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마르코 복음서
1장
세례자 요한의 설교(마태 3,1-12; 루카 3,1-9.15-18; 요한 1,19-28)
하느님의 아드님1) 예수 그리스도의2) 복음의 시작.3)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4)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5)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6)
하고 기록된 대로,7)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9) 선포하였다.10)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11)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12)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13)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4)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5)”
세례를 받으시다(마태 3,13-17; 루카 3,21-22)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16)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17)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8)”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마태 4,1-11; 루카 4,1-13)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19)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20) 유혹을 받으셨다.21)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22)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23)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마태 4,12-17; 루카 4,14-15)
요한이 잡힌24)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2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26)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27)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28)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29)(마태 4,18-22; 루카 5,1-1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30)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31)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32)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33)”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34)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35)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36)(루카 4,31-37)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37)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38)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39)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40)”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41)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42)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43)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마태 8,14-15; 루카 4,38-39)
그들은44)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45)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마태 8,16-17; 루카 4,40-41)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46)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47)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48)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루카 4,42-44)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49)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50)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51)”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52)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53)(마태 8,1-4; 루카 5,12-16)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54)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55)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56)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57)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58) 증거가 되게 하여라.59)”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60)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그러나 이 칭호가 마르코 복음서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하시고(1,11; 9,7), 더러운 영들도 그것을 밝힌다(3,11; 5,7). 그러면서도 이 사실은 비밀로 남아야 했지만(34절 각주 참조), 결국 재판 과정에서 예수님 친히 이 칭호를 받아들이시고(14,61-62), 십자가 곁에서는 한 이교도가 그것을 고백하기에 이른다(15,39).
기름부음받은이를(시편 2,2 각주 참조) 뜻하는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곧 구세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는 이 칭호를 예수님께 부여하면서 새로운 의미로 이해한다(9,41; 12,35-37). 이 복음서에서 단 한 번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만, 이 사실을 더 이상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는다(8,29-30). 예수님께서는 재판을 받으실 때에야 비로소 이 칭호를 받아들이신다(14,61-6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대하여 사도들이 선포한 기쁜 소식을 가리킨다(로마 1,1 각주 참조). 그것은 먼저 구원과 구원의 선포를 시작하는 “하느님의 복음”(1,14; 로마 1,1)이다. 이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절과 로마 15,19)으로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다(1,14). 그러나 부활하신 뒤에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 복음 선포의 대상이 되신다. 이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으로(13,10; 14,9. 그리고 16,15 참조), 이를 위해서는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에게서처럼 희생과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8,35; 10,29). 사실 예수님의 삶과 업적 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행동은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계속 드러날 뿐만 아니라(4,14 각주 참조), 부활하신 주님 역시 그들과 함께 일하신다(16,20 참조).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복음의 시작”을 서술하려고 한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이 요한이 하는 설교의 중심은 단연 예수님이신데(1,7-8), 이러한 그의 활동 속에 이미 구약 성경의 약속을 실현시키시는(1,2-3) 하느님의 역사(役事)가 드러난다(11,29-33). 사도 1,22; 10,37 참조.
“사자”(使者)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과 그리스 말은 ‘천사’도 뜻한다(1,13; 8,38; 12,25; 13,27.32).
이 인용문은 칠십인역의 탈출 23,20과 말라 3,1을 섞은 것이다. 말라키서에 나오는 ‘주 하느님의 길’이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길’이 되는데, 하느님의 사자인 요한이 그것을 준비하는 사명을 받는다.
이 절의 인용문은 이사 40,3으로서, 이 구절이 여기에서는 메시아의 오심에 적용된다.
“기록된 대로”가 그리스 말 본문에서는 2절 첫머리에 들어 있다.
“세례자”의 직역: “세례를 주는 이.” 6,14.24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이 문장이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주며”로 되어 있다. 6,25와 8,28,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는 항상 “세례자 요한”으로 나온다. “광야”에 관해서는 마태 3,1 각주; 루카 3,3 각주 참조.
“세례”라는 낱말은 신약 성경에서 요한과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가리키지만, 본디는 유다교에서 제의적(祭儀的)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한 침수(沈水)나 세정(洗淨)을 뜻하였다(유딧 12,7; 집회 34,25; 마르 7,4; 히브 6,2; 9,10). 기원후 1세기 말부터는, 유다교에서 개종자를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행한 침수 예식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시대에는 이것이 여러 종교 운동 단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데, 예컨대 쿰란 공동체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곳에서는 장차 이루어질 근원적인 정화에 대한 기대 속에, 서원을 한 회원들이 날마다 침수로 자기 몸을 정화하였다(규칙서 2,25─3,12).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다르다. 이 세례는 심판의 때, 곧 시간이 찼을 때 행해질 세례에(8절 각주 참조) 대한 마지막 준비로서 모든 이에게 단 한 번 베풀어졌다. 그 전제 조건은 ‘회개’(마태 3,2 각주 참조)이고, 그 목적은 세례가 행해지는 그 순간에, 또는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될 때에 선물로 베풀어지는 ‘죄의 용서’(이사 1,16; 4,4; 에제 36,25에 나오는 이스라엘 정화의 약속 참조)이다.
‘선포하다’에 관해서는 마태 3,1 각주; 루카 3,3 참조. 복음을 공적으로 알리는 데에 자주 쓰이는 이 ‘선포하다’라는 말은(1,14; 13,10; 14,9; 16,15. 그리고 갈라 2,2; 콜로 1,23; 1테살 2,9 참조),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신 업적을 공포하기에(1,45; 5,20; 7,36), 그리고 예수님과(1,38.39) 그분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3,14; 6,12) 공적인 설교를 나타내기에 알맞은 동사이다. 여기와 7절에서는 요한이 하느님에게서 백성 전체를 위한 사명을 받았음이 시사된다. 곧 그의 선포를 통하여 구약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이다(3절의 “외치는 이의 소리” 참조).
‘고백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동사는 말로써 죄를 자백함을 뜻한다. 당시의 유다교에서는 특별한 기회에 죄를 고백하였다. 예컨대 속죄일의 의식 중에(레위 5,5-6; 26,40; 2역대 6,37; 느헤 1,6; 다니 9,20), 또는 계약 갱신례 중에 이러한 고백이 이루어졌다(에즈 10,1; 느헤 9,2; 쿰란의 ‘규칙서’ 1,21─2,1과 ‘다마스쿠스 문헌’, XX, 28-30). 죄의 고백은 용서를 받기 위해 하느님께 돌아감을 나타낸다(시편 32,5; 잠언 28,13; 루카 18,13-14; 야고 4,10; 1요한 1,9 참조). 그리고 이 고백은 사도 19,18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함께 언급되는 것으로 여겨진다(20절 참조).
2열왕 1,8에 나오는 엘리야의 옷차림 참조.
“능력”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육체적 힘’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 “능력”까지 가리킨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설교 전체가 ‘오시는 분’과 관련된다. 신분이 높은 사람의 행렬에서처럼, 앞에 가는 이와 뒤에 오는 이의 지위를 나타내는 이러한 표현은(1,17.20; 8,33.34 참조)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드러낸다. 뒤에 오시는 분이 진정으로 ‘더 큰 능력을’ 지니셨다는 것이다. 메시아가 지닌 능력은(이사 11,2; 49,25; 53,12; 외경인 ‘솔로몬의 시편’ 17,24) 예수님께서 사탄과 싸우실 때에 잘 드러난다(3,27 각주 참조).
앞에 가는 이는 뒤에 오는 이의 종일 따름이다. 사실 남의 신발(본디는, 샌들) 끈을 푸는 것은 노예나 하는 일이었다(요한 13,4-17 참조).
이 말은 물의 세례로 특징지어지는 요한의 활동과, 성령의 세례로 정의되는 메시아의 활동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강조한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서는 세례가 “성령”만이 아니라 “불”로도 베풀어진다고 말한다(마태 3,11 각주 참조).
세례자 요한이 예고한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등장하신다. 복음서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보다, 그것에 이어지는(10-11절) 하늘의 계시에 집중된다. 마르코는 예수님만이 이 계시의 유일한 증인이라고 말한다. 이 계시의 내용이 이후 이 복음서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로 청중 또는 독자들에게 제시된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그것이 천처럼 찢어졌다는 것이다(15,38 참조).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시려고 개입하신다는 표징이다(이사 63,19). 이 약속의 실현은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진다(외경인 ‘레위의 유언’ 18,6과 ‘유다의 유언’ 24,2 참조). 성령께서 예수님께 내려오심은 예수님께서 약속된 구세주이심을 드러낸다(이사 11,2; 42,1; 63,11 참조). 그리스 말 본문에는 “성령께서”가 아니라 “그 영께서”로만 되어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영을 가리킨다. 서양 말에서는 “영”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써서 이러한 사실을 표시하는데, 우리는 달리 방도가 없어 “성”을 붙인다. “비둘기”의 상징에 관해서는 마태 3,16 각주 참조.
후반부의 직역: “나는 너에게 호의를 가졌다.” 곧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마태 3,17 각주 참조). 이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히브리 말이나 아람 말과 같은 셈족 말에서처럼, 지속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로 옮긴다.
광야로 나가심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신 첫 번째 행동이다. 그분께서는 능력을 지닌 사탄과 맞서도록 광야로 보내지신 것이다.
그리스 말의 사탄은 (히브리 말 사탄과) 아람 말 사타나를 음역한 것이다. 이 낱말의 어원에 관해서는 욥 1,6과 각주 참조. 사탄 또는 마귀는 복음서에서, 하느님과 그분 나라의 건설에 반대하는 ‘원수’의 이름으로 가장 흔히 쓰이는 것들이다. 이 ‘원수’는 이 밖에도 베엘제불(3,22), 또는 벨리아르로도 불린다(2코린 6,15).
마태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지내신 기간 끝에 시련과 유혹을 받으시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마태 4,2 참조), 마르코 복음서에는 그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투쟁하시는 것으로 그려진다.
“들짐승들”은 여기에서 광야의 적막함을 강조하기 위하여(이사 34,11-15), 또는 메시아의 통치 아래에서 이루어질 세상의 조화를 미리 보여 주기 위하여(이사 11,6-9) 언급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천사들”의 “시중”은 하느님의 도움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이러한 시중은, 들짐승을 지배하는 것과 더불어,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에게 약속된 것이다(마태 4,6에 인용된 시편 91,11-12 참조).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시련을 이겨 내신 분으로 드러나신다.
“잡힌”의 직역: “넘겨진.” 이 동사에 관해서는 마태 4,12 각주 참조.
마르코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14-15절에서 그분 설교의 기본 주제를 밝힌다. “하느님의 복음”(로마 1,1; 15,16; 2코린 11,7)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쁜 소식만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의미한다. ‘하느님 복음의 선포’라는 말이 바로 사도들의 직무를 정의하는 표현이 된다(1테살 2,2.8-9 참조). 예수님께서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셨다는 말로, 마르코는 예수님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이 서로 연결됨을 강조한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정하신 시간이(13,20; 다니 7,22; 12,4-9 참조) 되었다는 말이다.
‘가까이 오다’에 관해서는 마태 3,2 각주 참조.
15절의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설교만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 이후에도 교회에서 계속되는 설교까지 종합하는 표현이다. 교회의 설교는 시간이 다 되었음을 강조하면서(갈라 4,4; 에페 1,10), 회개하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1테살 1,5-6.9; 2,13; 콜로 1,5-6). 다만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이, 부활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의 복음으로 바뀐다.
마르코 복음서도 이렇게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할 때에 이미 네 제자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장차 열두 명으로 이루어지는 제자단의 구성원으로서(3,13-19), 예수님에게서 파견을 받고(6,7-13) 그분의 사도가 된다(6,30). 마르코는 여기에, 독자들을 위한 어떠한 배려도 없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두 개의 짧은 이야기를(16-18절과 19-20절) 연이어 나열한다(세 번째 이야기는 2,14에 나온다). 그는 이 두 이야기를 동일한 틀에 따라 전개하여(1열왕 19,19-20 참조),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주도와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의 순종을 돋보이게 한다.
그리스 말 본문에는 “호수”가 아니라 “바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호수”를 가리키는 셈족 말식 표현 방식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바다”, 루카는 “호수”로 갈릴래아 호수를 일컫는다. 우리도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바다”로 되어 있는 본문을 계속 “호수”로 옮긴다.
“동생”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그냥 ‘형제’(동기)를 뜻한다. 다음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뒤로 오너라.”로 옮길 수도 있다.
“사람 낚는 어부”에 관해서는 마태 4,19 각주 참조. 구약 성경에서는(에제 12,13; 하바 1,15.17. 그리고 예레 16,16 참조) 고기잡이나 사냥에 쓰이는 “그물”이 대부분의 경우 징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용어가 여기에서는 열두 사도가 앞으로 수행할 사명에 적용된다. 곧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심판을 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된다(마태 13,47-50 참조).
‘따르다’에 관해서는 마태 4,20 각주 참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됨을 뜻한다. 또한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뒤따름은 그분과의 생활이 완전히 새로운 것임을 나타낸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의 직역: “제베대오의 야고보.”
마르코는 21-28절의 장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21-22절) 악령에 대한 그분의 승리가(23-26절)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는 “권위”(27절)를 한 번에 드러내는 같은 사건으로 연결시킨다.
“권위를 가지고”의 직역: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밖에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께서 가르치셨다는 사실과, 그분의 가르침이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는 사실은 가끔 언급된다(6,2; 10,26; 11,18. 그리고 7,37 참조). 그분에게서 드러나는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다(1,27; 2,10; 11,28-33. 그리고 13,34 참조). 이러한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대비된다. 율법 해석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면서 성경 전문가인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는 달리 성경 본문과 전통의 권위만 내세울 따름이다.
“더러운 영”은 마귀를 가리키는 데에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이러한 영의 활동이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거룩함에 반대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다. 사실 여기에서 이 악령은 예수님의 거룩함에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24절). 악령의 영향과 질병의 관계에 관해서는 32절 각주 참조.
직역: “저희에게와 당신께 무엇이?” 이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서(판관 11,12; 2사무 16,10; 19,23; 1열왕 17,18; 요한 2,4),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남의 간섭을 배척하거나, 다른 이와의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에 쓰인다. 병자의 입을 통해서 자기 동료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마귀는, 인간에 대한 자기의 권능이 끝에 다다랐음을 깨달은 것이다(루카 10,18; 묵시 20,10 참조).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온 거룩하신 분’, 또는 ‘하느님께 속한 거룩하신 분’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겠다. 하느님만이 거룩하시지만, 그분의 거룩함은 그분께 속하거나 그분께 봉헌된 이들에게도 부여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1절 각주 참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1절과 11절),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그 자체이시다. 유다인들은 메시아와 관련해서 이 칭호를 쓰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요한 6,69; 사도 3,14; 4,27.30 참조).
조용히 하라는 함구령에 관해서는 34절 각주 참조.
‘놀라다’ 동사는 22절에 나오는 것과는 또 다른 동사로서,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의 행동 또는 그분의 말씀이 불러일으키는 놀라움을 가리킨다(10,24.32. 그리고 9,15 참조).
“소문” 대신에 “명성”으로 옮길 수도 있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그(분께서)는”으로 되어 있는데, 본디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필경사들이 단수로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
직역: “…… 열이 그 부인을 떠났다.”
이 표현은 안식일이 끝났음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에 관해서는 마태 8,16 각주 참조. 마르코는 여러 번에 걸쳐 악령의 영향과 질병, 그리고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을 결부시킨다(1,34; 3,10-11; 6,13. 그리고 루카 6,18; 사도 5,16; 8,7 참조). 신약 성경에서 마귀들은 한 번도 독자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항상 그들이 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과 관련해서만 언급된다. 예수님의 활동이 그 영향에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그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다(루카 4,41 참조). 여기에서 마르코는 왜 예수님께서 마귀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시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분의 위대함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지만(1,27; 4,41; 6,14-16; 8,27-28), 마귀들은 그분께서 누구이신지 잘 안다(1,24; 3,11; 5,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이 하늘의 목소리를 통해 계시되고(1,11과 9,7), 또 그리스도교적 신앙으로 고백되지만(구세주,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아직은 이 비밀이 누설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1,25; 3,12). 예수님과 마귀의 대결이 공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로써 예수님의 특별한 권능이 밝혀지지만, 그 뜻이 밝혀지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르다는 것이다(44절 각주 참조).
“스승님”의 직역: “당신.” 40절에서도 마찬가지다.
“복음을”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선포하다’라는 동사만으로도 기쁜 소식의 선포를 나타낸다(1,39; 3,14). 1,14; 13,10; 14,9에는 “복음을”이 들어 있다.
카파르나움을 떠난 사실을 가리킨다. 이 말을,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신학적 의미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다.
‘선포하다’에 관해서는 4절 각주와 38절 각주 참조.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공적으로 드러내신 몇몇 특징적인 행동을 21-34절에 한데 모은다. 그러나 이 연장선 위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 여행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본보기 하나만을 전한다. 곧 “더러운 영”에 대한 승리와 비교되는(23절 각주 참조) ‘정화’(淨化)이다. 나병은 더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그 환자는 종교 공동체에서도 배제되었다. 이 “나병”에 관해서는 마태 8,2 각주 참조.
일부 수사본들에는 “무릎을 꿇고”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는 그리스 말로 한 동사인데, 어떤 주요 수사본에는 다른 동사, 곧 ‘화를 내다’로 되어 있다. 후자가 원문이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본디는 이 ‘가엾은 마음이 들다’ 동사가 잘못 쓰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여겨진다.
직역: “그러자 바로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나병을 고치는 것은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에 버금가는 행동으로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이러한 나병을 고침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음을 드러내는 표징으로서 죽은 이들의 부활과 함께, 메시아 시대의 은혜로 헤아려진다(마태 10,8; 11,5와 병행구). 이러한 연유로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함구령이 내려진다(함구령에 관해서는 34절 각주, 기적과 관련해서는 5,43; 7,36; 8,26 참조). 그러나 이 분부는 여기에서도(45절), 그리고 7,36-37에서도 지켜지지 않는다. 하느님 아드님의 권능이 발산되는 것을 결국에는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정화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들인지, 아니면 다른 일반 사람들인지 분명하지 않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관해서는 레위 14,2-32 참조. 병이 나은 나병 환자는,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제가 그 치유 사실을 공인한 다음에야, 다시 종교 공동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말하지 말라는 명령과, 이렇게 증거가 되게 예물을 바치라는 지시를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마르코 복음서에 자주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신원이나 그 활동이 갖는 공적인 면과 비밀 유지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메시아로 드러내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당신의 권위와 권능을 말씀과 행동으로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야기”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말(씀)’을 뜻하고, 2,2; 4,14-20.33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알리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선포하다’를 뜻하기도 한다(4절 각주 참조). 그래서 병이 나은 이 사람은 복음 선포자들을 예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5,19-20; 7,36 각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