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마태오 복음서
26장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마르 14,1-2; 루카 22,1-2; 요한 11,45-53)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1) 모두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이 지나면 파스카인데,2)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3)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4)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 가운데에서 소동이 일어날지 모르니 축제 기간에는 안 된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5)(마르 14,3-9; 요한 12,1-8)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6)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7) 가지고 다가와, 식탁에 앉아 계시는8)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9)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불쾌해하며 말하였다. “왜 저렇게 허투루 쓰는가?
저것을 비싸게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10)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11)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12)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마르 14,10-11; 루카 22,3-6)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13)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14)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15)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마르 14,12-16; 루카 22,7-13)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16)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17)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18)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20)(마르 14,17-21; 루카 22,21-23; 요한 13,21-3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21)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22)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23)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24) 하고 대답하셨다.
성찬례를 제정하시다(마르 14,22-26; 루카 22,14-20; 1코린 11,23-25)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25)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26)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28) 마실 그날까지,29)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30)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마르 14,27-31; 루카 22,31-34; 요한 13,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31)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32)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33)”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34)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35)(마르 14,32-42; 루카 22,39-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니라는 곳으로36) 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다음,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그때에 그들에게 “내 마음이37)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38)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39)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40)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41)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42)” 하시고,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43)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감겨 자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시고 다시 가시어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돌아와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44)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45) 가까이 왔다.”
잡히시다(마르 14,43-50; 루카 22,47-53; 요한 18,1-11)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46)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47)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서 그분께 입을 맞추었다.
예수님께서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48)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그들이 다가와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49)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50)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51)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에게도 이렇게 이르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52)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53)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시다(마르 14,53-64; 루카 22,54.66-71; 요한 18,12-14.19-24)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카야파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54) 그곳에는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모여 있었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까지 가서, 결말을 보려고 안뜰로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았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거짓 증언을 찾았다.55)
거짓 증인들이 많이 나섰지만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이자가 ‘나는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56)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대사제가 일어나 예수님께, “당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57) 대사제가 말하였다. “내가 명령하오.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58) 밝히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59)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60)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61)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에 대사제가 자기 겉옷을 찢고62) 이렇게 말하였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63)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방금 여러분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자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다(마르 14,65; 루카 22,63-65)
그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을 주먹으로 쳤다. 더러는 손찌검을 하면서,
“메시아야,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하였다.64)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65)(마르 14,66-72; 루카 22,55-62; 요한 18,15-18.25-27)
베드로는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하녀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하고 부인하였다.66)
그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에 있는 이들에게, “이이는 나자렛 사람67)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68)”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69)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말씀들”은 복음서 저자가 주로 실천적인 목적으로 특히 24─25장에 한데 모은 여러 가지 말씀을 가리킨다(7,28 각주 참조).
파스카에 관해서는 마르 14,1 각주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닥쳐오는 위험을 더 이상 피하지 않으시고(12,15; 14,13 참조) 당신의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신다. 이 운명을 직접적인 말투로 예고하실 뿐만 아니라, 파스카 축제와 결부시키심으로써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신다.
“사람들에게”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넘겨져”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동사가 앞의 수난 예고에서는(17,22; 20,18) 미래로 쓰인 반면에, 여기에서는 현재로 쓰인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함께 이제 수난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였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사람들에게 넘기셨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로마 4,25; 1코린 11,23).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넘기셨음이 강조되기도 한다(갈라 2,20; 에페 5,2).
요한 11,49와 18,14처럼 마태오 복음서도 카야파가 수행한 역할을 부각시킨다. 이 인물은 한나스의 사위로서(루카 3,2; 요한 18,13), 기원후 18년에서 36년까지 “대사제”, 곧 유다교 사제단의 최고 우두머리이며 최고 의회의 의장이었다. 마태오는 또 “백성의 원로들”을, 사제 계급에서 가장 높은 직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최고 의회 의원으로 봉직하는 “수석 사제들”(2,4 각주; 사도 4,6 참조)과 결부시킨다. 이제 수난 이야기에는 바리사이들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마태오는 마르코처럼, 요한 12,1-8에 따르면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일어난 일화를 수난 이야기 안에 배치시킨다. 이렇게 삽입함으로써, 마태오는 예수님에 대한 모의의 배경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16절; 루카 22,1-6), 예수님께서 당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상황을 통제하시고 또 장차 온 세상에 퍼질 “복음”의 미래에 관해서도 확신을 갖고 계심을 드러낸다(12-13절).
“나병 환자 시몬”에 관해서는 마르 14,3 각주 참조.
“옥합”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설화 석고로 만든 병이나 조그마한 단지를 뜻한다.
“식탁에 앉아 계시는”의 직역: “(식탁 앞에 비스듬히) 드러누우신.” 당시 일부 계층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관습에 따라 이러한 자세로 식사를 하였다.
마태오는 마르코에 비해 이야기를 비교적 간략하게 전개한다. 곧 향유의 이름이라든가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린 일은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향유를 붓는 것은 장례 의식의 일부로 해석된다(12절). 장례는 후기 유다교에서 권장하는 선행 가운데 하나이다(토빗 1,17-19; 사도 9,36 참조). 유다교 라삐들에 따르면 다른 이들을 장사 지내 주는 일은 자선과는 달리 개인적인 투신이 요구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산 이들은 물론 부유한 이들과 죽은 이들에게도 베풀 수 있는 선행이다(25,35-45; 마르 15,42-47; 사도 8,2 참조).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를 장사 지내 주는 것과 같은 선행을 자선보다 높이 평가하는 유다교의 고전적인 교리를 상기시키시는 것이다. 그리고 향유를 붓는 이 선행은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 ‘곁에 계시지’ 않을 것이기에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당신 사이의 어떤 선후 관계에 대한 원칙을 여기에서 제시하시는 것은 아니다.
“복음”에 관해서는 마르 1,1 각주 참조. ‘복음 선포’에 관해서는 마태 24,14 각주 참조.
이스카리옷에 관해서는 10,4 각주 참조.
“내주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의 뜻이 분명하지 않다. “지불하기로 합의하였다”, “제시하였다” 등으로 옮길 수도 있다. “은돈 서른 닢”은 탈출 21,32에 따르면 남의 종이 자기 소에게 받혀 죽었을 때에 지불하는 금액이다(즈카 11,12와 각주도 참조).
“예수님을 넘길” 대신에 “예수님을 배신할”로 옮기기도 한다. ‘넘기다’는 그리스 말에서 2절에 나오는 ‘넘겨지다’의 능동태이다. 이에 관해서는 2절 각주 참조.
“스승님”의 직역: “당신.” 33절과 35절에서도 마찬가지다.
“무교절”과 “파스카 음식”에 관해서는 마르 14,12와 각주 참조.
‘때가 가까웠다.’는 말은 정해진 “때”(8,29 참조)에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됨을 가리키는 신학적 표현이다. 이때는 바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또 영광을 받으시는 때이다(요한 7,30; 13,1 참조).
마르코와는 달리 마태오는 (심부름을 가는 두 제자,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이 층 방의 상태, 집주인에 관한 언급 등) 세부 사항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님께만 집중된다(2절 참조).
이 이야기는 세 단계로 전개된다. 먼저 예수님께서 누군가 당신을 배신하리라고 예고하신다(21-22절). 이어서 배신자를 가리키는 범위가 좁혀지고(23-24절), 마침내 배신자 유다가 드러난다(25절).
“빵을”은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대접에 담긴 과일 소스에 빵이나 채소를 찍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공동 식사는 그 참석자들이 친밀한 관계, 밀접한 공동체를 이룸을 의미한다. 이로써 유다의 배신이 더욱 두드러진다. 마태오는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시편 41,10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다(마르 14,20 각주 참조).
직역: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를 통하여 사람의 아들이 (팔아)넘겨지는 그 사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저주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으시고, 오직 그가 처한 불행한 상황을 확인하실 따름이다(23,13 각주 참조).
“스승님”에 관해서는 23,7 각주 참조.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 호칭이 예수님의 적대자들과 관련해서만 쓰인다(23,7.8; 26,49).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는 표현이 부정인지 긍정인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된다. 대부분의 학자는 여기에서 긍정으로, 곧 ‘맞다. 네가 배신자임을 스스로 밝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 절 전체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온다.
직역: “부수어.”
“이는 내 몸이다.”는 예컨대 ‘빵이 부수어지듯이 내 몸도 부수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예수님의 몸과 빵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 먹어라.”라는 말씀은 더 깊은 뜻을 지닌다. 한편, ‘-이다’만 가지고 빵과 몸의 동일성을 확립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이 동일성의 성격을 명확히 하려면 빵과 포도주에 관한 말씀을, 이 말씀을 하신 분,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가 펼쳐지는 최후의 만찬과 결부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이 만찬의 파스카 분위기(28절 “계약의 피” 참조), 그리고 제사의 의미에(28절 “많은 사람을 위하여” 바쳐지는 피 참조)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옛날 시나이에서 희생 제물들의 피로 체결된 ‘계약’(탈출 24,4-8)을 성취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써, 예언자들이 예고한 “새 계약”(예레 31,31-34)을 당신께서 완수하신다는 점을 함축적으로 선언하신다. 또 “많은 사람”을 위한, 곧 히브리 말과 아람 말을 포함한 셈족 말식 표현에 따르면 인류 전체를 위한(이사 53,12 참조) 보편적 가치를 공포하신다. 마태오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라는 말씀을 덧붙인다. 이로써 자기가 생각하는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하는 것이다.
“새 포도주를”(새것을) 대신에 “새롭게”(곧 ‘새로운 성격으로’ 또는 ‘새로운 형식으로’)로 옮길 수도 있다.
“그날”은 세상 종말의 날을 말한다.
유다인들은 시편 114편 또는 시편 115─118편을 감사의 마음으로 부름으로써 파스카 식사를 끝냈다.
직역: “…… 모두 나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다”(5,29 각주 참조). “……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 모두 나에 대한 믿음을 잃을 것이다.”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제자들은 메시아께서 승리하시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16,22; 20,21), 예수님께서는 비참하게 처형을 당하신다. 이러한 사실이 모든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즈카 13,7을 인용한 것이다.
이 말씀에 관해서는 마르 14,28 각주 참조.
31절 각주 참조.
마르코는 메시아의 “시간”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조명하고(마르 14,35),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상반된 모습을 부각시킨다(마르 14,40). 이와 달리 마태오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일화가 지니는 그리스도론적인 면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곧 메시아의 완전한 순종(마태 26,42), 그리고 이차적으로, 유혹 중에 바치는 기도의 전형을(루카 22,40.46 참조) 강조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기도의 강렬함을 드러낸다(루카 22,44 참조).
겟세마니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올리브) 기름 짜는 확’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곳”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울타리나 담이 둘러쳐진 소유지를 가리킨다.
“마음”에 관해서는 마르 14,34 각주 참조.
‘거룩한 변모’ 때에도 곁에 있던 제자들(17,1-9)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같은 괴로움(1열왕 19,4 참조), 고통받는 ‘의인’의 괴로움(시편 31,23; 61,3; 116,3 참조) 속으로 빠져드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편 42,6과 칠십인역에 따른 요나 4,9를 상기시킨다.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은 경배의 자세이다(창세 17,3 참조).
직역: “저의 아버지.” 42절 부름말도 마찬가지다.
“유혹”에 관해서는 6,13 각주 참조.
직역: “영은 준비가 되어 있지만 육은 약하다”(마르 14,38 각주 참조).
이 기도에 관해서는 6,10 각주 참조.
이 말씀의 번역에 관해서는 마르 14,41 각주 참조.
“나를 팔아넘길 자가” 대신에 “나의 배신자가”로 옮기기도 한다.
입 맞추는 것은 여기에서 어떤 애정이 아니라 스승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인사이다.
23,7 각주 참조.
직역: “친구야, 네가 (여기에) 하러 온 일.” “친구”라는 호칭에 관해서는 20,13 각주 참조.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이 문장은 생략된 말이면서 흔히 쓰이던 표현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기에 다른 동사를 보충하여 이해해야 한다. 첫째 가능성은 위의 번역처럼 “-을 하여라”를 덧붙이는 것이다. 이 경우, 예수님께서는 유다와의 인사를 간단히 마치시면서, 당신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당신을 둘러싼 상황을 직접 통제하신다는 점을 드러내신다. 둘째 가능성은 “-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신다는 점을 표현하는 동사를 덧붙이는 것이다.
직역: “…… 예수님께 손들을 던져 잡았다.”
“칼을 빼어 들고”의 직역: “손을 뻗고 자기의 칼을 빼어.”
“군단”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로마 군대의 한 단위로서,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는 약 6,000명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단에는 보통 같은 수로 이루어진 보충 부대가 뒤따랐다.
“강도”는 ‘폭도’(우두머리)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부터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평화로운 예수님께서 강도나 폭도처럼 취급을 받으시고 또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27,38.44).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 대신에 “예언자들의 글들”로 옮길 수도 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뒷날) 아침에 최고 의회에 출두하신 일과(루카 22,66에 따르면 이 일만 일어난다.) 그날 밤 전직 대사제인 한나스 집에서 취조받은 일을(요한 18,12-27) 합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카야파의 저택으로 소집된 “최고 의회”(5,22 각주 참조)가 전부 나서서 “거짓 증언”을 찾는다. 이로써 마태오에 따르면(마르 14,55 참조) 엉터리 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당신께서 성전의 파괴자 역할을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24,2-3; 요한 2,19; 사도 6,14 참조). 마태오는 마르코처럼 돌로 된 성전과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예언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마르 14,58 각주 참조). 당신께서 “하느님의 성전”의 주인이시라고 과감히 선언하시는(“나는 …… 수 있다.”)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존엄성을 부각시킬 따름이다.
예수님께서 입을 전혀 열지 않는 ‘주님의 종’처럼 하셨다는 것이다(이사 53,7; 사도 8,32).
메시아 대신에 그리스도로 옮기기도 한다. 68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이 대답에 관해서는 25절 각주 참조. 여기에서는 (아마도 메시아와 관련된 유다인들의 여러 가지 승리주의적인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마르 14,62 참조). 베드로의 고백에서와(16,16) 같은 용어들로 표현된 대사제의 결정적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서에서처럼 단순히 “그렇다.”라고 수긍하지 않으시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대답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모호한 상황 속에 놓이기를 거부하시며, 천상적 존재인(다니 7,13) 사람의 아들의 재림과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게 되어 있는(시편 110,1; 마태 22,44) 다윗 자손의 특권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 대답의 참뜻을 밝히신다.
“전능하신 분”의 직역: “권능.” 유다인들은 이러한 추상 명사로써 하느님을 에둘러 표현하였다.
“구름을 타고”의 직역: “구름 위에.”
옷을 찢는 것에 관해서는 마르 14,63 각주 참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는 않으셨지만(64절 각주 참조), 당신께서 신적 지위에 해당하는 존엄성을 지니셨다고 하심으로써, 그 대답이 신성 모독으로 판결되는 것이다.
루카 복음서와(22,63) 요한 복음서에(19,3) 따르면 예수님께 폭행을 한 것은 군사들인데, 마태오 복음서의 이 본문에서는 최고 의회 의원들이 직접 그러한 능욕을 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이러한 모욕에 관해서는 이사 50,5-7 참조.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화가(58절과 69-75절) 예수님께서 최고 의회에 강제로 출두하신 이야기의 앞뒤 틀을 이룬다. 그럼으로써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주님 앞에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베드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예수님을 가까이 두고서도 자기의 신앙을 부정한다.
72절에도 나오는 ‘부인하다’는 그리스 말에서 34절과 75절에 나오는 ‘모른다고 하다’와 같다.
“나자렛 사람”에 관해서는 2,23 각주 참조.
직역: “당신의 말씨가 당신을 분명히 드러내오.” 같은 아람 말을 쓰면서도 갈릴래아 사람들은 문법이나 발음이 예루살렘의 아람 말과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베드로가 이러한 갈릴래아 사투리를 직접 썼을 수도 있고, 예루살렘 말을 하였지만 말씨가 갈릴래아 출신임을 바로 드러내었을 수도 있다.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의 직역: “저주하고.” 주로 남에게만 저주를 하는 우리말의 관습과는 달리, 여기에서는 자기를 조건부로 저주하는 것을 뜻한다. 곧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이면 (하늘에서 오는)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