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인사

1

그리스도 예수님의1) 종으로서2)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3)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4)

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5)

3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6)

4

거룩한 영으로는7)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8)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9)

5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10)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11)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12)

7

성도로13)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14)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

8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9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15) 섬기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나는 끊임없이 여러분 생각을 하며,

10

기도할 때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든 내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빌고 있습니다.

11

나는 여러분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려는16) 것입니다.

12

다시 말하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통하여 다 함께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비록 지금까지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가려고 여러 번 작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서처럼 여러분에게서도 내가 어떤 성과를 거두려는 것이었습니다.

14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17) 지혜로운 이들에게도18)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

15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19)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복음의 힘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20)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21)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22) 믿음에서 믿음으로23)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24)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25)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26)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27)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28)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29)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30)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26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7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

28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29

그들은 온갖 불의와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덕으로 그득합니다. 그들은 험담꾼이고

30

중상꾼이며,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고, 불손하고 오만한 자며, 허풍쟁이고 모략꾼이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며,

31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입니다.

32

이와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느님의 법규를31) 알면서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주석
1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 등 여러 가지로 부른다.

2

“종”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노예’를 뜻하기도 하지만,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위대한 종들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3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는 1코린 1,1에도 나오는데, ‘부르심을 받다’라는 표현은 1,7과 1코린 1,2에서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된다.

4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선포하게 하신 기쁜 소식이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느님의 복음”(여기와 마르 1,1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5,19; 마르 1,1), “(하늘) 나라의 복음”(마태 4,23 등)과 같이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 이러한 기쁜 소식 또는 복음의 새로운 성격은(10,15와 루카 4,18-19에서 인용되는 이사 52,7과 61,1 참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이 약속들이 성취되고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사도는 2절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이 선포하고 예고한 복음을 유다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바오로를 따로 선택하신 것이다.

5

이로써 바오로는 옛 계약과 새 계약이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강조한다. 바오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모두 구약 성경의 약속들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6

“육”이라는 용어는 로마서에 스무 번 이상 나온다. 가) 첫째 부류의 본문에서는 “육”이라는 낱말이, 구약 성경에서 자주 그러하듯, 창조주께서 한껏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셨지만 항상 나약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는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인간을 가리킨다. 들의 꽃과 같은 “모든 육” 곧 모든 인간은(이사 40,6) 만물의 영장으로 드높이 창조되었지만 능력과 수명이 제한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왕적(王的)이면서도 고통스러운 운명 속에 온전한 인간으로, 곧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9,5). 사도는 무엇보다도 (우리말에서는 “모든 인간”이라고 번역한) “모든 육”이라는 구약 성경의 표현을 이용하여, 사람이면 그 누구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고(3,20; 갈라 2,16), 또 그럼으로써 아무도(곧, “어떠한 육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1코린 1,29). 이러한 바오로의 본문에서, 인간은 전체적으로 “육” 곧 “살과 피”로 된 존재(1코린 15,50; 갈라 1,16; 에페 6,12), 삶의 온갖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 자기의 어떠한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를 창조하신 분에게서만 힘과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존재로 서술된다. 이러한 연유로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육”이라는 낱말이 가끔 그리스도나 사도의 고통받는 “몸”을 일컫기도 한다(2코린 12,7; 갈라 4,13-14; 필리 1,22-24; 콜로 1,22-24). 이 본문들에서는 문맥상, “육”이 고통을 받을 때에는 바로 그 사람 자신이 마음과 영혼, 그리고 온몸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말로 이해하게 된다. 끝으로 인간이 의지해서는 안 되는 이 “육”은, 자기가 수행하는 가장 높은 계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종교적 인간을 일컫기도 한다. 바오로 자신도 과거에는 바로 그러한 바리사이였다. 그렇지만 이제 그는 현재 자기가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육 곧 자기의 종교적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과 바리사이들을 대비시킨다(필리 3,3-7). 나) 둘째 부류의 본문에서, 사도는 더 이상 창조주께서 인간의 조건으로 고정시켜 놓으신 자연적 한계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이 인간 조건이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또 그럼으로써 인간 본연의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바오로가 육(또는, 몸)을 죄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육을 물질적 요소라고 하면서, 그것을 그보다 더 우월한 요소 곧 영혼이나 정신과 대비시키지 않는다. 물론 육 곧 나약성을 타고난 인간은 파괴적인 힘이 그 안에 자리 잡고 또 그것의 노예가 되는 한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이 파괴적 힘이란 죄와 그것이 가져오는 욕망, 그리고 죽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7장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육 안에” 머무를 때, 죄의 욕정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 우리의 지체들을 이용한다(7,5).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노예가 된 “육”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7,18), 또 “나 자신이 ……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7,25)라고 말하게 된다. 다) 셋째 부류의 본문에서, 사도는 성령을 통한 육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렇게 완수된 해방을 근거로, 더 이상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한다. 이것이 8장의 주제이다.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육이 아니라) 죄를 처단하셨다고 말하고 나서(8,3), 바오로는 서간의 수신인들 앞에 두 가지를 펼쳐 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결정적으로 선택하라고 한다. 육에 따라 살기를 고집하면,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아 죽음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자기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 순종하면,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드러난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8,11). 그렇다고 사도가 사람들을 두 부류, 곧 육적 인간과 영적 인간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8,12-13의 충고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8장 전체에 걸쳐 승리가 강조되는 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똑같은 힘을 지닌 육과 영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육에서 죄가 처단되고(8,3) 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함께 부활하심으로써(8,11), 결정적 해방의 새 시대가 개시되었다. “육의 행실”이 지배하던 시대가 “성령의 열매”가 지배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갈라 5,13-25).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육 속에서’ 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육에 따라’ 살지는 않는다.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갈라 2,20). 그래서 사도는 엄중히 경고한다. 성령으로 시작한 삶을 육으로 마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7

“거룩한 영”의 직역: “거룩함의 영.” 이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유래한다(시편 51,13; 이사 63,10 참조).

8

이 절에서 강조되는 “힘을 지니신”은 “아드님”을 꾸민다.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부활과 함께 드높이 올리시고(필리 2,9), 또 영광과(1베드 1,21) 지고의 능력을 부여하신 것이다(에페 1,20-23).

9

틀림없이 신앙 고백문에서 따왔을 3절 후반부와 4절은 병행구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영으로는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책봉되신다. 어떤 학자들은 바오로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 곧 인성과(3절) 신성을(4절) 생각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이 두 절에서는 인간의 조건을 타고 태어나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말하는 것 같다. 부활 전에는 이 조건이 육의 나약함과 비천함으로 특징을 이루지만(3절), 부활 뒤에는 하느님의 특권을 충만히 소유하게 되는 것으로(“힘을 지니신”) 특징을 이룬다.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현세의 조건 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음을 밝힌다(3절: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신성은 9,5에 가서야 밝힐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더불어, 믿는 이들이 당신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8,29; 갈라 4,5-7)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주님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심으로써(14,9), 새롭고 메시아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정되신다. 이러한 관점은 사도행전의 설교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사도 2,36).

10

직역: “은총과 사도직.” 이는 그리스 말의 특수 용법으로 “사도직”이 “은총”을 설명하는 구실을 한다. 곧 은총 따로, 사도직 따로가 아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사도직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한다(12,3; 15,15; 1코린 3,10; 갈라 2,8-9).

11

“믿음”은 머리나 마음만이 아니라 자기의 온 존재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순종”이기도 하다. 사실 믿음은, 성실하고 진실하시며 또 사람을 새롭게 하시어 그가 당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해 주시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종속시킴을 뜻한다(6,15-20 참조). “믿음”에 관한 바오로의 전체적인 생각은 10,9 각주 참조.

12

바오로 서간에서는 부르시는 분이 늘 하느님이시다(8,30; 9,24; 1코린 7,15; 갈라 1,6 등 참조). 그러나 당신 혼자가 아니라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르신다(1코린 1,9).

13

직역: “거룩한 이들”(탈출 19,5-6; 다니 7,18; 사도 9,13; 1베드 1,16; 2,9-10).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느님께 봉헌됨으로써 거룩하게 된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도 일차적으로, 누가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일원으로 부르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소명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1코린 1,2 참조). 이러한 소명에 자기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내포되고 또 요구된다는 것은 두 말의 여지가 없다(6,19.22; 2코린 1,12; 7,1 등). “성도”, ‘거룩함’에 관해서는 6,19 각주; 15,25 각주도 참조.

14

“인사합니다”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15

바오로는 “영”이라는 낱말을 네 가지 주요 의미로 사용한다. 곧 하느님의 영 또는 성령(로마서에서는 스무 군데 이상), 사람의 영(바오로 서간 전체에서는 여기를 포함하여 열다섯 군데쯤),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세상이나 악의 영(11,8; 1코린 2,12; 에페 2,2; 2티모 1,7), 그리고 주님의 파괴적인 입김이다(이사 11,4를 인용하는 2테살 2,8). 여기에서는 이와 관련된 바오로의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가) 어떤 본문들은 가끔 첫째 범주에 속하는지, 둘째 범주에 속하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12,11이 그러하고, 또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8,4와(육이 아니라 영에 대한 순종) 8,5도 그러하다(육에 따라 사는 자들과 영에 따라 사는 이들. 2코린 6,6; 에페 4,3도 참조). 여기에서 더욱 큰 어려움은, 바오로가 하느님의 영 곧 하느님에게서 오거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과 사람의 영 곧 창조된 모든 인간에게 들어 있는 영(1,9; 8,16; 1코린 2,11; 5,3-4; 갈라 6,18; 필리 4,23; 1테살 5,23; 필레 25 등)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어떤 학자들은 사람의 영과 이 영을 일으키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영 사이의 깊은 상관관계를 역설한다. 다른 학자들은 (8,16에서 볼 수 있듯이) 바오로가 오히려 이 두 영을 서로 구분 지으려고 애쓴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사도는 구약 성경에 따라, 하느님의 영과 사람의 영 사이의 본질적인 유사성보다는, 하느님의 영이 사람의 영에 비하여 월등히 존귀하신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은 사람의 영이나(8,16) 마음만이 아니라(5,5) 그 사람 전체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사실 뿐만 아니라(8,9), 교회 안에도(1코린 3,16) 또 그들의 몸 안에도 사신다(1코린 6,19). 이 ‘살다’라는 동사 역시 구약 성경에서 유래하는 개념으로, 성령의 현존을 실제적인 것이면서도(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사시는 사람에게 단순히 외적인 존재로 머무르지 않으신다.) 거리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성령을 자기 안에 모신 사람도 결코 성령과 혼동될 수는 없다). 이는 사람 몸만이 아니라 주님의 몸인 교회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나) 바오로에 따르면, 하느님의 영(또는, 그리스도의 영: 8,9; 갈라 4,6; 필리 1,19 등)의 활동 영역에는 제한이 없다. 구약 성경과 복음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성령께서 기적이라든가 비범한 표징 속에 드러나신다. 그러나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교회와, 또 성령께서 온전하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나신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이미 거기에 계셨듯이(1,4), 마지막 부활 때에도 곁에 계실 것이다(8,11). 또 그날까지는, 옛 계약에 대한 새 계약을 정비하시고(갈라 3,3; 4,29와 에제 36,27), 사람들에게 믿음을 일으키시고 사람들의 믿음에 응답하시며(1코린 12,3; 갈라 3,2; 1테살 1,5; 4,8), 신자들이 자녀로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도록 하시고(8,15-16; 갈라 4,6; 에페 6,18), 믿는 이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2테살 2,13) 기쁨과(14,17; 1테살 1,6) 사랑 속에(갈라 5,16-25)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신다. 이는 교회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시기에(에페 4,4), 같은 성령께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 안에 드러나신다(1코린 12). 바오로의 세 가지 근본 직무도(사도, 예언자, 교사)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구조는 물론, (신령한 언어를 말한다든가 예언을 한다든가 병자를 고친다든가 하는) 아주 특수하거나 매우 비정상적인 교회의 활동까지도 성령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 바오로는 가끔 교회의 영적 일치와(1코린 3,1-4; 필리 2,1-2)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직접 개입해야 한다. 이때에 그는 영적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歷史)에서 떨어져 나갈 경우 그 정통성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일차로 바오로는 특히 코린토 신자들에게, 성령께서 그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총을 깨닫고 또 다른 이들도 깨닫게 해 주는 사도직을 수행하라고 베푸신 것임을 지적한다(1코린 2,10-16). 이로써 성령과 그리스도의 역사적 업적, 그리고 교회 직무 사이의 관계가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이차로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자유를 주시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며 기도하게 해 주시는 성령께서 새로운 세상의 “첫 선물”(8,23) 곧 “보증”(2코린 1,22; 5,5; 에페 1,14)이시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로마 8,11) 율법과 육에 얽매인 종살이를 청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해야 함을 보여 준다. 이로써 성령과 신자들의 현재 행동, 그리고 신자들이 받을 마지막 영광 사이의 관계가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16

‘힘을 북돋아 주다’는 16,25; 1테살 3,2.13; 2테살 2,17; 3,3에도 나온다.

17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은 여기에서 종족이 아니라 문화를 배경으로 한 구분이다. 당시 지중해 변의 이른바 문명 세계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 문화 속에서 그리스 말을 사용하였다. 이들이 그리스인으로 불리고, 나머지 사람들이나 민족들은 나중에 ‘야만인’을 뜻하게 되는 바르바로스로 불린다. 그러나 16절에 나오듯, 신학적으로는 인류 전체가 선택된 민족인 유다인과 (문화적 구분과 관계없이) 다른 모든 민족들로 나뉘는데, 이 모든 민족들이 일반적으로 그리스인이라는 명칭으로 표현된다(2,9-10; 3,9; 10,12 등 참조).

18

“지혜로운 이”와 관련해서는 1,22; 1코린 1,19-20.25-27도 참조.

19

“복음”에 관해서는 1절 각주 참조.

20

유다인과 그리스인(다른 민족들)의 관계에 관해서는 9`─11장, 특히 11,11-14, 그리고 2,9-10과 사도 13,46 참조.

21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라는 말로, 사도는 아무런 차별이나 구분 없이 모든 민족들이 믿으라고 초대를 받았음을, 그리고 복음 선포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신앙으로 인도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10,14-16 참조).

22

“하느님의 의로움(또는, ‘정의’)”은 각자의 행실이나 업적에 따라 보상하는 이른바 ‘분배 정의’가 아니라, 무상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 정의’를 뜻한다.

23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매우 불분명한 표현인데, 비슷한 어법을 2코린 2,16; 3,18; 4,17에서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24

이 구약 성경 구절은 히브리 말 성경과도 칠십인역과도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하바 2,4를 가리킨다. 이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라야 살 것이다.”로 옮길 수도 있다. 바오로가 사용하는 “믿음”의 전체적인 의미에 관해서는 10,9 각주 참조.

25

구약 성경에서부터 이미 ‘하느님의 진노’와 ‘구원을 베푸는 그분의 정의’가 연결된다(미카 7,9; 스바 3,1-10 참조). 이 두 주제는 복음 선포에서도 서로 연관되는데, 바오로 서간에서는 1테살 1,10도 참조. ‘나타나다’(또는, ‘계시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동사는 여기에서 (17절에서처럼) 현재로 쓰임으로써, 죄 많은 인류에게 내린 하느님의 진노가 일으키는 항구적인 결과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만이 이 결과의 범위와 그 강도를 가늠케 할 수 있을 따름이다.

26

바오로는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앎이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마땅한 결과를 가져오는 자세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21절), 변명의 여지가 없이(20ㄴ절) 하느님 진노의 대상이 된다고(18절) 단언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점을 전제한다(19절과 20절).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인간이 자기의 이성으로 실제적 확신은 아니더라도 이론적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데에 이 20절을 인용한다. 개신교의 개혁가들은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종교 현상의 보편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계시에 힘입지 않고서는 참하느님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27

사람들은 종교적 인식 능력과 감성을 지녔으면서도, 그것들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단언은 이교에 대한 유다교의 호교론에서 빌려 온 것이다. 지혜 13,1-9에서 이 주제가 길게 전개된다. 이교인들은 이 세상의 경이로운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창조주를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피조물, 그리고 천상의 신비로운 조물들을 신으로 섬기는 데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느라 지식의 보고를 허비하는 바람에,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고, 또 사실 그럴 마음도 없었다. 이러한 어리석음 탓에 그들은 변명할 구실이 없다는 것이다(1코린 1,21도 참조). 여기에서 다른 민족들의 종교에 대한 바오로의 매우 부정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난잡하게 도에 지나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과 복음 앞에 죄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28

이 말은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만든 금송아지 일화를(탈출 32; 신명 9,8-21) 이야기하는 시편 106,20을 가리킨다. 바오로는 여기에다 다른 우상들을 보태고 다른 민족들도 끌어들여 이 시편의 전망을 더욱 확대시킨다.

29

“그들이 ……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의 직역: “그들을 …… 더러움에 넘기시어.” ‘넘기다, 넘겨주다, 넘겨 버리다’는 구약 성경에서부터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판관 2,14; 3,28; 시편 106,41 참조) 26절과 28절에서도 쓰인다. 참된 하느님을 배척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순전히 지적인 오류만을 뜻하지 않고, 거기에는 도덕적 결과가 곧바로 이어진다. 창조주를 섬기지 않으면 인류는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다. 바오로에 따르면, 이러한 탈선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데에 따른 정당한 징벌이다.

30

“하느님의 진리”는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가 아니라, 결국은 헛된 우상들에 반대되는 참하느님 자신을 가리킨다(예레 10,10-14; 16,19-21; 51,15-19; 1테살 1,9 참조).

31

여기에서 바오로는 인간 양심의 “법규”를 가리키는 것 같다(2,14-16). 또는 통치자들이 선포한 법규를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13,4의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