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에제키엘서

입문

에제키엘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정도로 천성이 변화무쌍하고 생각이 풍부하며 복잡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을 훑어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 하느님 백성의 운명을 밝혀 주는 소중한 영적 체험을 했던 사람을 증언해 준다. 바로 이것이 에제키엘서의 특이성이라 하겠다.

1. 에제키엘서의 구조

에제키엘서의 구조는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보인다.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에(1,1─3,21) 이어 예루살렘의 심판과(3,22─24,27) 이민족들에게 내리는 징벌과(25─32장) 패망한 백성의 재건을(33─37장) 알리는 신탁들이 뒤따르며, 먼 미래를 내다보는 신탁들로 마감된다(38─48장). 이 마지막 단계에서, 우선 무시무시한 적대자들을 거슬러 싸우는 하느님 백성의 궁극적인 전쟁 이야기가 펼쳐지며(38─39장), 이어서 하느님 백성의 새로워진 미래 수도가 될 높은 산의 윤곽이 드러난다(40─48장).

그러나 표면상 매우 논리적으로 보이는 이 구조를 벗어나면, 무질서로 규정할 만한 자유분방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예컨대 34장에서는 목자와 양 떼의 주제들이(예레 23,1-6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러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1장에는, 서로 잘 부합하지 않고 분명 중복되는 요소들이, 또는 문법의 일관성을 무시하고 덧보태진 세부 사항들이 뭉쳐 있다.

이러한 부조화에 대한 큰 책임은 에제키엘의 제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논리성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스승의 신탁들을 토막 낸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3,22-27; 4,4-8; 24,15-27과 33,21.22는 계속되는 한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때로 서로 직접 관련이 없는 신탁들을 인위적인 연결 고리로 묶어 놓기도 한다. 예컨대 21장에서는 “칼”이 서로 무관한 단락들을 잇는 ‘연결 고리’로 쓰인다. 곧 주님의 칼(6-12절), 잘 갈아 날이 선 칼(13-22절), 바빌론 임금의 칼(23-32절), 암몬인들을 치는 칼(33-37절) 등이 그것이다. 이 제자들은 또 같은 신탁을 여러 번 되풀이한 것으로도 보인다. 예컨대 ‘주님의 의로운 길’에 대한 생각은 18,1-32와 33,10-20에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에제키엘이 이 책의 이러한 현재 상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에제키엘 스스로, 자신이 이미 쓴 문장들에 갖가지 세부적인 내용들을, 그리고 기존의 장들에 갖가지 단락들을 때로는 너무 많이 채워 넣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애초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환시 이야기라든가(1─3; 8─11장) 예언 몸짓에(4,4-17) 관한 내용 등을 보충하였다. 이는 한편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거의 병적이라 할 만한 그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낙심하여 멍하니 있는가 하면(3,15) 벙어리 증세나(3,26) 마비 증세를(4,4-8)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천성은 그를 극단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이끌리게 하였다. 그는 소심하면서도 마음이 급하여 그것이 숭고한 일이든 저속한 일이든 따지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며, 기이한 것들에 매료되어 있거나 초현실적인 것에 취해 있었다(17,1-10의 ‘독수리’나 32,1-8의 ‘용’에 관한 시 참조). 예언자는 또한 양심상의 문제를 까다롭게 따지듯 냉철한 식별을 해내려 시도하고(18장과 33장) 지리에 관한 자료를 질서 정연하면서도 단조롭게 서술하며(47장과 48장), 건축에 관한 사항을 무미건조하게 열거하거나(40장과 42장) 지루하기 그지없는 세부 규정들을 제시하면서(44장과 46장) 자신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화려한 문장력을 숨겨 놓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주요한 역사적 줄기를 따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 나가는데, 16장과 19장의 배경이나 이민족들에 관한 신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인류의 원조와 에덴동산(28장), 우주의 나무(31장), 저승의 세계와(32장) 같은 신화적인 요소를 상기시키는 무한하면서도 점점 사라져 가는 내용들을 포함한 풍부한 자료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2. 에제키엘의 활동

그 구조와 문체로 이미 한 인간의 윤곽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결국 구체적인 한 인물, 예언자 에제키엘을 만나게 된다. 그는 예루살렘의 함락을(기원전 587년) 알고 있던 사람으로서 크바르강 가에서 유배자들을 대상으로 예언 활동을 이어가고, 그곳에서 활동을 마치기에 앞서 예루살렘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했다는 인상을 자주 준다. 그러기에 예언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성전에서 자행된 우상 숭배를 그렇게 상세하게 기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8장).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예언자가 예루살렘에서 이미 예언 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에제키엘은 오로지 바빌론 땅에서, 그것도 텔 아비브라는 도시 가까이에서 예언 활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하며, 예언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첫 번째 팔레스티나 침략 때에(기원전 598년), 그러니까 예루살렘 함락 이전 바빌론으로 압송되었다고 본다. 상당수의 신탁에는 그 날짜가 표기되어 있는데, 첫 번째 환시의 날짜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1,1과 각주; 2절 참조), 다른 것들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환시는(8,1)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곧 에제키엘의 유배) 제6년, 곧 기원전 592년으로 표기되어 있고, 솥에 관한 신탁은(24,1) 제9년, 곧 기원전 589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해 12월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 다른 것들로는 제10년, 곧 기원전 588년 이집트의 파라오가 불리한 형국에 놓여 있었을 때로 되어 있는 것이 있고(29,1), 또 제11년, 곧 기원전 587년(26,1), 제12년, 곧 기원전 585년 초(33,21), 제25년, 곧 기원전 573년(40,1), 끝으로 제27년, 곧 기원전 571년(29,17)이 있다.

3. 에제키엘서의 가르침

이렇게 에제키엘은 바빌론 땅에서 예언 활동을 펼치지만, 그는 본디 사제였던만큼 제사와 전례와 규정과 성소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 정신을 끝까지 지켜 나간다(40─48장).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갑자기 뒤바뀐 곳이 바로 그 바빌론 땅이다. 두 가지 사건이 전개되는데, 하나는 하느님 영광의 현현으로서, 이것이 사제인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만들며,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서, 이것이 멸망의 선포자 에제키엘을 구원의 예고자로 변화시킨다.

1) 하느님 영광의 현현

에제키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힌다. 이 영광은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나는데(1,28; 3,23; 8,4; 10,1; 43,2), 그때마다 에제키엘은 그 모습을 보고서는 대경실색하며 실신 상태에 빠진다(3,15).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본 것인가? 먼저 폭풍이 휘몰아치며 거대한 구름 한가운데에서 번쩍거리는 불이 보이고, 딱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물들이 나타난다. 이 날아다니는 네 생물은 궁창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위에는 어좌 하나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어좌에는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인 채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다. 이것이 주님 영광의 모습이다(1,4-28).

결국 에제키엘은 그의 대선배 이사야가 본 환시와 같은 것을 본다. 그러나 이사야와는 다른 맥락에서 다른 특징을 지닌 환시를 보게 된다. 이사야는 주님의 초월성, 온 세상의 임금이신 분의 영광에 대한 숨 막힐 듯한 계시를 받는다(이사 6,3). 그런데 온 세상의 임금이시라는 점이 에제키엘의 원래 서술에는 직접적으로 들어 있지 않다. 그 대신 그는 자기의 원초적 직감을 흐리게 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내용들을 첨가시킴으로써, 이 진리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로써 바빌론의 신화에서 따온 환상적인 짐승들에 대한 긴 서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언자는, 바빌론인들이 우주의 모든 힘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겼던 이 짐승들을 주님을 섬기는 존재로 배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환각을 일으킬 듯한 바퀴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들도 나름대로 주님의 영광이 어떤 곳으로든 거침없이 움직이면서 전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계시로 압도당한 에제키엘은 자기의 왜소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의 영광 앞에서, 비천하고 하찮은 사람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는, 서 있을 수조차 없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될 수밖에 없다(1,28; 2,2; 3,14-17.22-23). 그러한 그에게 주님의 손이 무겁게(3,14) 내리시고(1,3; 3,22; 8,1; 33,22; 37,1; 40,1), 또 그분의 영이 내리시어(2,2; 3,24; 11,5) 그를 들어 올리신다(3,12.14; 8,3; 11,1.24; 43,5).

그러나 예언자는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나와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것을 본다(11,22.23).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거처인 시온을 떠나시는 것이다. 유다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듯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비극적인 결별의 동기를,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에 번지는 전염병 같은 이 죄악의 무게와 넓이와 깊이를 밝혀내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이 죄는 사람들의 피를 쏟는 범죄이며 폭력 행위이다(7,23; 9,9; 16,36; 18,10 등). 이러한 죄를 예언자는 적어도 한 번, 하느님에 대한 불경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36,18). 에제키엘이 가장 큰 죄로 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14,1-8). 그는 이 불경이 이스라엘 땅의 모든 언덕 위에서, 모든 큰 나무 밑에서(6,3.6.13; 16,16; 20,28.29) 자행되는 모습을 본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8장). 그는 성전의 안뜰 대문 어귀(3-6절), 뜰(7-13절), 북쪽 대문 어귀(14절과 15절), 안뜰성소와 제단 사이(16절) 등 곳곳에서 우상 숭배가 벌어지는 표시들을 확인하게 된다. 백성이 일상생활에서 저지르는 부패와 부정과 부도덕 또한 이스라엘의 죄악이다. 이것을 예언자는 성소에서 사용되던 죄의 고백 형식을 빌려 서술한다(18,5-9; 2,3-12.23-30).

에제키엘은 죄가 역겨운 짓이며 혐오스러운 짓이라고(6,9; 16,22.52) 계속 되풀이하여 말한다. 그것은 배우자를 배신하는 부정이고 간통이며 불륜이다. 예언자는 이 주제를,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버려진 아기의 비유’에서 전개시킨다. 이 여자 아기는 받아 주고 좋아해 주는 이 없이 피투성이로 들판에 버려지지만, 주님께서 발견하여 살려 주시고 양녀로 받아들이신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리신다. 그러나 이 여자는 결국 ‘뻔뻔스러운 탕녀’로 전락하고 만다(16장). 에제키엘은 오홀라(북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오홀리바(남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라는 두 자매, 몰염치한 불륜 행위에 자신을 내맡기는 이 두 여자의 역사로써, 이 주제를 되풀이하여 설명한다(23장).

결국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빠져 버린 이 추잡한 부정의 뿌리가 교만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소돔의 주민들(16,49-50), 티로의 임금(28,2.5.17), 이집트인들(30,6.18), 그리고 파라오들이(32,12; 35,13) 지은 죄이며, 자기의 아름다움을 뽐내는(16,15.56) 아내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악이기도 하다(7,20.24; 33,28). 이는 또한 당신 뜻에 따라 당신 백성을 인도하라는 하느님의 분부를 저버린 유다 임금이 저지른 죄악이다(21,30-31).

한편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은,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이고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로서, 이교도적인 배경에서 생겨났다(16,3과 각주; 16,45 참조). 예루살렘의 전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배신은(20장) 결국 타고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손을 들고 맹세하시면서,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20,5) 하고 당신을 알려 주셨지만, 이스라엘인들의 이 이집트 체류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 곧 이스라엘인들은 그 뒤에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우상 숭배에 대한 열정을 지니게 된 것이다(20장).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사명을 받고,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에 예언자로 내세워진다. 하느님의 말씀은 음식처럼 예언자 안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단맛으로 그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3,2.3). 그러나 그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3,11) 하고 외칠 때마다, ‘가시로 둘러싸이고 전갈 떼 가운데로 빠져 들 수 있음’(2,6 참조)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사실은 유배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아무리 반항한다 하더라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2,5)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에제키엘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파수꾼’이다. 에제키엘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악인이 자기의 악한 길을 버리고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인에게 생명을 지키려면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해야 한다(3,16-21). 이는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것과는 달리(18,1), 죄를 지은 자만 죽고 아들은 아버지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18,4-20). 의인이든 악인이든 저마다 자기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혼자 책임을 진다.

그러나 예언자가 만일 악인에게 경고하기를 게을리하면, 적절한 질책이 없어 죽어 가는 이 악인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3,18). 예언자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 백성이라는 집단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구원을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예언자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당시에는 예언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시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자신만의 영감을 따라,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예언이라고 선포한다. 이들은 마치 벽에 균열이 생겨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는데도, 거기에다 회칠만 하는 미장이와 비슷하다. 이 예언자들은 백성의 죄악을 치유하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평화의 메시지만 공포하는 것이다(13장).

2) 예루살렘의 멸망

백성의 죄악은 무서운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이 심판이 다가옴을 보고서는, 말과(7; 9─11장) 행동으로써(4─5장) 그러한 사실을 지칠 줄 모르고 예고한다. 이 예고는 어떤 사람이 와서 불행이 극에 달했다고, 곧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불에 타 버렸으며 생존자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갔다고 소식을 전하는 그 슬픈 아침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에제키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이다. 그의 고통을 조금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분부를 받기는 했지만(24,15-27), 그는 동포 유배자들이 겪는 것에 결코 못지않은 아픔을 느낀다. 사실 그들은 고통과 절망이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와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스러져 가는데, 어떻게 산단 말인가?”(33,10),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37,11)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에제키엘은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들고 나온다. 그는 우선, 불행에 처한 이스라엘인들을 빈정거림으로써 그들의 아픔을 더욱 크게 만든 나라들에게 징벌을 예고한다. 이스라엘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언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과 어려운 언어를 쓰는 많은 민족들”(3,6)이, 이스라엘보다 말을 더 잘 들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예견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민족들이 하느님의 심판정으로 소환된다(25─32장). 그 가운데에서 단연코 이집트가 첫째 피고이다(29─32장). 이집트는 유다 왕국의 임금 치드키야가 맹세와 계약을 저버리고(17,19)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도록 유인함으로써(17,15), 유다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한편, 티로는 적군에게 짓밟힌 예루살렘에 대해서 부당한 뜻을 품는다(26,2). 그리고 팔레스티나 땅에 있는 이웃 민족들, 곧 암몬, 모압, 에돔, 그리고 필리스티아가 모두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움을 품는 잘못을 저지른다(25장).

그런데 지금까지 불행의 “예표”(12,6)로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을 예고해야 했던 예언자는, 이제 구원의 선포자로 변모한다. 이미 이전의 신탁들에도 위로의 말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곧 심판과 멸망에서 살아남을 “남은 자들”의 주제가 여러 구절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스쳐 지나가듯이 언급되기 때문에, 그것이 부차적으로 첨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예루살렘 주민들의 철저한 멸망을 암시하는 에제키엘의 상징 행동은(5,1-2) 5,12-13에서 설명되지만, 예언자가 말하는 의도에 잘 들어맞지 않으면서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5,3-4의 상징 행동에 대해서는 뒤에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이 구절이 본래의 신탁에는 들어있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반면에 9장에서는 이 주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처형되기 전에,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9,4)을 구분해 내는 작업이 선행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 왕국의 몰락과 예루살렘의 멸망 뒤에는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6,8-10; 9,4-8; 11,13; 12,16; 14,22.23). 그러나 이들은 보잘것없고 약할뿐더러(11,3 참조), 어쩌면 예루살렘에 쌓아 놓은 시체들과 다를 바 없다(11,7). 그래서 “남은 자들”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유배자들이 지니던 그나마 가냘픈 희망마저 잃어버리지 않도록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의 깊은 “파수꾼”인 예언자 에제키엘은 결국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13,5) 올라선다. 폐허 위에 올라서서 전혀 새로운 시작을 선포한다. 곧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다. 바로 바싹 말라 버린 해골들이 다시 살아나는 신기한 장면을 전한다(37,1-14).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가 줄어들고 또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생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해골 더미로 전락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시어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이다.

유배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생명을 다시 얻은 백성, 그러나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생명을 받은 백성으로 태어난다.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시는 주님께서(12,25.28; 17,24; 22,14; 36,36; 37,14)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36,24-28).

이러한 이상적인 삶은 그동안 남북으로 갈라졌다가 이제 다시 통일된 나라에서 실현된다(37,15-28). 이 새 왕국의 백성은 더 이상 자격 없는 지도자들이 자행하는 억압과 착취의 희생물이 되지 않는다(34,1-10). 주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어 당신의 양 떼를 잘 돌보신다(34,11-16). 그리고 전에 임금으로 갖가지 특권을 누리던 다윗의 후손들은 그저 백성 가운데에 한 제후가 될 뿐이다(34,24).

3) 궁극적 전망

예언 활동을 마치면서 에제키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우선 그는 이 백성이 “마지막 때”(38,8)에 모든 원수들에게서 승리를 거두게 됨을 본다.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스라엘과 맞선 적군 앞에는 호전적인 마곡 땅의 곡, 곧 “메섹과 투발의 우두머리 제후”가 서고, 그 뒤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시대의 원수들이 서 있다. 이스라엘은 이들과 전투를 벌여 그들을 멸망시킨다. 그러고서는 그들의 무서운 무기들을 땔감으로 쓴다.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들의 시체들을 맹금과 들짐승에게 먹이로 내준다. 그리고 시체가 이스라엘 땅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사람들을 시켜 일곱 달 동안 적군의 주검들을 찾아 땅에 묻게 한다(38─39장).

끝으로 에제키엘은 이렇게 승리한 이스라엘이, 역시 새롭게 된 팔레스티나 땅에 정착하리라고 예고한다. 이 땅은 엄격히 수학적으로 경계가 그어지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분할된다(47─48장). 그리고 생명에 가장 중요한 물은 이 땅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성전에서 흘러나온다(47장). 이 성전은 매우 특별한 장소로서, 바로 이곳에서, 성전으로 돌아온 주님의 영광을(43,1-12) 찬미하는 전례가 모든 규정에 따라(40; 46장) 거행된다. 그리하여 성전은 이제부터 이 새로운 백성이 영위하는 삶의 진정한 중심이 된다. 이곳이 어떤 신비의 심장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자가 자기 예언서의 마지막에 한 말, 곧 야훼 삼마(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라는 표현으로밖에 엿볼 수 없는 그런 신비이다(4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