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마태오 복음서

6장

올바른 자선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1)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2)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3)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4)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올바른 기도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6)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7)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8)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9)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주님의 기도10) (루카 11,2-4)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11)
아버지의12)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13)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4)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15) 이루어지게 하소서.16)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7)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18) 용서하시고19)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20)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21)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올바른 단식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22)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루카 12,33-34)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23)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루카 11,34-36)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24)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하느님이냐, 재물이냐(루카 16,13)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25) 함께 섬길 수 없다.”

세상 걱정과 하느님의 나라(루카 12,22-32)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26)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27)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28) 조금이라도29)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30)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31)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32)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33)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34)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5)

주석
1

“의로운 일”의 직역: “의로움”(5,20 각주 참조). 이를 “선행”, “경건한 행위” 등으로도 옮긴다. 여기에서 “의로움” 또는 “의로운 일”은 유다인들의 세 가지 실천 사항에 특별히 충실함을 뜻한다. 곧 자선(2-4절), 기도(5-6절), 단식이다(16-18절).

2

본디 그리스 말에서 ‘어떠한 역을 연기하는 배우’를 뜻하던 “위선자”는 단순히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6,5.16; 15,7; 22,18; 23,13). 그리스 말 성경에서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패륜아, 사악한 자’ 등의 뜻으로 쓰인다. 위선자는 다분히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이 될 소지가 있는 자로서(24,51), 때로는 정신적·영적 맹인이 되기도 한다(7,5). 그리고 그의 판단은 잘못되고 비뚤어지기 쉽다(루카 6,42; 12,56; 13,15 참조). 이처럼 이 용어의 세세한 의미는 문맥에 따라 좌우된다.

3

“스스로”의 직역: “네 앞에다.”

4

일부 수사본들에는 이 말 다음에 “공공연하게”라는 말이 들어 있다. 6절에서도 마찬가지다.

5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데, “위선자들”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기회와 장소를 이용하는 것이다.

6

“골방”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광’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내밀한 곳이다.

7

‘빈말을 되풀이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고, 성경 외에서도 한 번만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뜻이 분명하지 않은 이 동사를 ‘지절거리다’, ‘중언부언하다’, ‘말을 많이 하다’, ‘(뜻 없는 낱말) 바타 바타를 되뇌다’ 등으로도 옮긴다.

8

이러한 기도의 잘못은(이교인들의 기도에 관해서는 1열왕 18,27, 그리고 유다인들의 기도에 관해서는 집회 7,14; 이사 1,15 참조), 단순히 길다는 사실이 아니라, 길게 함으로써 신이나 하느님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있다.

9

“너희 아버지” 대신에 어떤 수사본들에는 “우리 아버지”, 또 어떤 수사본들에는 “너희의 하느님 아버지”, 또 다른 수사본들에는 “너희의 하늘 아버지”로 되어 있다.

10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치는 이 기도는 내용은 물론이고 형식에서도 유다인들의 기도, 특히 그들이 오늘날에도 드리는 ‘열여덟 개의 청원 기도’와 흡사하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그 단순성, 그리고 자유롭게 하느님을 부르는 것으로 유다인들의 기도와 구분된다. 청원의 순서도 독창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기도는 당신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해 주십사는 삼중의 청원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 승리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들어 있지 않다. 이어서 제자들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일련의 청원이 나온다. 첫머리에서 하느님을 부를 때처럼 이 후반부에서도, 복수 일인칭이 신앙인 개개인을 기도 공동체로 한데 모으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기도문은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서 각각 다른 형태로 전승되는데, 루카 복음서의 것이 짧다. 청원이 마태오 복음서에는 일곱 개가 나오는데 루카 복음서에는 다섯 개만 나오고, 두 복음서의 공통된 부분에도 둘 또는 세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이 두 기도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다고 확실히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해당 공동체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조금씩 고친 흔적들이 지적되기도 한다. 애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현재의 기도문과는 다른 형태를 이용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이 기도문을 현대 언어로 옮기는 데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따른다. 현재의 그리스 말 본문은 셈족 말(히브리 말 또는 아람 말)로 된 원문을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드러낸다. 어떤 표현들은 구약 성경과 고대 유다교를 잘 알아야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용어라든가(11절 참조) 표현의(13절 참조) 의미에 관하여 의견이 엇갈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문의 어떠한 번역도 완벽에 가깝다고 말할 수가 없다. 우리말이 셈족 말이나 그리스 말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도 번역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11

제자들은 한 분뿐이신(23,9) 자기들 모두의 아버지께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행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심과 당신의 부성적 사랑으로 사람들 곁에 계심을(“저희 아버지”) 동시에 드러내는 셈족 말식 표현법에 상응한다. 그래서 이 원래의 표현에 담긴 내용의 풍부성은, 예컨대 ‘하늘의 아버지, 저희의 아버지’라는 번역으로 잘 반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부름말에서는 하느님께서 멀리 계심과 가까이 계심, 무한히 위대하신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에 대한 친밀감, 그리고 이 기도문이 청하는 내용을 절절히 필요로 하는 인간이 서 있는 이 땅과 완전함의 장소인 “하늘” 등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마태오는 또 같은 표현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7,21; 10,32.33; 12,50; 16,17; 18,10.19)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45; 6,1.9; 7,11; 18,14)로 나누어 옮긴다. 이 두 번째 표현이 마르 11,25에도 나온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하늘에 계신 (저희/너희/내) 아버지”라는 말이 루카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루카 11,2) 예수님에게서 직접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마태오는 다시 “하늘의 너희 아버지”(5,48; 6,14.26.32; 23,9), 또는 “하늘의 내 아버지”(15,13; 18,35)로 표현하기도 한다.

12

그리스 말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단수 2인칭(“당신”)으로 되어 있다. 다음에서도 계속 마찬가지다.

13

하느님의 “이름”은 성경 특히 전례문에서, 하느님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를 공손하게 가리키는 전통적 용어이다. 그리고 ‘하느님(또는, 그분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다’는 성경과 유다교 문학의 고전적 표현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의 성성(聖性)에 더 이상 무엇을 보탤 수는 없다. 그래서 이 표현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널리 알리며, (이 첫째 청원과 같은 내용을 담은 요한 12,28처럼) 그분의 영광을 칭송함을 뜻한다. 성경과 유다교에서는 하느님 또는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방식을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첫째, 율법 학자들과 라삐들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또 그렇게 하여 그들에 대한 그분의 권위를 확인하라고 권고한다(레위 22,32; 민수 27,14; 신명 32,51; 이사 8,13; 29,13). 둘째, 예언자들은 미래의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가운데 의로우신 ‘판관이며 구원자’로 나타나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리라고 예고한다(이사 5,16과 특히 에제 20,41; 28,22.25; 36,23; 38,16.23; 39,27).이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만이 보장하실 수 있는 그분 나라의 도래에 관한 청원이 이어지는 문맥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행의 내용, 곧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직접 개입하시는 것이다. 권능과 영광을 지니신 분, 의로우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에제키엘에게서처럼(바로 앞 단락에서 열거한 에제키엘서 구절들 참조) 예수님에게서도, 하느님께서 이러한 식으로 드러나심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 만민에게도 해당된다.

14

“아버지의 나라”에 관해서는 3,2 각주 참조.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또는 시작된 이 “나라”가 빨리 드러나고, 또 온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해 주십사고 빈다.

15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는 묵시록의 구조에 따라(다니 4,32; 1마카 3,60 참조), 하늘에 이미 있는 것이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청원한다는 뜻이다. “하늘”은 완전히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라고 생각된다. 이제 땅도 그러한 하늘의 모습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문구가 이 셋째 청원만이 아니라 앞의 두 청원과도 관련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이 경우 이 청원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리되게 하소서.”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16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와 마찬가지로(26,42; 루카 22,42), 이것 역시 수동적 체념의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뜻이 실현되도록 조치하십사는 적극적 청원이다. 이 청원이 앞의 두 개와 연결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려는 당신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서 손수 실현시키시는 것이 여기에서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이사 44,28; 46,10-11; 48,14; 에페 1,5.9 참조). 그러나 이 “뜻”은 인간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그들의 동조가 있어야 실현되고, 세상 종말에는 인간의 뜻과 이루는 완벽한 화합을 통하여 성취된다(예레 31,31-33; 에제 36,27 참조). 그리고 이 실현은 지금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하느님 계명의 준수 또는 그 “뜻”의 실천이 강조된다(5,17-20; 6,33; 7,21.24-27; 12,50; 21,30-31 등).

17

이 절은 짧지만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일용할”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어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데다가, 그리스도교 문헌에서만 사용된다(그 밖에는 어떤 파피루스 문헌에 딱 한 번만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과 번역이 제시된다. 첫째는 ‘생존에 필요한’인데, 이는 어떤 어원론에 따르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개연성은 별로 없다. 둘째는 ‘내일 필요한’인데, 내일의 양식을 오늘 요청함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별로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34절 참조). 그러나 ‘내일’을 먼 미래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청원도 앞의 것들처럼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곧 미래의 양식, 하느님께서 내세에 베푸시는 잔치가 되는 것이다. 셋째는 ‘오늘 필요한’으로, 많은 번역본이 이 해석을 따른다(우리 번역도 여기에 속한다). 또 하늘에서 떨어진 다음 날에는 썩어 버리고 마는 구약 성경의 만나와 관련하여, ‘내일까지 필요한’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넷째, 어원과는 전혀 관련 없이 옛날에 제시되고 또 아직도 더러 되풀이되는 해석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성체성사의 빵,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청원이 된다. 정확한 번역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지만, 어떠한 경우든 이 청원이 미래의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그날그날 받은 만나로 살아갔듯이(탈출 16), 제자들도 그날그날의 양식을 청하라고 권유하시는 것이다.

18

앞 행의 “잘못한”과 이 “잘못”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성경의 언어에서나 일반 언어에서나, 사람들 사이의 법적·상업적 채무를 뜻한다. 이러한 빚은 옛날에는 특히 심각한 것으로서, 채무자 자신이나 가족이 종으로 팔려 가거나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다(18,23-35 참조). 이러한 표상이 유다교에서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상황을 규명하는 데에 이용된다. 하느님은 채권자이시고 인간은 지불 능력이 없는 채무자라는 것이다. 같은 표상이 죄인의 상태를 가리키게도 된다(루카 13장 2절과 4절 비교). 현대 사회에서는 빌리고 빌려 주는 것이 일상사이기 때문에, ‘빚’으로 옮기면 이러한 표상을 약화시키게 된다. 그래서 “잘못”이 하느님께 끼친 손상과 죄인의 가련한 처지를 더 잘 드러낸다고 판단된다.

19

이 기도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진 빚을 탕감해 주십사고 청한다. 이 ‘탕감’은 자기의 죄를 속죄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의무와 형제들에 대한 의무를 밀접히 연관시키신다. 그래서 (집회 28,1-5에서 이미 이루어졌듯이) 우리가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 자신도 형제들을 용서할 것을 하느님께서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밝히신다(5,7; 6,14-15; 18,23-35; 마르 11,25). 그러나 형제를 용서한다고 우리가 받을 용서를 벌어들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드리는 청원의 진실성을 증언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과거로 표현된 “용서하였듯이”라는 말이 드러낸다.

20

“유혹” 대신에 “시험”, “시련”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아무튼 여기에서 “유혹”은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이나(창세 22,1; 집회 44,20; 1마카 2,52; 히브 11,17; 외경인 희년서 17,16 이하) 하느님의 백성이(탈출 15,25; 16,4; 20,20; 신명 8,2; 13,4; 판관 2,22; 3,1.4; 지혜 11,9) 그분께 받는 시험이나 시련이 아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에 자주 나오듯, 시련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겪는 사람을 사탄이 몰락시키려고 애쓰는 특별한 시련이다(1코린 7,5; 1테살 3,5; 1베드 5,5-9; 묵시 2,10. 그리고 루카 22,31 참조). 그래서 “유혹”이라고 번역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한 번도 하느님께서 직접 유혹에 빠뜨리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야고 1,13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지 않으신다고 명백히 말한다(집회 15,11-12 참조).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유혹과 사탄의 능력까지도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내포하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청원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마치 함정에 빠뜨리듯 유혹에 빠뜨리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도록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처럼(4,1과 병행구), 하느님께서는 유혹이 있는 위기 상황으로 사람을 이끄실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혹 자체를 받지 않게 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 내기 힘든 큰 시련을 피하게 해 주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21

“악”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중성이 될 수도 있고 남성이 될 수도 있다. 중성으로 이해하면 위와 같이 되고, 남성으로 이해하면 “악한 자” 곧 사탄이 된다. 오늘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둘째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지만(이 경우, “악마에게서”로 옮길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번역이 공통적으로 첫째 가능성을 채택해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이 전통을 따른다. 아무튼 여기에서 “악”은 어떤 추상적 악이 아니라, 인격적 악, 제자들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악의에 찬 능력을 지닌 존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일곱째와 여섯째 청원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국은 한 가지 청원을 이룬다. 후대의 많은 수사본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례 전통에 따라,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덧붙어 있다(1역대 29,11-13 참조).

22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축일에 하는 의무적인 “단식”(레위 16,29와 각주; 23,27 참조) 외에도 가끔 자발적으로 단식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의 경우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신다(9,14-17 참조). 그렇다고 단식 자체를 비판하지도 않으신다. 다만 예언자들처럼 그 의미의 상실을 나무라실 뿐이다(요엘 2,13; 즈카 7,5). 단식은 본디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여는 것이다(탈출 34,28; 다니 9,3; 마태 4,2; 사도 13,2-3; 14,23 참조).

23

당시에는 집 벽이 진흙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둑이 벽을 뚫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24,43; 욥 24,16 참조).

24

‘맑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이 이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그리고 이 낱말의 원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이 말은 ‘단순, 정직, 솔직, 순수’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에서는 특히 하느님과 그분의 법만을 향하여 눈길을 모으는 이의 단순함과 온전함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25

“재물”은 그리스 말로 마모나스로 아람 말 맘몬을 음역한 것이다. 이 용어는 여기에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힘을 지닌 존재로 의인화된 “재물” 또는 “돈”을 가리킨다(루카 16,9 각주 참조).

26

일부 수사본들에는 “무엇을 마실까”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27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무심함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모든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16,5-12. 그리고 마르 13,15; 1베드 5,7 참조)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표출되는 신뢰심을 말한다(6,11; 7,7-11. 그리고 필리 4,6 참조).

28

“수명”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키’[身長]를 뜻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문맥상 “수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29

“조금”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페키스는 46센티미터가량 되는 길이의 단위이다.

30

“나리꽃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을(호세 14,6 참조) 집합적으로 그냥 “(들에 핀) 꽃들”로도 옮긴다. 아무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도 갈릴래아의 들녘에 피는 나리꽃들을 틀림없이 보았을 것이다.

31

“길쌈”을 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옷을 만듦을 뜻한다.

32

“약한”의 직역: “적은.”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이전부터 내려온(루카 12,28 참조)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는 호칭을 즐겨 이용한다(8,26 각주; 14,31; 16,8; 17,20 참조).

33

일부 수사본들에는 “하느님의” 대신에 “하늘”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34

직역: “내일이 자신을 걱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35

이 말씀은 일반적 삶의 지혜가 담긴 격언 같은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