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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1. 예언주의

예언 현상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발견된다.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이집트에는 기원전 이천 년대부터 흔히 넋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들을 파견한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던 남자들과 여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언어 구사는 성경의 문체와 매우 가깝다. 성경에 따르면 예언주의는 이스라엘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종교와 정치 제도는 물론 사회 구조에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러 예언서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 예언자의 소명 사화들과, 예언자의 생애 가운데 중요한 순간을 이야기하는 본문들은 그 예언자의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어원적으로 넋을 잃은 상태를 연상시키는 나비라는 히브리 말은 ‘예언자’를 말한다. 이 용어는 ‘선견자’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용어를 대신하였으며(1사무 9,9), 말하는 사람 또는 불린 사람, 곧 하느님의 말씀이 건네진 사람을 가리킨다. 말씀은 성경 예언자들의 가장 중요한 활동 수단이었으나, 이들은 때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기이한 몸짓이나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개입으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예언자들의 말씀은 온갖 언어 표현들을 빌려 전달된다. 예언자들이 하느님 편에 서서 말하는 신탁(또는, 메시지)은 가장 자주 나오고 가장 독특한 형태이며, 이 밖에도 이야기, 비유, 금언, 심지어 찬가까지 발견된다. 예언자들의 말씀 내용은 언어 표현만큼이나 다양하나, 그것은 언제나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근본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하느님께 매여 있던, 하느님의 대변자인 예언자들은 또한 역사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 역사적 사건 속에 현존하신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던 이들은 이 확신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활동하며, 경고, 권고, 하느님의 징벌 선언, 위로와 같은 방법들을 이용한다.

2. 예언자

흔히 예언자들을 영적이며 윤리적으로 열정이 충만한 특별한 인물들로 생각해 왔으나, 이는 19세기 낭만주의와 개인주의로부터 부정할 수 없는 영향을 받은 성경 주석에서 비롯된 재해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 성경의 예언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예언자들을 통해서 직접 접근하기는 어렵고, 예언자의 이름을 책 이름으로 하면서 신탁과 이야기와 설교들과 기타 문학 유형들을 취합하고 있는 예언서들을 통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언서에 보존된 상당수의 예언 말씀들은 본디 구전으로 전해졌던 것들인 반면, 또 다른 말씀들은 처음부터 글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예언서들에 대한 현대 연구 동향은 이렇게 예언자들보다 그들의 책들을 중시한다. 오늘날에 와서 예언서의 편집자들은 흔히 그렇듯 그 예언자의 본디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하는 어설픈 해설자들이 아니라, 예언자의 유산을 현실화하고자 고심했던 사람들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화 작업은 전해 받은 본래의 예언서 본문에 새로운 말씀들을 덧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첨가된 말씀들은 예언자의 정신을 존중하면서 그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여 더욱 훌륭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경로 역할을 하였다. 예언서들 가운데 이사야서와 미카서와 예레미야서가 이러한 현실화 작업을 거친 대표적인 경우이며, 현실화의 동기는 예언자들이 행동하고 말했던 바가 결국은 모두 공동체 전체에 해당된다는 데 있다. 이 공동체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 고유의 역사를 읽고, 하느님의 사람들로서 예언자들이 보여 준 모범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이기 위하여, 또는 다시 그 백성이 되기 위하여 적절한 경각심을 일깨우게 된 것이다.

예언자들의 말씀은 발설되는 대로 모아졌다. 예언서 안에서 수신인을 명기한 작은 단위의 모음들이 발견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와 같은 점진적인 작품 구성을 확인시켜 주는 표지가 된다(이사 2,1; 13,1; 예레 14,1; 21,1 등). 그러나 예언서 발간 작업이 특히 유배 시대와 유배 시대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왕정 제도와 같은 여타 제도들이 사라지자 이스라엘 공동체는 신앙과 종교 의식에 관한 권위 있는 규범으로서 글로 기록된 문헌에 더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 일어난 사건들은, 예언자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사람들은 이제 이 말씀들을 취합하여 거기에서 지나간 일들에 대한 교훈을 이끌어 내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두 가지 원칙이 중시되었다. 사람들은 우선 ‘연대순’에 따라 예언자들의 말씀을 규합하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했던 신탁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약속을 담고 있던 신탁들을 규합하면서 여기에 ‘체계적인’ 질서를 더해 나갔다. 그러나 연대순과 체계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조화롭게 이루어 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두 가지 원칙의 적용은 독자를 혼란 속에 빠뜨려 자주 당황케 하였고, 이 혼란은 문학적 분석으로도 모든 수수께끼들을 말끔히 해결하지 못해 더욱 두드러지기만 하였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에서 1─39장과 전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40장 이후의 본문은, 복구와 구원은 이제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말임을 보여 주고자 힘쓴다. 이사야서가 예언서 첫머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를 저자로 하는 신탁들과(이사 1─39), 유배로부터의 귀환 시대에 관련된 또 다른 신탁들을(이사 40─66) 규합하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이사야서는 호세아서로 열리는 ‘열두 소예언서’의 예언자들이 활동한 기간 전체를 정확하게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곧 예언자 호세아는 이사야처럼 아시리아의 지배 아래에 있던 시기에 활동하였고, ‘열두 소예언서’의 마지막 세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와 말라키의 신탁들은 (특히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경우) 이사 40장 이하처럼 페르시아 제국 시대 초기에 발설되었다.

열두 소예언서는 여러 단계에 걸쳐 정리되었다(그리스 말 역본과 비교해 보면 예언서들이 약간 다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이 예언서들은 처음에는, 신명기계 역사서들을 저술했고 그 신학과 문체를 호세아서와 아모스서와 미카서와 스바니야서에서도 적용한 몇몇 신명기계 편집자들이 발간한 것 같다. 예레미야서 역시 신명기계 문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러 편집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 1─8장은 나훔서와 하바쿡서와 마찬가지로 ‘열두 소예언서’에 편입되기 이전에 독립적인 소규모의 모음집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시대 말엽이나 그리스 시대 초엽에 상이한 책들과 모음집이 규합되면서, 동시에 참된 예언 말씀은 문서를 매개로 할 때 비로소 접근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율법 학자들이 예언 전승의 수호자가 된다.

한편 애가는 히브리 말 성경에서 룻기, 아가, 코헬렛, 에스테르기와 함께 ‘축제 오경’을 이루면서 예루살렘 함락을 애도할 때 읽혔으나, 칠십인역은 유다인들의 어떤 전통에 따라 예언자 예레미야의 작품으로 전한다. 이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임금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가를 지었다고 전하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2역대 35,25 참조). 칠십인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바룩서는 다양한 시대를 배경으로 예루살렘 출신 유다인들에게 참회 예식을 거행하도록 격려하는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의 기록으로 보인다. 끝으로 문학 유형상 구약 성경에서 독특한 다니엘서는 바빌론 유배 시대에 활동하던 어떤 예언자의 작품으로 제시되나, 실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종교 박해에 직면해서 이를 극복하도록 신앙의 모범을 제공하고자 탄생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