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마태오 복음서
5장
산상 설교 (5-7장)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3)
참행복4)(루카 6,20-2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7)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8)
그들은 땅을9)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10)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11)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12)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13)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14)”
세상의 소금과 빛(마르 9,49-50; 루카 14,34-35)
“너희는 세상의15) 소금이다.16)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17)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18)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19)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20)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21) 왔다.
내가 진실로22)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23)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24)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25)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27)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화해하여라
“‘살인해서는 안 된다.28)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29) 옛사람들에게30)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31)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32)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33) 넘겨지고, ‘멍청이!’라고34)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35)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36)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37)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38)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극기하여라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39)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40)
네 오른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41)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42)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19,9; 마르 10,11-12; 루카 16,18)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43)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44)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정직하여라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45)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46)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47) 나오는 것이다.48)”
폭력을 포기하여라(루카 6,29-30)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49)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50)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51)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52)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53)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28.32-36)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54)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55)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56)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57)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8)”
마태오는 5─7장을 루카처럼(6,20-49), 그리고 더러는 루카 복음서와 비슷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여러 말씀을 모아,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는 하나의 ‘시작 연설’로 꾸며 놓았다. 이 산상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대헌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마태오 복음서 전체의 위치에서 볼 때에 단순히 그렇게 부르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다. 여기에는 곧 십자가와 성찬례와 부활, 그리고 교회와 성령 등,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들이 아직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은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17,1 참조). 이 “산”은 곧 구약 성경의 시나이 산을, “예수님”은 모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모세는 산 위에서 하느님의 계명이 적힌 판을 받고 내려오는 데 반하여,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신 다음 마치 옥좌에 좌정하시듯 자리를 잡고 앉으시어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가르치시고 명령을 내리신다. “제자들”은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으로 오른 이스라엘의 원로들을(탈출 24,1),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모든 고통을 낫게 해 주신 “그 군중”은 시나이 산 아래에 정렬해 있던 하느님의 백성을 상기시킨다.
마태오는 산상 설교를 하나의 가르침으로 제시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미 선포하시고 나서, 그것에 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이 ‘행복 선언’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특정한 은혜를 받은 이에게 축하하거나(13,16; 16,17) 특정 범주에 드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에(11,6; 루카 11,28. 그리고 루카 6,20 각주 참조) 쓰여 온 고전적인 방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을 이용하여, 어떠한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가장 유리한 상황에 있는지를 밝히신다. 마태오는 루카처럼 두 종류의 행복 선언을 여기에 모아 놓는다. 첫째는 인간의 가난과 품행을 중심으로 한다(5,3-9). 둘째는 박해와 관련되는데(5,10-12) 앞의 것과는 다른 상황에서,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활 후반부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마태오와 루카가 전하는 두 가지 행복 선언은, 예수님께서 친히 수행하신 예언자적 단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덕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신 메시아로 드러내신다. 이들이 곧 하느님께서 선호하시는 이들로서(11,5 참조), 현세에서는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으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사람들이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미래의 하늘과 현재의 땅을 대비시키듯이,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을 대비시킨다. 반면에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내적인 가난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필수 조건이라고 밝힌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 관한 이 두 가지 해석은, 그러한 선언을 하시고 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시는 예수님과 직접 결부될 때에만 그 참뜻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이”의 직역: “영이”, 또는 “영으로.” 이 “영”은 성령도 아니고 인간의 지성도 아니다. 8절의 “마음”처럼 한 인간의 중심, 더 나아가서는 그 인간 전체를 뜻한다(시편 34,19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영적 시련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에만 의지하도록 단련을 받은 대가족의 일원이 된다(시편 40,18 “나는 가련하고 불쌍하지만 / 주님께서 나를 생각해 주시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사람들이 고대하는 메시아시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징으로서, 기적과 함께 바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 선포를 제시하신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4절과 5절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우울한 사람도 아니고, 현세에서 사회적 억압의 희생물이 되어 이승에서 보상의 원칙에 따라 변상을 받게 되는 사람도 아니다. 인간을 그 고난에서 구원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인 ‘최종적 위로’를 고대하는 이들이다(이사 61,2; 루카 2,25 참조).
“가난한 사람들”처럼 “온유한 사람들”도, 단순히 성품이 그러하다는 것보다, 냉혹한 사회적·종교적 여건으로 불가피하게 그리된 사람들을 일컫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도 바로 그러한 사람으로 드러내신다(11,29; 21,5).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그러해야 한다(2코린 10,1; 갈라 5,23; 티토 3,2; 1베드 3,16).
여기에서 “땅”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약속의 땅’을 뜻한다. 시편 37,11(“가난한 이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참조.
이 “의로움”은 종말의 구원을 뜻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아니다(종말의 구원에 관해서는 늘 깨어 기다리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정의만도 아니다. 그것은 나날이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오는 행위의 의로움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 정의의 근원이다(5,20 참조).
“마음이”는 “마음으로”라고도 옮길 수 있다. 이 “마음” 역시 3절의 “마음”처럼(그곳의 각주 참조) 한 인간의 중심을 가리킨다. 성경에 나오는 “마음”의 뜻에 관해서는 루카 1,66 각주 참조. 여기에서 마음의 순수성은 도덕적 완벽성이 아니라 인격의 올바름을 뜻한다. 복음서들은 이를 ‘단순함’이라는 용어로도 표현한다(6,22 각주 참조).
이스라엘인들이 속한 셈족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는 것은, 본디 자녀가 아닌데 그냥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거짓으로”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박해를 받는 이들에 대한 일반적 행복 선언에(10절) 이어, 11-12절에서는 이 선언이 제자들에게 적용되고, 아울러 전에 박해를 받은 이들도 기억된다. 이러한 면에서 제자들은 예언자들의 후계자이기도 하다(10,41; 13,17; 23,34 참조).
그리스 말에서는 14절의 “세상”과 다른 낱말로서 “땅”으로 직역할 수 있지만, 우리말 번역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이 이미 관용구로 굳어져 있어 둘 다 “세상”으로 옮긴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욥 6,6) 음식을 보존하는 특성을 지녀(바룩 6,27), “소금 계약”(민수 18,19; 2역대 13,5)처럼 어떠한 약속이나 계약의 항구한 가치를 의미하기에 이른다. 마태오는 제자 또는 신앙인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마르 9,50; 루카 14,34) 나름대로 해석한다. 곧 제자나 신앙인은 사람들의 세상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 안에 보존하고 또 그 세상에 ‘살맛’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쓸모가 없어 밖에 내버려질 수밖에 없다.
“함지”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8-9리터 정도 되는 용량과 동시에 용기도 뜻한다. 우리말에서는 통상 “됫박”으로 옮겨 왔는데, 이것이 용기나 용량을 뜻하기는 하지만 그리스 말에 비해 그 양이 너무 적다. 그래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함지”가 나은 것으로 판단된다. “속이” 대신에 “밑이”로 옮길 수도 있다.
옛날 근동에서 일반 사람들의 “집”은 단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착한 행실”의 몇 가지 본보기를 이 산상 설교가 제시하기도 한다.
“예언서들”의 직역: “예언자들.”
‘완성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예컨대 1,22에서처럼) ‘이루다’, (13,48; 23,32에서처럼) ‘채우다’(23,32에서는 우리말 특성상 ‘마저 하다’로 옮긴다.)를 뜻할 수 있다. 산상 설교의 문맥은 이 말을 여기에서 두 번째 뜻으로 이해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예언자들의 말씀이 단순히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그 말씀들을 완성으로 이끌어 종교 생활의 법전 곧 율법에 참뜻을 부여하려고 하신다. 그리하여 율법이 근원적인 완성에 이르고 또 애초의 단순성을 다시 찾게 만드신다(20절 참조).
“진실로”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히브리 말 아멘을 그냥 음역한 것이다. 다음에서도 계속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아마도 ‘내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룰 때까지’나 ‘나의 제자들이 모든 계명을 실행할 때까지’가 아니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를 뜻할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은 율법은 그 모든 권위를 계속해서 간직한다.
“자”에 해당하는 말은 그리스 말 알파벳의 요타(ι)로서, 여기에서는 본디 히브리 말이나 아람 말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글자를 가리킨다. “획”의 직역: “작은 뿔.” 히브리 말 자음 위에 쓰이는 표지라고 여겨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말씀의 의미는 율법의 어떠한 세부 사항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 대신에 “이 가장 작은 계명들 가운데에서 하나”로, “어기고” 대신에 “폐기하고”로 옮길 수도 있다.
‘불리다’에 관해서는 9절 각주 참조. “가장 작은 자”나 “큰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어떤 지위나 계급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미 유다교의 라삐들도 사용하였는데, 이로써 그들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행위의 잘잘못을 가렸다. 예수님의 말씀도 일차적으로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서 “의로움”은 6절과 10절에서처럼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제자들의 충실성을 뜻한다. 그러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것과는 달리 새로운 충실성,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이 율법에 부여하신 권위에(7,29) 따른 해석으로 새롭게 되고 또 더욱 절박하게 된 충실성을 말한다. 이 “의로움”은 앞의 6절과 10절 외에 3,15; 6,1.33; 21,32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예컨대 개인적인 복수처럼 십계명이 금하는 고의적 “살인”을 말한다(탈출 20,13; 신명 5,17).
이 문장은 구약 성경에 그대로 나오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나오는 여러 징벌을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요약하시는 것이다(탈출 21,12; 레위 24,17; 민수 35,16-18; 신명 17,8-13).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재판”은 결국 하느님의 재판을 말한다(로마 1,32 참조).
“옛 사람들”은 모세와 그 후대의 사람들, 곧 유다인들의 조상들을 가리킨다.
일부 수사본들에는 이 말 다음에 “까닭 없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바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머리가) 빈 놈’이라는 아람 말의 욕을 음역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고 의회”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쉬네드리온인데, 이 그리스 말을 아람 말로 옮긴 산헤드린이라는 용어가 아직도 더러 쓰인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는 모두 71명으로 이루어진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가 있었고, 지방 여기저기에는 23명으로 이루어진 ‘의회’가 있었다(10,17 각주 참조).
“멍청이” 역시 “바보”처럼 그 자체로서는 평범한 욕이지만, 유다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매우 심한 욕설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곧 ‘하느님도 모르는 놈’ 식의 욕이 된다는 것이다.
“지옥”은 그리스 말로 게헨나인데, 이는 히브리 말 벤 힌놈에서 유래한다. 이곳은 본디 예루살렘의 골짜기로서, 옛날 유다인들이 여기에서 몰록이라는 우상에게 자식들을 죽여 바치곤 하였다(2역대 28,3; 33,6). 유다 왕국의 요시야 임금이 종교 개혁을 하면서 그러한 우상 숭배를 폐지한 뒤로는(2열왕 23,10) 쓰레기장으로 변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곳은 저주의 상징(예레 7,31; 19,6), 묵시 문학에서는 더 나아가서 영원한 저주의 상징이 된다. 마태오 복음서에 열 번 나오는 이 용어가 신약 성경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지옥”으로 많이 번역된다.
“법정으로”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직역: “네가 감옥에 던져질 것이다.”
“닢”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라틴 말 콰드란스에서 온 코드란테스이다(마르 12,42 각주 참조). 한 콰드란스는 1/4아스이고 한 아스는 참새 두 마리 값이다(10,29 참조).
탈출 20,14; 신명 5,18을 가리킨다.
옛날 유다에서는 약혼도 혼인과 똑같은 법적 효력을 지녔다. 그래서 “여자”는 혼인한 여자만이 아니라 약혼한 여자까지 포함된다(1,20.24; 5,31; 14,3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모든 욕망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라도 남의 아내를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적극적인 탐욕을 단죄하시는 것이다.
‘죄짓게 하다’의 직역: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하다’(이사 8,14-15; 로마 9,33; 1베드 2,8 참조).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나 계기는 많다. 먼저 예수님 자신이 그러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11,6; 13,57; 15,12; 17,27; 26,31-33). 그리고 다른 사람(5,29; 16,23; 18,6-9), 세상(13,41; 18,7), 박해도(13,21; 24,10)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눈”이나 다음 절에 나오는 “손”은 마음이 결정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기관이다. 그래서 지체를 빼거나 잘라 버리라는 말은 곧 그러한 마음을 그렇게 하라는 뜻이 될 것이다(12,34 참조).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예수님의 진지한 말씀을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신명 24,1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도 19,9에서처럼, 현대적 의미의 이혼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버릴 수 있던 옛날 법을 말한다.
마르코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병행구에는,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한다는 예외가 들어 있지 않다(마르 10,11; 루카 16,18). 여기와 19,9에서 “불륜”은 주로 세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경우, 마태오 복음서의 이 본문은 남편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를 내보내도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남편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인지는 제시되지 않는다. 둘째는 ‘간음’이다. 셋째는 무엇보다도 레위 18,6-18의 법에 따른 불법적 부부 관계이다. 이 셋째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레위 18장에서 예견된 불법적 관계 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내를 버리는 일을 금하시는 것이 된다. 큰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이 ‘마태오의 예외 규정’은, 아내를 내보내는 행위를 완전히 금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서 저자가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킨 것일 수 있다. 1코린 7장의 배경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이러한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가 맞는다 할지라도, 마태오의 이 본문 역시 혼인의 근본적인 불가 해소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둘째 의미를 받아들여, 이 본문을 간음의 경우에 이혼이 가능함을 확인해 주는 바탕으로 여긴다.
레위 19,12; 민수 30,3; 신명 23,22를 섞어서 인용한 말씀이다.
직역: “너희의 말이 ‘예.’는 ‘예.’, ‘아니요.’는 ‘아니요.’여야 한다.”
“악에서” 대신에 “악한 자(= 사탄)에게서”로 옮길 수도 있다.
야고 5,12에 보존된 다른 전통에 따르면, 입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인들의 말투를 고려할 때, 이 마태오 복음서 본문은 그보다, ‘너의 말은 무슨 맹세로써 강조할 필요 없이 참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탈출 21,24(21,25 각주 참조); 레위 24,20; 신명 19,21을 인용한 말씀이다.
이는 악에 대한 무저항(無抵抗)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맞서다’는 여기에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뜻한다. 때로는 ‘반대하고 나서다’로도 번역되는 이 동사는 루카 21,15; 사도 13,8; 로마 13,2; 갈라 2,11; 야고 4,7; 1베드 5,9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 시대의 근동에서는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아주 모욕적인 행위였다.
남의 “속옷”을 요구하는 것부터가 터무니없는 짓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요구에도 결코 맞서지 말고 “겉옷”도 내주라고 말씀하신다. “겉옷”은 밤에 이불로도 쓰였다. 그래서 율법은 그것을 담보로 잡을 경우에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한다(탈출 22,25; 신명 24,12).
“천 걸음”(또는, 천 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라틴 말에서 온 것으로, 로마의 거리 측정 단위였다(약 1500미터). 이 라틴 말, mi(l)lia에서 영어의 ‘마일’이 유래한다. 이는 아마 로마의 군사나 관리가 장비를 나르게 하려고 유다인을 징발할 수 있는 거리였을 것이다.
첫째 문장은 레위 19,18에서 따온 것이다(마태 19,19; 22,39와 병행구; 로마 13,9; 갈라 5,14; 야고 2,8 참조).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은 구약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컨대 쿰란 공동체에서, ‘빛의 자녀들’에 속하지 않는 자들은 미움을 받게 되어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의 이 구절에서도 아마 종교 공동체의 원수를 가리킬 것이다(시편 31,7; 139,21; 로마 5,10; 2테살 3,15. 그리고 마태 5,10.44에 나오는 박해에 대한 시사 참조). 그래서 이러한 종교 세계에서의 증오는 개인적인 격정보다는 집단적인 대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6,24; 10,22; 24,9-10 참조).
‘하느님의 자녀가 됨’은 신앙인들의 실존 전체가 새로운 상태나 새로운 신분으로 넘어감을 뜻한다.
“상”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자주 쓰이는데, 여기에서처럼 잘한 일에 대한 상에서부터(5,12.46; 6,1.2.5.16) 노동에 대한 “품삯”에 이르기까지(20,8) 폭넓은 의미를 지닌다(10,41-42의 “예언자가 받는 상”과 “의인이 받는 상”도 참조). 5장과 6장에서는 특히 ‘인간의 상과 하느님의 상’ 사이의 대립이 강조된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받는 상(또는, 보답이나 품삯)’이라는 인간적인 표현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상”은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선하심에서만 나오는 것이다(20,15 참조).
당시의 “세리들”은 일반 대중에게 경멸을 받았다. 그들은 식민 통치를 하는 로마인들의 하수인으로, 세금을 거둘 뿐만 아니라 직권을 남용하여 부정한 이득을 취하는 일이 흔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공공연한 “죄인들”과 같은 부류로 간주된다(9,10.11; 11,19).
이 문장의 후반부는 칠십인역의 신명 18,13을 인용한 것이다(레위 19,2도 참조). 제자들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완전성에 상응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실천적 완전성, 곧 선인이나 악인이나 다 너그럽게 대해 주시는 분의 완전성이다. 그래서 루카 6,36에서는 ‘완전하다’ 대신에 ‘자비롭다’로 표현된다. ‘완전하다’는 여기와 19,21에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