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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1. 루카가 펴낸 첫 작품의 머리말

네 복음서 가운데에서 루카 복음서만 당시의 많은 그리스 말 작품처럼 ‘머리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머리말은 (가상이든 실제이든)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테오필로스에게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첫 부분에도 같은 인물에게 바치는 머리말이 나온다. 사도행전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자기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에 관하여 기록한 첫 번째 작품을 언급한다(사도 1,1-2).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부터, 셋째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동일한 저자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현대 성서학에서도 이 두 책에서 드러나는 말과 생각의 동질성, 그리고 구도의 대칭(對稱) 등을 바탕으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사건 곧 수난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심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이 사건에 대한 설교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감을 이야기한다(사도 1,8).

루카는 복음서의 머리말에서 자기 작품의 주제와 집필 방법과 목적을 명시한다. 곧 교회가 수행하는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 된 “일들”을 다루는데, 첫 증인들의 전통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그들이 “전해 준” 순서대로 이야기하겠노라고 밝힌다. 그리하여 테오필로스도 지금까지 들어 온 이야기들이 진실되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고 말한다.

루카는 이렇게 역사가들이 하는 방식으로 자기 작품을 소개한다. 곧 당시 역사 저술가들의 관습을 따르는 것이다(3,1-2에 나오는 연대 서술 참조). 그러나 그가 말하려는 역사는 거룩한 역사이다. 그의 근본 의도는 지난 일들이 신앙과 관련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보여 주는 것이다. 곧 파스카 사건과 교회 생활이 밝히는 신앙이다. 이러한 의도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이 책이 복음서라고 불리게 된다.

2. 루카 복음서와 구원 역사

이 셋째 복음서도 마태오 복음서나 마르코 복음서와 전반적으로 구조가 동일하다. 곧 도입부 → 예수님의 갈릴래아 선교 활동 → 예루살렘 ‘상경기’ → 수난과 부활을 통한 사명의 완수이다. 루카 복음서의 구조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세밀하다. 곧 이러한 예수님의 역사에서 구원 역사의 시간과 공간 배열이 돋보이게 짜여 있는 것이다.

1) 도입부(1,5─4,13).

이 부분은 서로 매우 다른 두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유년기 이야기는(1,5─2,52) 루카 복음서에만 나온다. 여기에서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체계적으로 나란히 배치시키면서, 요한이 예수님께 종속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또 일련의 초자연적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님의 신비가 제시된다. 곧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1,35), 구원자, 주 그리스도(2,11),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 그리고 모든 민족들의 빛으로 선포하는 메시지이다(2,31-32). 예수님은 동시에 당신 백성 가운데 많은 이에게 배척받는 운명을 지니신 분이기도 하다(2,34). 예수님의 신비가 이 복음서의 다음 부분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전에 이렇게 이미 서두에서부터 계시된다. 그래서 이 첫째 단원은 요한 복음서의 그리스도론적 서론과(요한 1,1-18) 견줄 수 있게 된다.

둘째 단원인 사명 수행의 개시는(3,1─4,13)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처럼 세례자 요한의 사명 수행, 예수님의 세례, 그리고 유혹자 곧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첫 승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루카는 구약 성경에 속하는 요한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를 줄곧 분명히 구분한다(3,20 각주). 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 아드님을 메시아로 임명하신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한다. 이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와 직접 연관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3,23-38). 끝으로,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에서는, 수난 때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질 최종 대결이 미리 예고된다(4,13).

2) 예수님의 갈릴래아 선교 활동(4,14─9,50).

예수님의 사명 수행의 이 첫 부분은 마태 15,21; 16,13과 마르 7,24.31; 8,27과 달리 전부 갈릴래아를 배경으로 한다. 루카는 이 부분을 스승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4,16-30), 바로 이 장면이 뒤따르는 복음서 이야기 전체를 미리 보여 주는 기능을 한다. 곧 구약 성경의 바탕 위에서, 그리고 성령의 영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예고, 이교인들에게 베풀어질 구원의 암시, 동포들의 배척과 살해 시도이다. 이후에 펼쳐지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 이야기는 그분의 행적(무엇보다도 기적)과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과 가까워지는 첫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

마르 1,16─3,6의 순서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첫째 단원은(4,31─6,11) 예수님께서 기적과 논쟁을 통해서 군중, 첫 제자들, 그리고 적대자들과 대면하시는 이야기를 한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없지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병행구1)를 볼 수 있는 둘째 단원은(6,12─7,50) 열두 사도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행복 선언’을 필두로 하는 설교로 이루어진다.

셋째 단원에서(8,1─9,50) 루카는 다시 마르 4,1─9,40을 따라간다(마르 6,45─8,26에 대해서만은 병행구를 제시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열두 제자가 예수님의 사명 수행과 밀접히 결합된다. 이들은 이 단원의 시작인 8,1에서부터 언급된다. 이어지는 비유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청중 가운데에서 비유만 듣는 이들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8,10) 이들이 구분된다. 그리고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일어난 기적은, 그들에게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8,25). 또한 이때에 열두 제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아 파견되고(9,1-6),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한다(9,12).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에게 당신 자신에 대하여 발언하기를 촉구하시는데, 베드로가 그분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한다(9,20). 그러나 예수님의 신비에 관한 이 첫 발언은 곧바로 그 내용이 보충된다. 먼저 스승님 자신이 당신을 죽을 운명의 메시아로 규정하신다(9,22).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 하느님 아버지 자신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임을 선포하신다(9,35).

3) 예루살렘 ‘상경기’(9,51─19,27).

예수님의 사명 수행의 이 둘째 부분은 루카 복음서의 구조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여기에 나오는 많은 사료를 마태오 복음서 곳곳에서도 볼 수 있고, 더러는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보게 된다. 그러나 루카만이 그 사료들을 여행이라는 틀에 맞추어 소개한다.

이 여행 이야기는, 예수님의 여정을 이제 곧 일어나게 될 파스카 사건에 맞추는 장엄한 문장으로 시작한다(9,51). 스승님께서는 예루살렘, 곧 구원이 실현되어야 하는 거룩한 도성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신다. 13,22와 17,11에 나오는 예루살렘에 관한 다른 두 가지 언급을 경계로 이 부분을 세 단원으로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순전히 형식적인 것에 그친다. 이렇게 구분된 세 단원 사이에 지리적인 연속성도 없고 교의적(敎義的)인 발전도 없기 때문이다. 이 여행 이야기는 지리적 장소의 순서대로 전개되지 않는다(10,13-15와 13,31-33의 배경은 여전히 갈릴래아인 것으로 여겨지고, 13,34-35는 예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에서 설교하셨음을 전제한다). 곧 이 여정은 인위적이고 문학적인 틀에 불과하다. 루카는 자기의 사료들을 이 틀 안으로 모으고, 파스카 신비의 성취에 비추어 그것들을 배치시킨다.

이 부분에서는 전체적으로(10,21-24; 12,49-50; 18,31-33; 19,12-15는 빼고) 기적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또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보다 그분의 권유가 더 비중 있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스승님께서는 계속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시고(11,37-52), 당신의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신다(12,51─13,9). 그러면서도 그들이 당신의 촉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내다보신다(13,23-35; 14,16-24). 그러나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에게 관심을 쏟으시어, 그들의 사명을 확정 지으시고(9,52─10,20) 기도와(11,1-13) 자기 포기를 권고하신다(12,22-34.51-53; 14,26-33; 16,1-13; 18,28-30). 제자들에게 내리시는 이러한 가르침 가운데에서 많은 부분이, 예수님께서 그들 사이에 계시지 않게 되는 상황을 상정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들어 올려지신다’(9,51)는 사실로 결정된 이 여행의 시각에 상응하는 것이다. 곧 제자들이 성령을 청하고(11,13),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스승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12,1-12), 그분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12,35-40; 17,22─18,8; 19,11-27),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을 돌보아야 하는 시간이 온다는 것이다(12,41-48).

루카는 18,15에서부터 다시 마태오와(19,15) 마르코의(10,13) 노선을 따라간다. 그러나 끝부분에 자캐오의 구원과 특히 ‘미나의 비유’를 덧붙인다(19,1-10.11-27). 루카 복음서의 편집에서는 이 비유가, 예루살렘과 또 이 도시 주민이 배척하게 될 임금의 비극적인 대면을 준비하는 구실을 한다(19,11 앞 소제목 각주 참조).

4) 수난과 부활을 통한 사명의 완수(19,28─24,53).

예수님의 사명 수행의 이 셋째 부분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성취되는 구원을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십자가라는 비극적 사건에서 예수님을 상대하는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대표로 등장한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초기 장면에서부터 이러한 사실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19,29-48). 곧 스승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임금으로 드러내시고(19,35-38), 임금으로 오시는 당신을 배척하는 이 고을을 두고 눈물을 흘리신다(19,41-44). 그리고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시고 또 그곳에서 날마다 사람들을 가르치시어, 성전에 대한 당신의 권한을 보여 주신다(19,45-48).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처럼 세 단원으로 이루어졌지만, 루카는 자기만의 고유한 의미를 끌어들인다.

성전에서의 가르침은(20─21장)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과 사람의 아들의 재림 예고로 끝을 맺는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 예고의 대상이다(21,5 앞 소제목 각주와 21,20 앞 소제목 각주 참조).

수난사는(22─23장) 다른 복음서들과 똑같은 구조로 전개된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이야기는 열두 제자에게 내리시는 가르침, 곧 그들이 종으로서 해야 할 역할,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서 그들에게 주어질 권능, 스승님이 떠나심으로써 그들에게 야기될 새로운 상황에 관한 가르침 때문에 길어진다(22,24-38). 그리고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고통은 그분의 의로움과 그분께서 당하시는 순교의 모범적인 가치를 부각시킨다. 메시아께서 모욕과 굴욕을 겪으시는 가운데 그분의 왕권이 이미 시작되었음이 확인된다(22,69 각주; 23,37 각주 참조).

부활절 이야기는(24장) 다른 복음서와 달리 전부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나타나셨다는 옛 전통이 언급되지 않는다(마태 26,32; 28,7.10.16-20; 마르 14,28; 16,7; 요한 21). 이는 틀림없이 사도행전과 대칭을 유지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수난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당신의 영광으로 끌어들이실 목적으로 의도하신 여정이라고 해석한다(24,26).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뜻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서(24,25-27.44-46), 예수님 자신이 이미 예고하신 바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24,7).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이 의심을 버리게 하시고(24,36-43), 그들에게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신다(24,47-49). 이리하여 루카 복음서는 부활하신 분께서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승천에 관한 첫째 이야기로(24,51) 끝을 맺는다(둘째 이야기는 사도행전 첫 부분에 나온다).

이렇게 루카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주님이신 예수님의 신비가 점진적으로 계시되는 모습, 그리고 장차 그분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될 제자들이 그 계시에 완만하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3. 예수님 시대와 교회 시대

1) 루카는 자기의 두 번째 작품을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할애하려고 의도하였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와 교회 시대의 차이를 마태오나 마르코보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루카 복음서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예수님의 행적을 보여 준다. 물론 이 복음서 역시 구원의 메시지에 담겨 있는 보편주의적 목표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미래의 예고(2,32; 3,6; 13,29; 14,16-24) 또는 예표론적(豫表論的)인 예시(豫示)에서만 이루어진다(3,23-38; 4,25-27; 7,9; 8,39; 10,1; 17,11-19). 부활하신 분께서는 마침내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신다(24,47-48).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들은 이 사명을 성령의 은혜를 입어 수행하게 된다(24,49. 그리고 12,12 참조). 그러나 복음서 안에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만이(1,35) 유일하게 성령의 권능을 지니고 행동하신다(3,22; 4,1.14.18; 10,21).

유년기 이야기에서 시메온은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배척하리라고 예고한다(2,34-35). 이 배척은 복음서 내용이 펼쳐지면서 조금씩 일어나지만, 십자가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23,34 참조). 성령께서 강림하신 뒤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들을 다시 회개와 구원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2) 루카는 이렇게 예수님 시대와 교회 시대를 명백히 구분하여, 역사 안에 펼쳐지는 하느님 위업의 여러 단계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둘러싼 사건들을 이런 식으로 서술하면서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 한 번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결코 잊지 않는다. 그는 복음서 시작 부분에서부터 구원이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한다(2,11; 3,22; 4,21. 그리고 5,26; 19,9; 23,43 참조). 이 세상에 생존하시는 첫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1,35) 구원자이시며(2,11. 그리고 1,69.71.77; 2,30; 3,6 참조) 주님이시기 때문이다(2,11. 예수님을 이 칭호로 일컫는 것에 관한 7,13 각주도 참조). 그리고 그분의 설교는 가난한 이들과 하층민들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로 시작한다. 이들이 바로 이 메시지의 특권적 수신자이다(4,18. 그리고 7,22; 10,21 참조).

루카는 예수님 시대를 서술하면서 이미 교회까지 염두에 둔다. 그는 열두 제자를 마태오나 마르코보다 훨씬 더 자주 ‘사도’라는 칭호로 부른다(6,13 각주 참조). 그러면서 그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임무(9,12; 12,41-46; 22,14-38), 그리고 그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에 도와줄 협조자들까지 생각한다(10,1. 그리고 8,2-3.39 참조).

루카는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제자들이 “날마다”(9,23; 11,3; 17,4) 지켜야 하는 생활 규칙을 보여 주려고 애쓴다. 그는 곧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회개(5,32; 13,1-5; 15,4-32; 특히 7,36-50; 19,1-10; 23,39-43의 장면),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 속에 표현되어야 하는(12,2-12; 21,12-19) 믿음(1,20.45; 7,50; 8,12-13; 17,5-6; 18,8; 22,32; 24,25), 예수님께서 줄곧 보여 주시는 본보기에 따라 바쳐야 하는(3,21 각주 참조) 기도(11,1-13; 18,1-8; 21,36; 22,40.46),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안에서 핵심이 제시되는 애덕 등을 강조한다(6,27-42. 그리고 10,25-37; 17,3-4 참조). 루카는 이 애덕을 가끔 자선으로 드러낼 것을 제안하는데(11,41 각주 참조), 그렇게 하면 재물의 포기라는 이상도 동시에 실현된다는 것이다(5,11 각주; 14,33 각주 참조). 이러한 것들이 제자들에게 엄격히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루카 복음서는 다른 모든 복음서보다도 더 기쁨이 넘쳐난다. 곧 구원이 예고될 때(1,14.28.41.44; 6,23; 8,13), 예수님께서 오심에 따라 이 구원이 드러날 때(1,47; 2,10), 기적이 일어날 때(10,17; 13,17; 19,37), 하느님에게서 메시지를 받을 때(10,21), 죄인들이 회개할 때(15; 19,6),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기쁨이 터진다(24,52). 하느님의 구원은 사람들을 기쁨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3)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다시 오실 것을 예고하시는데, 루카는 이러한 전망을 교회 시대가 끝나는 시점에 배치한다(12,35-48; 17,22-37; 18,8; 19,11-27; 21,5-36). 그러나 현재의 구원, 예수님께서 파스카 주님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작용이 강조되는 루카 복음서에서는, 재림(再臨)이 임박하였다는 긴장감이 완화된다(17,23 각주 참조). 재림에 대한 희망은 온통 오늘의 구원에 대한 기쁨에 잠겨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예고되는 예루살렘의 멸망이(19,27 각주 참조), 루카 복음서에서는 더 이상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이 멸망은 역사적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내린 징벌일 따름이다.

4. 루카의 문학적 작업

루카는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 공통된 사료를 많이 활용하지만, 자기의 고유한 자료도 상당히 많이 이용한다(‘공관 복음서 입문’ 참조). 루카의 이 고유 자료들은 매우 다양하다. 곧 유년기 이야기(1─2장), 몇 가지 기적(7,1-17; 13,10-17; 14,1-6; 17,12-19), 회개 이야기(7,36-50; 19,1-10; 23,40-43), 헤로데의 개입(13,31-33; 23,8-12. 그리고 8,3 각주 참조), 부활 이후의 발현(24,13-35.36-53) 등이다. 여러 가지 가르침, 그리고 특히 일련의 비유들도 여기에 속한다. 곧 착한 사마리아인(10,29-37), 벗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11,5-8), 어리석은 부자(12,16-21),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13,6-9), 탑을 세우는 이와 출전하는 임금(14,28-33), 되찾은 은전과 되찾은 아들(15,8-10.11-32), 약은 집사(16,1-8), 부자와 라자로(16,19-31), 해야 할 일을 하는 종(17,7-10),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18,1-8),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18,9-14) 등이다.

루카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 사이에 비슷한 면들이 있다는 사실이 자주 지적되어 왔다. 이 두 복음서가 같은 본문들을 따라간다기보다, 전체적으로 공통된 노선들을 지닌다는 것이다. 곧 (야고보의 아들) 유다 사도, 마르타와 마리아, 한나스 대사제 같은 인물들의 등장, 기적적인 고기잡이와 베드로에 대한 권한 부여의 연계, 사탄이 부추겼다는 유다의 배신,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하신 대담, 예수님께서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하신 메시아적 선언,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함,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부활을 현양(顯揚)과 성령 강림의 원천으로 이해함 등이다. 이러한 공통성은 복음서 이전 전통의 차원에서 접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루카는 전통 사료 전체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문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그가 자기 책을 구성하면서 사료들을 배치한 ‘순서’에서 이미 알아보았다. 이는 루카 복음서의 구성 요소들을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의 병행구들과 비교해 보아도 식별해 낼 수가 있다. 곧 루카 복음서의 어휘는 다른 복음서보다 훨씬 다양하고, 신약 성경의 다른 모든 책보다 더 풍부하다. 그는 또 자기의 언어를 다양한 주제에 유연하게 적용시킨다. 마르코 복음서와 일치하는 이야기들에서는 그리스 말을 마르코보다 더 정확히 구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특히 공을 들인 여러 구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1,1-4; 24,13-35). 그러나 루카 복음서의 고유한 여러 본문,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는 셈족 말식 표현도 많이 들어 있다. 그는 그리스 말 구약 성경의 표현들을 즐겨 빌려 쓰는데, 무엇보다도 많은 학자가 진정한 모작(模作)으로 여기는 유년기 이야기가 특히 그러하다.

그가 명확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단락이 시작하는 곳에 도입부를 붙인다거나(3,15; 4,1; 5,1.12.17.36 등) 맺음말로 단락의 종결을 표시하는 데에(3,18.20; 5,15-16; 9,36.43 등) 공을 들이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가끔 비유나(13,18-21; 14,28-32; 15,4-10) 특정 주제에 관한 말씀을 짝지어 놓는다(4,25-27; 11,31-32; 13,1-5; 17,26-30.34-35). 그러나 이러한 취합은 많은 경우에 루카 복음서의 출전(出典)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루카의 문학적 재능은 무엇보다도 말 한마디로 상황의 비장성을 표현하는 서술의 절제성에서 잘 나타난다(2,7; 7,12; 8,42; 9,38 등). 또 나인의 기적(7,11-17), 죄 많은 여자(7,36-50), 착한 강도(23,40-43),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이루어지는 스승과 제자들의 만남(24,13-35),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든가(10,30-37) 되찾은 아들의 비유 또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15,11-32) 같은 데에서 느껴지는 극적인 긴장감으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늘 섬세함을 견지하는데, 독자들을 예수님께 접근시킬 때에 특히 그러하다. 그는 마르코 복음서의 더러 거친 표현들을 피한다(루카 4,1; 8,24.28.45 등).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에는 그들만의 특별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5,5 각주 참조).

전통 사료에 대한 루카의 이러한 문학적 작업은, 가끔 독자들에게 그가 하는 이야기의 역사적 가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복합성을 띠고 있어서, 루카가 사도행전에서 채택한 방법론까지 함께 살펴볼 때에야(사도행전 ‘입문’ 참조) 비로소 온전히 다룰 수가 있다. 복음서만 고찰해 보면, 먼저 루카가 자기의 의도를 밝히는 것을 보게 된다. 곧 내용이 충실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정성을 들여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1,1-4). 이로써 이 복음서에 들어 있는 많은 사료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루카는 완전히 자기의 신앙에 입각하여 예수님의 일을 고찰한다. 그래서 역사가는 루카 복음서를,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개인적 해석이라고 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언행을 이야기하면서 루카는 무엇보다도 그것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때로 그 언행의 시간적 순서라든가(4,16-30; 5,1-11; 24,51) 지리적 상황에 대해서는(10,13-15; 13,34-35; 24,36-49)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장면들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구성하기도 한다(1─2; 4,16-30; 5,1-11 등). 그가 가장 먼저 심혈을 기울이는 바는 과거의 일들을 외형적으로 정확히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로서 예수님의 역사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롭게 과거 사건들의 뜻을 풀어 가며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의무감도 느낀다. 그는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 이 작업을 해 간다.

5. 루카 복음서의 기원

셋째 복음서의 기원에 관하여 말하려면, 본디 이 작품과 밀접히 연관된 사도행전의 사료들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루카의 첫 작품이 제시하는 자료들을 모아 보는 데에 국한하기로 한다.

루카 복음서의 저술 시기를 규명하기 위하여, 학자들은 가끔 루카가 예루살렘의 멸망에(19,27 각주 참조) 어떠한 위치를 부여하는지, 특히 이 사건을 마태오와 마르코가 배치한 종말론적 전망에서부터 어떻게 분리하는지를 부각시킨다. 루카는 로마의 장수 티투스 휘하의 군대가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한 사건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19,43-44; 21,20-24 참조). 그러므로 루카 복음서는 이 시기 이후에 저술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 복음서의 편집을 더러 80-90년경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보다 더 이전으로 잡는다.

1,1-4가 밝히는 바와 같이 이 복음서가 (가상 인물이든 실제 인물이든) 테오필로스에게 헌정되었다면, 이 작품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이 인물 너머로 그리스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표지를 지적한다. 곧 이 복음서의 언어, 팔레스티나 지리에 관한 설명(1,26; 2,4; 4,31; 8,26; 23,51; 24,13), 유다인들의 관습에 관한 해설(1,9; 2,23-24.41-42; 22,1.7), 율법 논쟁에 관한 무관심(이 복음서에는 마태 5,20-38; 15,1-20; 23,15-22의 자료에 상응하는 것들이 들어 있지 않다.), 이교인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받아들이기를 매우 힘들어하는(사도 17,32; 1코린 15) 부활하신 분의 육체적 현실성에 관한 강조(24,39-43) 등이다.

셋째 복음서의 저자 자신이, 그가 구사하는 언어라든가 지금까지 지적되어 온 여러 특징으로 보아 그리스계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이 저자가 팔레스티나의 지리라든가(4,29 각주 참조), 그 고장의 여러 가지 관습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에 자주 주목하여 왔다(1,59 각주; 5,19 각주; 6,48 각주 참조).

2세기 말의 이레네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어떤 전통에 따르면, 바오로가 콜로 4,14; 필레 24; 2티모 4,11에서 언급하는 의사 루카가 바로 이 복음서의 저자이다. 많은 학자들도 이 복음서에서 질병이 상세히 서술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저자의 직업이 의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결정적일 수는 없다. 그의 어휘는 당시 교양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와의 관계에 관해서, 이 복음서는 그것을 밝혀 줄 몇 가지 용어만을 제시할 뿐이다(8,12 각주; 8,15 각주; 18,1 각주; 18,14 각주; 21,28 각주; 22,19-20 각주 등 참조). 이 문제에 답을 내놓으려면 사도행전의 자료들도 고찰해야 한다.

6. 오늘날의 루카 복음서

루카는 신약 성경 저자들 가운데에서 현대인에게 아마도 가장 접근하기 쉬운 복음 해설가일 것이다. 사실 그의 그리스적 사고방식과 문화, 명확성을 좋아하고 설명하려고 애쓰는 성향, 감수성과 문학적 재능 등이 현대인에게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루카는 무엇보다도 현대의 독자들이 예수님의 신비에 다가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과 이교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함께, 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만민의 구원자로 보여 준다. 또 그분을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시고, 동시에 그들을 받아들이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생명의 주님으로 드러낸다.

주석
1

앞으로 ‘병행구’라는 용어가 자주 쓰일 것이다. 이는 ‘공관 복음서(共觀福音書) 병행구’의 준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 같은 내용이 공관 복음서, 곧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모두에 또는 두 복음서에 똑같이 나오거나 약간 다르게 나오는데, 이 공통된 구절을 ‘병행구’라고 일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