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요한 복음서

1장

머리글

1

한처음에1) 말씀이2) 계셨다.3)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4)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5) 것은 하나도 없다.6)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7)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8)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9)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10)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11)

10

그분께서 세상에12)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3)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14)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15)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16)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17)
우리18) 가운데 사셨다.19)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20)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21)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22)

16

그분의 충만함에서23)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24)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25)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26)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27)

세례자 요한의 증언(마태 3,1-12; 마르 1,2-8; 루카 3,1-9.15-1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28)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29)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3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31)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32)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33)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34) 일어난 일이다.

하느님의 어린양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35)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37)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38) 비둘기처럼39)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첫 제자들

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40)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41) ‘그리스도’이다.42)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43)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

43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44)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45)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46)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47)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48)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49)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0)

주석
1

창세기 첫머리에도 나오는 “한처음”(또는, 태초)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절대적 ‘시작’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 말로 로고스라고 불리신다. 이 낱말은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구약 성경의 지혜 문학과(잠언 8,23-36; 지혜 7,22─8,1; 집회 24,1-22) 그리스화한 유다교의 영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으로서, 하느님 아버지를 완벽하게 드러내시는 분이시다(그래서 이분을 필리 2,6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 콜로 1,15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히브 1,3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어, 사람들의 세계에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존재가 되신다(1요한 1,2 참조).

3

“말씀”은 지고하고 영원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그리스 말에서는 ‘계시다’가 반과거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4

“말씀”은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아버지”와 다르시면서도, 나중에 복음서 저자가 애써 가리켜 보이는 것처럼(5,17-30)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결국 “말씀”도 “아버지”처럼 하느님이시다. 곧 하느님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다.

5

‘생겨나다’가 그리스 말에서는 창세 1,3의 ‘생기다’와 똑같은 동사이다. 그리고 이 동사는 만물이 ‘무에서’(라틴 말로는, a nihilo) 창조되었음을 잘 표현해 낸다. 물질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그래서 여기에는 물질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나 물질을 악한 것으로 여기는 영지주의의 흔적도 없는 것이다(‘입문’ 5 참조).

6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세상의 창조가 하느님의 말씀(시편 33,6.9; 147,15-18; 이사 40,26; 48,3; 지혜 9,1.9. 그리고 창세 1,3 참조), 또는 하느님의 지혜와 관련된다고 말한다(잠언 8,27-30; 지혜 7,12; 8,4; 9,9). 모든 창조 활동은 ‘아버지’와 ‘아드님’의 공동 행위인 것이다(1코린 8,6 참조).

7

3절 2행을 직역하면, “그분 없이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다. 생겨난 것(은)”이다. 본문 비평학적으로는 “생겨난 것”이 4절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생겨난 것은 (4절) 그분 안에서 생명이 있었다.”로 옮겨야 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그리스 말에서부터 매우 어색하고 또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요한 복음서의 전체 내용에도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 위와 같이 옮긴다.

8

“말씀”은 사람들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모든 것의 원천이시다. 곧 육체적 삶,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실현되는 삶의 근원이시다. “말씀”은 동시에 사람들이 걸어가야 하는 참된 길을 가리켜 주는 “빛”이시다(8,12).

9

‘깨닫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본디 ‘움켜잡다’를 뜻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전투적인 의미로 ‘압도하다, 이기다’, 또는 지적인 의미로 ‘파악하다, 깨닫다’의 뜻으로 쓰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전투적 의미로 옮기기도 하지만(“어둠은 그를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완전히 확신하기 때문에(12,31; 16,11.33), “어둠”이 그분을 억누를 수도 있다는 개연성의 여지를 두었을 리가 전혀 없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깨닫다’는 10절의 ‘알아보다’, 11절의 ‘맞아들이다’와 관련된다. 결국은 ‘믿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비치다’는 현재형, ‘깨닫다’는 과거형으로 쓰인다. 과거형은 “말씀”이 인간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사정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배척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빛”은 지금도 비추고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은 현재의 복음서 독자들에게도 계속 경고가 된다.

10

요한은 예언자로서, 그의 가르침은 사실 전적으로 증언의 의미를 지닌다(1,15.19-34; 3,23-36; 5,33; 10,41). 여기에서는 증인인 요한과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계시자(啓示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강하게 대조된다.

11

“말씀”은 가장 강한 의미에서 “빛”이시다. 출신과 상황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성취되도록 이끌어 주는 모든 지침을 이 빛으로부터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한다. 현재의 복음서 본문은, 이 빛이 이제는 세상에 오신(6,14 참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덧붙인다.

12

“세상”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코스모스가 그리스인들에게는 우주를 가리키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세상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3,16), 하느님과 그분의 계시를 조직적으로 배척하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12,31 각주; 1요한 2,16 참조).

13

구약 성경에도 이미 ‘하느님의 지혜’를 사람들이 배척한다는 말이 나온다(바룩 3,12; 4,1).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사람이 되신 “말씀”을 세상이 물리친 것이다.

14

“당신 땅”의 직역: “당신 것.” 이는, 모두 창조주의 소유인 인류를 역사적으로 대표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킬 것이다.

15

성자(聖子)의 “이름”을 믿음은, 그분께서 지니신 권능을 받아들이고 그 권능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이름은 그분 자신을 드러낸다(2,23; 3,18; 1요한 3,23; 5,13). 그리고 믿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계시자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이다.

16

‘하느님의 자녀 됨’(3,3-7; 11,52; 1요한 3,1-2.10; 5,2.4.18)은 그렇게 되는 능력을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전제한다.

17

“사람”의 직역: “살.” 요한 복음서에서 이 낱말은 죽음으로 끝나는 나약한 존재인 인간 전체를 가리킨다. 이렇게 강생하심으로써, 또는 사람이 되심으로써 “말씀”이 이제 인간의 조건 아래 존재하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이는 구원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언한다. 위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육화가 겉보기일 따름이라는 가현설(假現說)의 이단에(1요한 4,2) 대응하는 것일 수 있다.

18

여기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사람들(1,5.9-13), 더 상세히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 또는 다음 문장에서 서술되는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19

“사셨다”의 직역: “천막을 치셨다.” 이스라엘인들은 본디 유목민으로서 천막생활을 하였다. 성전도 처음에는 천막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성전을 가리킬 것이다(1,51; 2,20; 4,23-24; 탈출 25,8; 민수 35,34).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자리이고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이다(탈출 40,34-35; 1열왕 8,10-13; 이사 6,1-4).

20

구약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낱말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드러나시는 것을 의미한다. 곧 때로는 하느님께 봉헌되거나 선택되어 거룩하게 된 사물이나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일종의 광채, 또는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사건을 가리킨다. 복음서 저자는 앞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여러 가지 활동(2,11), 특별히 파스카 사건(12,23.28; 13,31; 17,2-5), 그리고 제자들의 일치를 서술하게 된다(17,22-23).

21

이 문장을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 외아드님으로서 /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영광을 보았다.”로 옮길 수도 있다. “외아드님”이라는 칭호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이 지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이러한 아드님이 되신 성자께서는 성부와 함께 “은총과 진리”를 완벽히 공유하신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다’라는 표현은 탈출 34,6을 상기시킨다. 탈출기의 이 표현은 다함없는 너그러움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특징짓는 것이다.

22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항구적인 가치를 지닌다. 곧 예수님께서 역사적으로 요한보다 늦게 오셨지만 그분의 출신,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사명으로 요한보다 월등히 높은 분이시라는 것이다.

23

사람이 되신 “말씀”을 앎으로써, 신자들의 공동체는 그분께만 있는 영성적 은혜의 “충만함”을 점점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된다.

24

“은총에 은총”이라는 표현은 한 가지 은총에서 다른 은총으로 (예컨대 구약에서 신약,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으로) 이어지는 연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데에 지속적으로 커지는 능력을 가리킨다.

25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직접 아는 데까지 이를 능력이 없다(신명 4,12; 시편 97,2). 다만 그것을 갈망할 수 있을 따름이다(14,8 참조).

26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의 직역: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이 표현은 아기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께서는 그 어떠한 관계보다도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심을 드러낸다. 곧 1절의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를 비유적으로 그리는 말이다. 이 밖에 “아버지 곁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에 가까이 계신”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27

성부의 생명을 아무런 제한 없이 공유하시는 성자만이 사람들을 참다운 깨달음과 생명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 자체로, 말씀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고 보여 주시는 유일한 분이 되신다.

28

요한 복음서에서 유다인들은 가끔 말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들을 뜻한다(3,25; 4,9.22 등). 그러나 이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적대적으로 대하는 세상의 대표자들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바로 이러한 의미로 유다 당국, 곧 합법적 지도자, 지배자들을 특징짓는 것이다.

29

일부 수사본들에는 “요한에게 보내어”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아, 이를 괄호 속에 넣기도 한다.

30

직역: “요한은 고백하고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31

“하고 물어도”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집회 48,10-11; 말라 3,23 등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이 벌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엘리야 예언자가 다시 와야 한다(마태 11,14; 17,10 참조). 그리고 유다인들의 여러 집단에서는 종말에 어떤 예언자가 오리라고 고대하였는데, 이는 신명 18,15에 근거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6,14; 사도 3,22 참조).

32

칠십인역에 따라 이사 40,3을 인용한 것이다.

33

“보냄을 받은 이들 가운데에는 바리사이들도 있었다.”로 옮길 수도 있다. 위의 번역이 내포하는 한 가지 어려움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은(19절) 일반적으로 바리사이가 아니라 사두가이였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가 저술될 때에는 성전이 파괴되고(70년) 상당 기간이 지난 뒤이므로, 사제와 레위인은 물론 사두가이들도 없어지고, 바리사이들만 유다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실 이 복음서에서 바리사이들은 곧 유다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이다.

34

이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는 라자로의 고향이 아니라(11,1.18),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요르단강 동쪽 페래아 지방에 있던 한 고을이다.

35

“세상의 죄”가 단수로 쓰이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죄와 그것들이 야기하는 모든 것까지 포함한다.

36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두 가지 전통적 표상을 혼합하여 예수님의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상기시킨다. 첫째는, 자기는 죄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을 어린양처럼 희생하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의 표상이다(이사 52,13─53,12). 둘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하는, 파스카 때에 잡는 어린양의 표상이다(탈출 12,1-28. 그리고 요한 19,14.36; 1코린 5,7; 묵시 5,6.12 참조).

37

15절과 27절을 가리킨다.

38

“성령”의 번역에 관해서는 마르 1,10 각주 참조.

39

“비둘기” 상징에 관해서는 마태 3,16 각주 참조.

40

“오후 네 시”의 직역: “제10시.”

41

요한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말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19,17; 20,16 참조) 굳이 히브리 말이나 아람 말 어휘를 쓰고 그것을 또 그리스 말로 번역한다(여기와 38절과 42절 참조). 이러한 방식으로, 하느님 “말씀”의 강생이(14절) 인간의 현실 속에서, 팔레스티나라는 구체적인 땅에서, 역사의 특정한 때에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42

그리스도는 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하는 메시아를 그리스 말로 번역한 것이다. 유다교 전통에서는(4,25 참조) 이 칭호가 종말에 올 것으로 사람들이 고대하던 새로운 다윗을 가리킨다.

43

예수님께서는 신비롭게도 당신께 오는 이들을 다 아신다(1,48; 2,25; 4,16-19). 시몬에게 (아람 말로는 케파, 그리스 말로는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심은 그에게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심을 뜻한다(창세 17,5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경우 참조).

44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 가에 있던 고을이다(마태 11,21; 마르 8,22-26 참조).

45

후대의 일부 전통에서는 이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 사도와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21,2 참조).

46

나자렛은 구약 성경은 물론 초기 라삐 문헌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 보잘것없는 촌락이었다. 그런 곳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나타나엘은 이웃 고을 카나 출신이어서(21,2), 이러한 회의가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분의 사명은, 그분을 직접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47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다’는 라삐들이 흔히 쓰는 표현 방식으로, 선악을 알려 준다는 나무 아래에 앉아 성경 공부에 전념하는 율법 학자들의 관습과 관련지어 이해하기도 한다. 나타나엘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타나엘도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게 해 주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 특히 사람들이 갈망하는 메시아에 관한 부분들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튼 뜻이 확실하지 않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분의 초자연적인 지식, 곧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8

그리스 말 본문에는 38절에서처럼 라삐로 되어 있다.

49

공관 복음서에서처럼 요한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지니신다.

50

이 제4복음서에서는, 다니 7,9-15가 상기시키고 또 최고 의회에서 벌어지는 재판 중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종말의 광경이(마태 26,64; 마르 14,62) 이미 지금부터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심에 따라, “하늘이 열리고”(이사 63,19; 마르 1,10; 루카 2,9-13), 야곱의 꿈이 예고한(창세 28,17) 하느님과의 통교(通交)가 믿는 이들에게는 항구적인 현실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