힌다.
“존귀하신”은 직책상 또는 사회적으로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부를 때에 붙이던 말이다(사도 23,26; 24,3; 26,25 참조). 여기와 사도 1,1에만 나오는 테오필로스에 관해서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실제 인물인지 가상 인물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실제 인물일 경우, 교회의 교리 수업을 받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4절의 ‘배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교리를 배우다’의 뜻도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그가 이교인으로서, 루카가 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호교론(護敎論)을 펼치려 하였다고 생각한다.
루카는 “순서대로”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관건이 되는 것은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문학적이고 교훈적인 순서라는 사실을, 이어지는 이 복음서에서 보게 된다.
“진실임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루카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해석된 사실들을 소개한다는 뜻이다.
성전에서 전례가 장엄하게 거행되는 동안,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요한의 출생과 사명을 예고한다. 즈카르야에게 내린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하려고, 루카는 발현(판관 6,11-24), 기적적 탄생의 예고(창세 16; 17; 18; 판관 13), 예언자들의 신탁이라는(말라 2,6; 31,1.23-24; 이사 40,3) 전통적 주제와 함께 그리스 말 구약 성경의 언어를 이용한다.
여기에서 유다는 그리스인들이 부르는 것처럼 유다인들의 영토 전체를 가리킨다. 루카는 이 용어를 4,44; 6,17; 23,5; 사도 10,37에서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3,1; 5,17; 사도 9,31에서는 유다인들의 방식에 따라 북쪽의 갈릴래아와 대조되는 팔레스티나 땅의 남부 지역만 가리키는 데에 적용한다.
헤로데는 기원전 4년에 죽은 대(大)헤로데이다(마태 2,1 각주 참조).
유다의 사제단(司祭團)은 24개 조로 나뉘는데, “아비야 조”는 그 가운데에서 여덟 번째였다(1역대 24,10).
“자손”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딸’을 의미한다. ‘아들’ 또는 ‘딸’이라는 말로 ‘자손, 후손’까지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엄격하게는 ‘여손’(女孫)이 그리스 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들이 구약 성경에 따른 참된 신앙인, 곧 율법과 제의(祭儀)의 규정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는 사람들임을 뜻한다.
이사악(창세 11,30), 야곱과 에사우(창세 25,21), 요셉과 벤야민(창세 29,31), 삼손(판관 13,2-3), 사무엘(1사무 1,5) 등 기적적으로 태어난 이들의 어머니처럼, 엘리사벳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본디 이 ‘불임’은 늘 수치로(창세 30,23; 1사무 1,10; 이사 4,1), 때로는 천벌로까지 여겨졌다(레위 20,20-21; 2사무 6,23).
아브라함과 사라도 그러하였다(창세 18,11).
사제단의 각 조는 돌아가면서 일주일씩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리스 말에서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는 8절의 “자기 조 차례가 되어”를 꾸밀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비를 뽑아서 소임을 결정하는 관례를(1역대 25,8 참조) 서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바칠 때에 분향 제단에서는 향도 피워 올렸다. 사제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소임을 맡는 것을 매우 드문 영광으로 여겼다.
“백성”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라오스는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을 일컫는 용어로서, 루카 복음서에서 자주 쓰인다(1,21.68.77; 2,10.32; 3,15.18.21 등).
이 “분향 제단”도 1열왕 6,20-21; 7,48이 말하는 것처럼 금으로 입혀져 있었다. “오른쪽”은 왼쪽과 달리 명예로운 자리로 여겨졌는데(시편 110,1; 에제 10,3; 마태 25,33; 루카 22,69; 사도 7,55; 로마 8,34 참조), 여기에서는 천사의 품위를 강조한다.
“그 모습을”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가끔 천사들이 발현할 때에 사람들이 ‘놀란다’고 직간접적으로 언급된다(판관 13,20.22; 토빗 12,16; 다니 8,17-18; 10,7-8.11.16). ‘두려움’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인간이 자기를 훨씬 뛰어넘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신비 앞에서 가지게 되는 공포이다. 루카는 천사의 발현 또는 하느님의 계시(2,9; 9,34), 기적(1,65; 5,26; 7,16; 8,25.35.37; 24,5.37; 사도 2,43), 그리고 하느님의 다른 개입(사도 5,5.11; 19,17) 앞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보통 하느님과(창세 15,1; 26,24; 46,3; 판관 6,23) 천사의 발현 때에(창세 21,17; 토빗 12,17; 다니 10,12.19) 사람을 안심시키시는 말씀이다.
즈카르야가 무엇을 청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에서는, 그가 사제로서 공식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에는 온 백성의 관심사, 곧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해 주십사는 간청을 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으리라고 말하는 천사에게, 즈카르야가 못 믿겠다는 식의 말을 한다는 사실도(18절과 20절)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즈카르야가 공적으로는 이러한 기도를 하면서도 사적으로는 아들을 청하는 기도를 하였을 수 있다. 그리고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는 기도는, 즈카르야가 전례를 거행하는 그 순간이나 부부가 다 늙은 그 당시는 아니라 할지라도, 젊을 때부터 늘 바쳐 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어지는 문맥도 이러한 사적 기도를 전제한다. 그런데 천사는 사실 이 두 가지 기도가 다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즈카르야에게 태어날 아들이 메시아의 선구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예고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탄생 예고, 특히 창세 17,19의 표현을 따른다(창세 16,11; 판관 13,3.5; 이사 7,14 참조). 요한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이름 요안네스는 히브리 말 이름 여호하난을 그리스 말식으로 옮긴 것으로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한다. 이는 이 아기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첫째 표징임을 시사한다.
“그가 너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로 옮기기도 한다. 이 ‘기쁨’은 1,28.44.47; 2,10에도 나오듯이 결국은 메시아와 관련된 기쁨이다.
엘리야도 “주님 앞에서” 그분을 섬겼다(1열왕 17,1; 18,15).
술을 마시지 않음은 나지르인, 곧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때로는,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의 생활을 가리킨다(민수 6,2 각주 참조). 삼손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러한 고행의 생활을(루카 7,33) 하리라고 예고된다(판관 13,4.7.14). 이러한 삼손, 그리고 예레미야나 ‘주님의 종’처럼 구약 성경의 여러 인물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 봉헌된다(판관 13,5; 16,17; 이사 49,1.5; 예레 1,5). 이는 그들이 특정 사명을 수행하도록 미리 선택되었음을 뜻한다(갈라 1,15 참조). 모태 속에 있는 요한에게 실제로 성령이 내린 것은 1,41-44에서 말해진다.
말라 2,6에 나오듯이, 요한은 자기 조상 레위가 많은 이를 회개하도록 한 사명을 이어받게 된다.
“그분보다 먼저 와서”는 요한이 말라 3,1.24에 예고된 대로 주님의 선구자가 되리라는 것이다(76절과 7,27 각주 참조). 그러면서도 루카는 요한과 엘리야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을 피한다. 그는 오히려 예수님을 엘리야와 비교한다(4,26; 7,12.15; 9,42.51.54.57.61-62; 22,43-45). 반면에 마태 11,14와 17,12-13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종말에 오리라고 고대되는(말라 3,23) 엘리야로 말해진다. 마르 9,13에도 이러한 사실이 전제된다.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의 직역: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는 것은, 말라 3,24와 집회 48,10에 따르면, 장차 올 엘리야가 수행하게 되는 사명이다.
직역: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으로(또는, ‘사고방식 쪽으로’) 돌려.”
직역: “채비를 갖춘 백성을 주님을 위하여 준비할 것이다.” ‘채비를 갖추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준비하다’ 동사와 동의어이다. 이 동사는 7,27(= 마태 11,10)과 마르 1,2에도 나오는데, 주님의 사자(또는, 천사)가 오는 것에 대한 말라 3,1의 신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준비하다’는 76절과 3,4(= 마르 1,3)에서 요한의 사명을 서술하는 데에서도 다시 쓰이는데, 이는 주님의 오심에 관한 (칠십인역에 따른) 이사 40,3의 말씀에서 빌려 온 표현이다.
즈카르야는 아브라함과 달리(창세 15,8 참조) 확신을 가지지 못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표징을 바라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의 직역: “나는 (시중들려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 이는 페르시아 궁궐 안의 모습을 담은 표현으로, 임금 앞에 서 있는 이들은 최고위 관리들로서 이들만 어전에 들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천사들 가운데에서도, 영광 속에 계시는 주님의 면전까지 들 수 있는 고위 천사라는 것이다(토빗 12,15). 다니 8,16-17과 9,21-27에서는 가브리엘이 구원의 시대를 예고하는 존재로 나온다.
요한이 태어나리라는 것이 인간의 구원을 알리시는 하느님의 메시지, 곧 “기쁜 소식”이다. 여기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그리스 말에서는 한 동사이다. 이처럼 루카는 늘 “복음”(= 기쁜 소식)이라는 명사만 쓰는 마르코와 달리(마르 1,1 각주 참조), 자기의 이 첫 작품에서는 항상 이 동사를 사용한다(2,10; 3,18; 4,18.43).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그의 불신에 대한 징벌이면서, 그가 믿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요청한 표징이기도 하다.
탈무드에 따르면, 밖에 있는 회중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대사제는 성소 안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분향을 한 사제는 밖으로 나와, 보좌하는 네 명의 사제와 함께 백성에게 축복하게 되어 있었다(민수 6,23-26 참조).
“기간이 차자”의 직역: “날들이 차자.” 이는 구약 성경의 표현으로 루카는 2,6.21.22에서도 이 표현을 쓴다(9,51; 사도 2,1; 9,23 참조).
숨어 지냈다는 말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하느님의 계시로만 알 수 있었다는 점을(36절) 드러낸다.
요셉이 태어났을 때에 라헬도, 하느님께서 자기의 “수치를 없애” 주셨다고 말한다(창세 30,23).
“주님께서 굽어보시어”의 직역: “그분께서 굽어보신 날들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동네 나자렛에서 일어나는 이 이야기는, 요한의 탄생 예고와 문학 유형이 같을 뿐만 아니라, 둘이 매우 비슷하게 전개된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을 먼저 31-33절에서 인용되는 이사 7,14; 9,6. 그리고 2사무 7,14.16의 신탁과 함께 전통적 메시아로 말하다가, 그다음에는 하느님의 아드님 그 자체로 말한다(35절. 그리고 로마 1,4 참조). 동정녀 잉태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유일하고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표징이다.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우위성은 앞 이야기와의 대비로써 줄곧 부각된다. 즈카르야의 불신에 대립되는 마리아의 사려 깊은 신앙도 예수님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나자렛은 본디 보잘것없는 마을이다(요한 1,46 참조). 그러나 루카는 나자렛을 베들레헴(2,4), 카파르나움(4,31), 나인처럼(7,11) “고을”이라고 부른다.
유다의 법에 따르면, 약혼은 혼인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지닌다(신명 20,7; 22,23-27 참조). 다만 약혼녀는 일 년가량 계속 친정에 머무르다가 신랑 집에 가서 혼인식을 올리고 함께 생활한다(마태 25,1-13 참조). 약혼 기간에도 이미 약혼녀와 그의 소유물은 약혼자에게 속하고, 약혼녀의 부정(不貞)은 간음으로 간주되었다.
“처녀”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파르테노스는 함축적으로 동정(童貞)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젊은 처자를 가리킬 수 있다(마태 25,1-13 참조).
“은총이 가득한 이”(총애를 입은 이)가 마치 마리아의 이름처럼 쓰인다. 마리아가 ‘(하느님에게서) 총애를 입은 이’ 그 자체라는 뜻이다.
“기뻐하여라.”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기뻐하다’ 동사의 현재 단수 2인칭 명령형이다. 이것이 ‘안녕!/안녕하십니까?’처럼 일상적인 인사말로 쓰였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인사말이라기보다, “딸 시온”(스바 3,14; 즈카 9,9) 곧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의 예고를 이어받은 ‘기쁜 소식’의 기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14절 각주 참조).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말은 구약 성경의 소명 이야기에 자주 나온다(탈출 3,12; 판관 6,12; 예레 1,8.19; 15,20. 그리고 창세 26,24; 28,15 참조).
12절의 즈카르야보다 더 질겁한 것이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천사의 모습만 보고 놀라지만, 마리아는 천사가 한 말, 곧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어떤 깊은 뜻, 또는 자기의 독특한 소명을 짐작케 하는 말에 더 놀라는 것이다.
루카는 마리아가 12절의 즈카르야처럼 단순히 공포에 휩싸여 있지 않고, 천사가 한 말을 숙고하는 모습을 드러낸다(1,34와 2,19 참조). 마리아는 예기치 않은 이 계시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직역: “너는 하느님에게서 총애(또는, ‘호의’)를 발견하였다.” 이는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하느님/주님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하다’와 같은 표현으로(창세 6,8; 18,3 각주; 30,27 등), ‘호감을 사다’ 곧 ‘눈에 들다’를 뜻한다.
13절에서처럼, 천사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탄생에 관한 신탁의 표현을 이용한다. 이와 가장 가까운 본문은 이사 7,14이다(마태 1,23 참조).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마태 1,21에서처럼(그곳의 각주 참조) 바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2,11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로 불리신다(1,69.71.77; 2,30; 3,6 참조).
예수님께서는 요한과 달리(15절) 절대적으로 “큰 인물”, 또는 “큰 인물” 그 자체가 되시는 것이다. 다음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여기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은 35절에서와는 달리 다윗의 자손 임금의 전통적 칭호로 쓰인 것이다(2사무 7,14; 시편 2,7; 89,27). 헬레니즘과 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서 흔히 하느님의 칭호로 쓰이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신약 성경에서 마르 5,7과 히브 7,1 외에는 루카만 사용한다(루카 1,35.76; 6,35; 8,28; 사도 7,48; 16,17).
메시아가 “야곱 집안” 곧 이스라엘만 구원한다는 민족적 메시아사상이, 2,32에서는 보편주의적 메시아사상으로 확대된다.
‘남자를 알다’는 남자와 육체관계를 맺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부부 관계도 포함된다(창세 4,1.17.25; 19,8; 24,16 등). 그래서 이 ‘알다’를 ‘잠자리를 같이하다, 관계하다’ 등으로도 옮길 수 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을 하긴 하였지만, 계속 숫처녀로서(27절 참조) 다른 남자는 물론 요셉과도 관계를 맺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내용은 마태 1,18의 말과 상통하는 것으로, 둘 다 ‘동정 잉태’를 가리킨다.
마리아도 18절의 즈카르야처럼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믿게 해 줄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여, 그의 물음은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만다(20절). 반면에, 마리아의 질문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38절 그리고 45절 참조).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마리아의 물음은 예수님의 신비에 관한 더 완전한 계시를 끌어들이는 구실을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를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힘을” 부여받는다는 17절과 비교할 때, 서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뚜렷해진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영”은 그분의 창조적이며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위업을 이룬다(창세 1,2; 시편 104,30). 이 “영”은 또 메시아에게도 부여된다(이사 11,1-6).
‘덮다’라는 표현은 탈출 40,35; 민수 9,18.22; 10,34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효력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킨다(루카 9,34 참조). 그래서 이 ‘덮다’라는 표현에는 아무런 성적인 의미가 내포되지 않는다. 이러한 성경의 언어는 신들의 관여로 이루어지는 출생에 관한 타민족들의 관능적인 이야기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하느님께만 속함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사도 3,14; 4,27.30. 그리고 루카 4,34 참조).
“하느님의 아드님”은 구약 성경에서처럼(2사무 7,14 각주) 루카에게서도 메시아를 일컫는 칭호이다(루카 4,34.41; 사도 9,20.22). 루카는 또한 이 칭호를, 예수님과 하느님을 일치시키는 신비로운 관계를 가리키는 표현 그 자체로 이용한다. 그리고 이 칭호는, 예외적으로(루카 22,70; 사도 9,20) 사람들이 쓸 때도 있지만(마태 14,33; 16,16; 27,40.43.54; 마르 15,39), 주로 하느님 아버지(3,22; 9,35), 천사(35절), 악마(4,3.9.41; 8,28), 예수님 자신이 쓰신다(10,22. 그리고 20,13 참조). 가브리엘이 전하는 이 메시지에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32절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다는 내용의 새로운 충만성을 나타낸다(22,70 각주 참조).
이와 비슷한 내용의 말이 창세 18,14에서는, 사라가 기적적으로 이사악을 임신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여자가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룻 3,9; 1사무 25,41 참조. 마리아의 대답은 단순히 겸손이 아니라, 믿음과(45절) 사랑을 드러낸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 영광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에서는 어쩔 수 없이 “……를 바랍니다.”로 옮기는데, 이 표현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천사의 말에 따라 모든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두 어머니의 만남은 사실 이들이 잉태한 아기들의 만남이고, 어머니들은 아기들이 수행하게 될 사명의 협조자이다. 세례자 요한은 15절에서 예고된 대로 모태에서부터 성령을 받는다. 그리고 마리아의 배 속에 감추어진 메시아 앞에서 기뻐 뛰는 것으로 자기의 예언자적 사명 수행을 개시한다. 엘리사벳은 바로 이러한 요한의 대변인이 된다(43절).
“주님”은 메시아의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2,11 각주 참조).
이 행복 선언은 마리아를 대상으로 하는데, 마리아는 즈카르야와 달리(20절)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감사 시편의 전통적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노래 또는 시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약 성경의 언어를 이용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편이 팔레스티나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편을 루카가 마리아의 노래로 삼으려고 48절을(38절, 45절 참조) 덧붙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현재의 위치와 형태에서, 이 찬미가는 예수님 어머니의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을(46-50절), 그리고 계약의 약속들을 이행하신 데 대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집단적인 감사의 마음을 노래한다(51-55절).
몇몇 고대 라틴 말 번역 수사본들과 교부들의 문헌에는 마리아 대신에 엘리사벳으로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체로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본디 “그러자 말하였다(단수 3인칭).”였는데, 필경사들이 마리아 또는 엘리사벳을 집어넣었다. 둘째, 본디는 엘리사벳이 들어 있었는데, 동정녀 공경과 관련된 교의적 관점에서 마리아로 바꾸었다. 셋째, 본디 마리아였는데, 특히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41절 때문에 일부 필경사들이 엘리사벳으로 바꾸었다. 오늘날에는 이 셋째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마음”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통상 ‘영’(靈)으로 번역되는 프네우마인데, 여기에서는 앞줄의 “영혼”(그리스 말로는, 프시케) 때문에 “마음”으로 옮긴다.
“하느님 안에서” 대신에 “하느님으로”로 옮길 수도 있다.
구약 성경에서는 자주 하느님께서 ‘기억하신다’고 말한다(창세 8,1; 9,15; 탈출 2,24 등). 이는 그분께서 당신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심을 뜻한다(72절 참조).
“그 자비가”와 “미칠 것입니다”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마리아의 체류 기간이 요한의 출생 때까지 이어져(36절 참조), 요한이 태어날 때 마리아가 곁에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루카는 요한의 출생을 이야기하기 전에 마리아의 귀향을 언급함으로써, 먼저 마리아의 방문에 관한 단락을 끝맺는다. 그리고 뒤에 가서는 예수님의 세례 전에 먼저 요한의 투옥을 이야기한다(3,20). 이로써 그는 예수님과 요한이 관련된 장면들을 서로 구분하고, 요한의 때와 예수님의 때를 분리한다(예수님의 탄생을 말하기 전에 요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80절도 참조).
이어지는 이야기는 요한의 이름이 신기한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기의 출생보다는 이름이 정해지는 할례식과 더 관련된다. 그리고 많은 이가 모인 가운데 기쁨 속에 일어나는 이 일의 소문이 온 지방에 두루 퍼진다.
“여드레째 되는 날”은 창세 17,12; 레위 12,3(필리 3,5 참조)에 따르면, 할례를 하도록 법적으로 정해진 날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정한다(창세 4,1; 21,3; 25,25-26 등). 여기에서는 헬레니즘, 그리고 당시에 시작된 유다교 관습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의 이름을 아기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보다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것이 더 흔하였다. 즈카르야의 경우에는 그가 이미 상당히 늙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저자는 엘리사벳이 아기의 이름을 남편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62-63절 참조) 성령의 감도로 알게 되었다고(41-45절 참조) 말하려는 것 같다.
이는 말을 못하는 벌에(20절) 듣지 못하는 것까지 포함되었음을 뜻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아기의 이름을 때로는 어머니가(창세 29,32-35; 30,6.24; 35,18; 판관 13,24; 1사무 1,20; 4,21; 2사무 12,24 등), 때로는 아버지가 짓는다(창세 16,15; 17,19; 35,18; 탈출 2,22 등). 여기에서는 어머니가 말한 이름을 아버지가 확인하는데(60절), 그것은 주님의 천사가 정해 준 것으로서(13절), 부부가 아기의 이름에 대해서 이렇게 일치하는 것 역시 아기의 미래를 가리키는 하나의 표징이 된다. 예수님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31절, 2,21과 비교.
즈카르야는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면서(13절) 자기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전혀 예기치 않게 같은 이름, 그것도 이례적인 이름을 내놓은 것을 하느님의 개입으로 생각한 것이다. ‘놀람’은 기적이나(8,25.56; 9,43; 11,14; 사도 3,10) 다른 신적인 현상(24,12.41; 사도 2,7) 앞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반응이다.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의 직역: “그의 입과 그의 혀가 열려.”
이러한 인간의 “두려움”에 관해서는 12절 각주 참조.
성경에서 “마음”은 인간의 모든 내적 삶이 결정되고 펼쳐지는 자리이다. 곧 생각, 기억, 감정, 결정 등이 이루어지는 곳이다(2,19.35.51 등과 특히 21,14 참조).
직역: “정녕 주님의 손이 그와 함께 계셨던 것이다.” 루카의 이 표현은(사도 11,21 참조)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보호와(시편 80,18; 139,5) 하느님의 예언자에 대한 그분의 행동을(1열왕 18,46; 2열왕 3,15; 에제 1,3; 3,14.22; 8,1 등) 드러내는 구약 성경의 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요한이 하느님의 보호와 호의의 대상임을 가리킨다.
이 예언적 시편은 46-55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와 유사한 것으로, 메시아를 통하여 내린 구원에 대한 감사 노래이다(69절과 78-79절). 이 시편은 아마도 팔레스티나에 있던 공동체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루카는 중간에서(76-77절) 요한의 사명을 명시한다. 그리하여 이 노래를 예수님의 사명에 관한 시메온과 한나의 신탁에(2,29-32.34-35.38) 상응하는 것으로 이용한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전통적 문구이다(창세 9,26; 14,20; 24,27; 탈출 18,10; 1사무 25,32; 1열왕 1,48; 8,15 등. 그리고 시편 각 권의 끝에 덧붙여진 시편 41,14; 72,18; 89,32; 106,48도 참조). 이는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2코린 1,3; 에페 1,3; 1베드 1,3).
“찾아와” 대신에 “돌보아”, “호의로 내려다보시어”로 옮길 수도 있다.
“다윗 집안”을 언급하는 것은 이 시편이 메시아적인 의도를 지녔음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힘센 구원자”의 직역은 “구원의 뿔”로서 구원을 이루는 뿔을 뜻하는데, 뿔은 성경에서 힘을 가리키는 상징이다(1사무 2,10; 시편 89,25; 132,17 참조).
‘일으키다’라는 이 성서적 용어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일, 곧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언자에게는 ‘거룩하다’라는 수식어가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사도 3,21; 2베드 3,2).
이 문장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앞 절 문장처럼 하느님 행동의 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 계약을 기억하시려는 것입니다.”로 옮겨야 한다. 둘째는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 식으로 앞 문장의 결과로 알아듣는 것인데, 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판단된다. ‘기억하다’에 관해서는 54절 각주 참조.
직역: “우리의 모든 날에.”
우리말과는 어순이 다른 그리스 말 본문에서 “당신을 섬기도록”은 74절 끝에,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는 73절 끝에 나온다.
루카는 17절에서 제시한 예언서 인용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 말과 관련해서는 3,3에 나오는 요한의 역할 참조.
“크신 자비”의 직역: “자비의 내장.” “내장”은 동정(同情)의 자리여서 “자비의 동정”으로 옮길 수 있는데, 일종의 강조형으로 이해해서 위와 같이 옮긴다.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서는 시편 79,8; 119,77; 145,9; 이사 54,7; 63,7.15; 예레 31,20; 즈카 1,16 등 참조.
“높은 곳에서” 대신에 “하늘에서”로 옮길 수도 있다. “별”은 여기에서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솟음”으로서 솟는 것 또는 솟는 존재를 가리키는데, 땅에서 싹트는 “새싹”일 수도 있고(이사 11,1; 예레 23,5; 즈카 3,8; 6,12 등 참조), 하늘에서 솟는 ‘천체’, 특히 “별”을 가리킬 수도 있다(민수 24,17 참조).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다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곧 하늘에서 싹이 솟는다는 것은 곤란하고, 다음 절에 나오는 ‘비추다’와도 맞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메시아-별’이라는 표상이 유다교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마태 2,2 참조) “별”로 옮긴다. 그러나 메시아를 “의로움의 태양”으로 부르는 말라 3,20 같은 구절도 여기에 작용하였을 수가 있다.
메시아의 이러한 직분에 관해서는 이사 9,1의 메시아 예고 참조.
성경에서 “평화”(1열왕 5,26 각주 참조)는 생명이 충만함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메시아 시대에 베풀어지는 은혜 그 자체이다(이사 9,5-6; 미카 5,4). 루카는 바로 이 주제를 줄곧 강조한다(2,14.29; 7,50; 8,48; 10,5-6; 11,21; 12,51; 14,32; 19,38.42; 24,36).
이 간략한 서술은 이사악과 이스마엘(창세 21,8.20), 삼손(판관 13,24-25), 사무엘의 유년 이야기에서 가져온 어휘들로(1사무 2,21.26; 3,19) 구성되어 있다.
요한의 이러한 삶에 관해서는 3,2-4; 7,2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