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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예수님의 탄생1)(마태 1,18-25)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2)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3)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4)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5)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6)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7)
그는 자기와 약혼한8)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9)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10)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11)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12)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13)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14)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15)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16)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17) 마음속에18)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19)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20) 돌아갔다.
할례와 작명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21)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22)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24)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26)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27)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28)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29)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30)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31)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32)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33)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34)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35)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36)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37)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8)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39)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40)”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41)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42)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의 유년 시절43)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44)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45)
예수님의 소년 시절46)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47)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48)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49)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50)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5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52)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53)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54)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55)
예수님의 탄생 장면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1,57-66과 짝을 이룬다. 그러나 이 2장의 이야기는 1장에서처럼 아기의 할례와 작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탄생 그 자체가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사제의 집에서 많은 친척과 친지에 둘러싸여 유복하고 편안하게 태어나는 요한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여행 중에 보잘것없는 여관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실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도 목자들밖에 없다. 그러나 천사들은 구세주 곧 주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고 그분께서 하느님께 올리시는 영광과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시는 평화를 선포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9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로마 제국을 다스린 황제이다.
“호적 등록” 대신에 “인구 조사”로 옮기기도 한다.
퀴리니우스(Publius Sulpicius Quirinius)는 시리아 총독으로서, (마태 2,19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뒤: 루카 1,5 참조) 대헤로데가 죽은 지 십 년 뒤인 기원후 6년에 팔레스티나에서 호적 등록 또는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12년부터 근동의 로마 통치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는 헤로데가 죽기 전에 이미 호적 등록을 시작하였는지, 루카가 나중에 실행된 호적 등록을 앞당겨 이야기하는지, 현재의 자료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어떤 옛 문헌들에 따르면 로마 치하의 이집트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인구 조사를 하였다.
베들레헴이 다윗의 고향이기는 하지만(1사무 16), “다윗 고을”(또는, 다윗 성읍/성)은 구약 성경에서 항상 예루살렘을 가리킨다(2사무 5,7.9; 6,10.12; 이사 22,9). 요한 7,42도 함께 고려할 때, 베들레헴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미카 5,1을 해석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마태 2,6; 1사무 16,1 참조).
직역: “그가 다윗 집안과 일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일가”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보통 “집안”보다 더 큰 일족을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이 두 낱말이 일종의 중언법(重言法)으로 쓰인다. 곧 동의어로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약혼”에 관해서는 1,27 각주 참조. “자기와 약혼한” 대신에 “자기와 정혼한”, 또는 “자기의 아내”로 옮기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첫아들”로서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다(탈출 13,12; 34,19. 그리고 루카 2,23 참조). 게다가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맏아들로서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1,32-33에 나오는 천사의 예고 참조). 루카는 더 나아가서 로마 8,29; 콜로 1,15.18; 히브 1,6; 묵시 1,5에 나오는 그리스도론적 칭호 “맏아들”, “맏이”도 함께 생각하였을 수 있다(그리스 말에서는 ‘첫아들’, ‘맏아들’, ‘맏이’가 다 같은 용어로 표현된다).
“여관”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이 22,11과 마르 14,14에서는 최후의 만찬이 벌어진 “방”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여관을 뜻하는 데에는 다른 낱말이 쓰인다(10,34 참조). 여기에서는 통상 “여관”으로 옮기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집 또는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예수님의 선조인 다윗 임금도 베들레헴 부근 들판에서 양 떼를 치다가(1사무 17,15), 하느님에게서 왕직으로 부름을 받는다(1사무 16,1-13. 그리고 시편 78,70 참조).
“주님의 영광”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신비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로마 3,23 각주 참조). 루카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이 “주님의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시리라고 말한다(9,26; 21,27). 그러나 부활 때와(24,26) 그 이전의 거룩한 변모 때에(9,32) 이미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서는 “구원자”라는 칭호를 대부분 하느님께만 적용하고(신명 32,15; 1사무 10,19; 시편 24,5; 27,1.9; 62,2.7; 65,6; 79,9; 95,1 등. 그리고 루카 1,47; 1티모 1,1 각주 참조), 더러 ‘이스라엘의 판관들’에게도 붙인다(판관 3,9.15; 12,3; 느헤 9,27). 복음서에서는 여기와 요한 4,42에서만 예수님께 이 칭호를 부여한다(그러나 이 칭호가 파생한 동사는 병자들과 관련하여 여러 번 쓰인다. 마르 3,4; 5,23.28.34; 6,56; 10,52; 15,31과 병행구). 복음서 외에는 사도 5,31; 13,23; 에페 5,23; 필리 3,20; 2티모 1,10; 티토 1,4; 2,13; 3,6; 2베드 1,1.11; 2,20; 3,18; 1요한 4,14에서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불리신다. 이 칭호는 특히 그리스계 공동체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바오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가끔 사용한다. “주 그리스도”는 복음서에서 루카만 사용하는데, 그는 이로써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심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분께서 지니신 왕권의 신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의 직역: “(그분) 호의의 사람들.” 이 행이 다른 많은 수사본에는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호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천사들의 이 찬송을 두 줄로 된 병행구로, 곧 하늘과 땅, 하느님과 사람들, 그리고 영광과 평화가 대구(對句)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여 위와 같이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 “(하느님) 호의의 (대상인) 사람들” 곧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라는 이 표현은 쿰란의 문헌들에도 자주 나온다.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특권을 받은 이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0절에서처럼 선택된 백성이 될 수도 있고, 3,6에서처럼 루카의 보편주의적 전망 속에서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모든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메시아 시대에 펼쳐질 “평화”의 보증이다(이사 9,5-6; 52,7; 57,19; 미카 5,4. 그리고 에페 2,14-17 참조). “평화”에 관해서는 1,79 각주 참조.
그리스 말 본문에 ‘알려 주다’의 간접 목적어가 없다. 앞 절을 생각하면 마리아와 요셉이 되고, 다음 절을 고려하면 ‘사람들’이 된다. 이야기의 순서로는 앞의 것이 들어맞는다. 그러나 루카는 여기에서 벌써 예수님의 성탄 소식이 널리 퍼진 것으로 전제하고, 그 소식을 듣는 이들의 반응을 언급하려고 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간접 목적어를 생략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 대신에 “말”로 옮길 수도 있다.
“마음”에 관해서는 1,66 각주 참조.
‘곰곰이 되새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해석하다’를 뜻하기도 하는데, 헬레니즘 그리스 말에서는 신탁의 해석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쓰인다.
루카는 신적인 발현, 특히 기적이 일어나면 곁에서 그것을 본 이들이 하느님을 찬미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한다(5,25.26; 7,16; 13,13; 17,15.18; 18,43; 19,37; 사도 3,8.9; 4,21).
직역: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의 정결(례)의 날들이 차자.” 여기에서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 또는 부모가 될 수 있는데,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레위 12,1-8에 따르면 정결례는 산모에게만 해당된다. 아들을 낳을 경우에 산모는 마흔 날 동안 부정(不淨)하게 된다. 그 기간에는 거룩한 물건을 만지거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다.
율법에서는 아기를 직접 성전에 바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루카는 이로써 예수님의 부모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임무를 얼마나 큰 열성으로 수행하는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반면에, 세례자 요한을 성전에서 봉헌하였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복음서 저자는 더 나아가, 예수님의 이 봉헌을 사무엘의 봉헌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사무 1,11.21-28 참조).
여기에서 “사내아이”는 첫아들을 가리킨다.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의 직역: “주님을 위한 거룩한 것으로 불릴 것이다(= 불려야 한다).” 거룩하게 불림은 하느님의 소유가 됨을 뜻한다. 그렇다고 첫아들을 직접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아니다(22절 각주 참조). 이 법은(탈출 13,2.12.15) 맏아들/맏배의 대속(代贖)으로(탈출 13,13; 34,20), 곧 태어난 지 몇 달 안에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실행된다(민수 18,15-16). 루카는 예수님의 이 대속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39절은 그것을 시사한다.
이 제물은 산모의 정결례 때에 가난한 이들이 바치는 제물이다(레위 12,8).
예수님에 관한 시메온의 예언은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과 관련해서 한 예언과 짝을 이룬다(1,67-79). 그러나 시메온의 예언은 즈카르야의 예언과 달리,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킨다는 점을 드러내는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다. 즈카르야(그리고 한나)와 함께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시메온은, ‘구원자’의 오심을 반기면서 이 구원자가 수행할 사명의 몇 가지 새로운 면을 밝힌다.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의 직역: “이스라엘의 위로.” 이는 이사 40,1; 51,12; 61,2에 따른 것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킨다.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는 말은 구약 성경의 표현으로(민수 11,17.25.29; 2열왕 2,15; 이사 11,2; 42,1; 61,1; 에제 11,5), 시메온이 예언자임을 뜻한다.
“주님의 그리스도(= 메시아 = 기름부음받은이)”는 “주 그리스도”와 달리(11절 각주 참조) 그리스 말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전통적 칭호로 쓰이는 표현이다(1사무 24,7.11; 26,9.11.16.23; 2사무 1,14.16 등). 그러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옮기기도 한다(3,15 각주 참조).
“죽지 않으리라고”의 직역: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고.”
루카는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를 강조하면서도, 그분의 “부모”(41절, 43절)나 “아버지”라는 표현을 주저 없이 사용한다(33절, 48절). 후대의 필경사들은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이 용어들을 매우 자주 “마리아와 요셉”으로 대체시킨다.
“주님”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데스포테스인데, 후기 유다교, 특히 칠십인역에서 하느님을 가리키는 칭호로 자주 쓰인다. 키리오스와 뜻이 비슷하기 때문에 둘 다 “주님”으로 옮긴다.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다는 말은,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었으므로(26절 참조) 이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에 관해서는 1,69.71.77; 3,6 참조.
루카의 작품에서는(복음서와 사도행전) 다른 민족들의 구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이 구원은 파스카의 계시 이후에 가서야 분명하게 선포된다(24,27).
29-32절의 예언은 요한에 대한 즈카르야의 노래와(1,67-79) 짝을 이룬다. 그러나 즈카르야의 노래는 구약 성경의 시편들에서 영감을 받지만, 시메온의 예언은 제2이사야서의 어휘들을 이용한다. 이로써 예수님 안에서 베풀어진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루카는 예수님의 부모가 1,31-35와 2,11.14에 나오는 초기의 계시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온 신비를 통찰하지 못하였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는” 예수님의 상반된 역할에 관해서는 이사 8,14와 28,16; 루카 20,17.18 참조.
예수님은 “표징”이시다. 강제가 아니라 신앙에 따라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분이시다.
“영혼”은 여기에서도 1,46과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당사자 자신, 그 사람 전체를 가리킨다. 에제 14,17에서 영감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을 이 암울한 경고는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 앞에서 둘로 갈라지고, 마리아는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난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요한 19,25 참조).
예수님께서는 장차 가장 독실하다는 청중들의 뿌리 깊은 불신, 그들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다(5,22; 6,8; 9,47; 24,38). 그리하여 그분의 사명 수행은 ‘마음의 비밀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어진다(마르 7,6-8; 루카 16,15; 사도 1,24; 15,8).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그곳에서 계속 사는 것은 충실한 이스라엘인들의 이상이었다(시편 23,6; 26,8; 27,4; 84,5.11).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항구하게 섬기는 것에 관해서는 사도 26,7 참조. 루카는 하느님을 섬기고 기도하는 일을 항구히 하는 자세를 즐겨 강조한다(18,7; 사도 20,31 참조).
어떤 수사본과 몇몇 고대 문헌에는 예루살렘 대신에 이스라엘로 되어 있다. 아무튼 “예루살렘/이스라엘의 속량”은 하느님 백성의 구원을 뜻한다.
40절의 짧은 서술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1,80의 내용과 밀접하게 짝을 이룬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고유한 신비를 더 잘 드러나게 해 준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보다 더욱 강력한 뜻을 담고 있는 이 “지혜”가,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고유한 특성을 이룬다(2,52; 11,31; 21,15).
직역: “하느님의 총애가 그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세례자 요한의 역사에는 41-52절에 전개되는 일화에 상응하는 이야기가 없다. 루카는 이 선구자의 설교 이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을 소개하려는 것 같다. 이 말씀은(49절) 소년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게 되시면서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도 아셨음을 드러낸다.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야 한다(탈출 23,14-17; 34,22-23; 신명 16,16). 예수님 시대에는 그 이전과 달리 이러한 의무가 부인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유다교에서는 열세 살 때부터 율법 준수의 의무가 있었다.
“율법 교사”에서 “율법”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나중에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하시겠지만, 이들은 성전 바깥 뜰 회랑 또는 성전 안에 있는 회당에서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은 흔히 대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슬기로운 답변”의 직역: “슬기(또는, ‘이해’)와 답변.” 서양 말에는 예컨대 ‘금잔’(golden cup)을 ‘잔과 금’(cup and gold) 식으로 표현하는 중언법(重言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슬기와 답변”도 이러한 수사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말씀이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여기에서처럼 그분의 “아버지”가 중심을 이룬다(23,46. 그리고 24,49 참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는 모든 인간의 지성,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가장 잘 갖추어진 사람의 지성까지도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은 마리아와 요셉이 이 신비의 어떤 면을 조금이나마 알아듣게 된다는 사실도 가리킨다.
“마음”에 관해서는 1,66 각주 참조.
“키” 대신에 “나이”로 옮기기도 한다.
40절의 내용을 되풀이하는 이 맺음말은 1사무 2,26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