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요한 서간

입문

1. 집필 동기

요한의 서간들, 적어도 1서와 2서에는 집필 동기와 필자에 관하여 실제적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서간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수신인들이 처한 상황이라든가 이 서간들을 쓰게 된 이유 등을 어느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우선 몇몇 단락에서 논쟁적인 어조가 쓰인다는 데에서, 이 서간을 받는 여러 공동체가 최근에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계시와 병존할 수 없는 이단이 퍼지면서 신앙의 순수성이 위협을 받는다. 이러한 오류를 전파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 예언자”(1요한 4,1), “거짓말쟁이”(1요한 2,22), “속이는 자”(2요한 7)라고 불린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와 이 세상에만 속한 자들로서(1요한 4,5), “사람을 속이는 영”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1요한 4,6).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동체의 일원이었다(1요한 2,19. 그리고 2요한 9 참조).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교리를 퍼뜨려(2요한 10), 믿음을 충실히 지키는 신자들을 탈선시키려고 애를 쓴다(1요한 2,26; 3,7).

그렇다면 이들의 오류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들은 영지주의 형태의 신비주의에 빠져, 하느님을 완전히 안다고(1요한 2,4), 그분을 뵙는다고(1요한 3,6; 3요한 11), 그분과 일치를 이루며 산다고(1요한 2,3), 또 빛 속에 있다고 자처한다(1요한 2,9). 이는 그리스도교 계시에 명백히 반대되는 교리이며 행위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론과 관련하여 이단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곧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고(1요한 2,22),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정한다(1요한 4,15; 2요한 7). 또 그리스도의 강생을 부인하면서(1요한 4,2; 2요한 7), 이를테면 예수님을 둘로 갈라놓는다. 곧 역사의 예수님과 하느님의 아드님을 서로 다른 존재로 구분하고, 이 아드님께서 “물과 피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음을(1요한 5,6) 부인한다. 이들의 도덕적 행태도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 이미 명백히 영지주의적인 경향에 빠져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1요한 1,8.10) 계명(1요한 2,4), 특히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1요한 2,9).

이미 오래전부터 이 이단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레네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 복음서가 논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케린투스의 이단이다. 요한 서간들도 이 이단자의 가르침을 반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할 때에 이해가 잘 된다. 사실 케린투스의 주장은 요한 서간에서 단죄받는 이단자들의 주장과 여러 면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케린투스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는 여느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었을 따름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야 천상 그리스도께서 그분과 하나가 되셨다가 수난 직전에 떠나셨다는 것이다(1요한 2,22; 5,6이 이를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요한 서간에서는 케린투스가 퍼뜨렸다는 이단의 다른 사항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케린투스와 요한 서간의 관계가 어떠하였든 간에, 요한 서간이 반박하는 대상은 그리스도교를 유다교화하려는 초기 영지주의 운동의 경향을 지녔던 것 같다. 2세기에 가서야 영지주의의 거대한 체계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 경향에 대해서 이미 옥중 서간(에페소서, 필리피서, 콜로새서)과 사목 서간(티모테오 1·2서, 티토서)이 대응한 바 있다.

그런데 필자의 목적은 이 이단 자체와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직접 신자들에게 이 글을 쓴다. 필자는 영지주의적인 주장을 조심하라고 타이르면서, 이단자들이 아니라 신자들 자신이 바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참친교를 나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한다(1요한 1,3). 이는 첫째 서간의 맺음말이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 5,13). 필자는 같은 이유로, ‘ -으로+ 알다’라는 정형구를 후렴처럼 되풀이하기도 한다(1요한 2,3.5; 3,19.24; 4,2.6.13. 그리고 1요한 3,10; 2요한 6.7.9; 3요한 3.12 참조). 이로써 필자는 진정한 신자를 어떠한 표징으로 알아볼 수 있는지를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판단 기준은 처음부터 이어져 온 신앙에 대한 충실성(예컨대 1요한 2,22-24), 그리고 계명 준수 특히 형제애의 실천이다(예컨대 1요한 2,3-6.9-11).

2. 필자

요한의 세 서간을 한 사람이 다 썼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1서와 2서가 똑같은 위기를 반영하고, 간접적으로는 3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세 문헌의 사상이라든가 어휘라든가 문체 등이 아주 비슷하여, 각기 다른 사람이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몇 가지 특징적인 정형구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곧 많은 거짓 예언자(또는, 속이는 자)들이 교회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퍼져 나가다(1요한 4,1; 2요한 7); 진리 안에서 살아가다(2요한 4; 3요한 3); 진리의 빛 안에서 사랑하다(1요한 3,18; 2요한 1; 3요한 1); 사랑의 계명은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이다(1요한 2,7; 2요한 5); 아버지와 아드님을 모시다(2요한 9), 또는 아버지를 모시다(1요한 2,23) 등이다.

필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냐 하는 것은 문제이다. 바오로 사도와 달리 요한 서간의 필자는 어디에서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2요한 1절과 3요한 1절에서 자신을 “원로”라고만 한다. 이 칭호는 어떤 한 공동체를 이끄는 최고 지도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파피아스와 이레네오가 이야기하는 대로) 아시아 속주 여러 교회의 관습에 따라 주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사람이나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이를 일컫는다. 그리고 “원로”는 이렇게 교회에서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도 전통의 초기 단계 증인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권위를 지닌 사람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자신을 생전의 예수님을 직접 뵌 목격 증인이라고 소개한다(1요한 1,1-3; 4,14).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이 필자는 요한 사도이다. 사실 고대에는 1서를 거의 예외 없이 이 사도의 작품으로 보았다. 그러나 짧은 2서와 3서는 바로 “원로”라는 칭호 때문에 사도를 필자로 볼 수 없다. 그래서 3세기와 4세기에는 더러 사도 요한과 다른 ‘원로 요한’을 이 서간들의 필자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페소의 옛 전통에는 주님의 제자인 요한 한 사람만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대체로, 이 요한 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의 전통을(요한 복음서 ‘입문’ 7 참조) 계승하는 집단에서 요한 서간들이 집필되었다고 본다.

3. 문학적·교리적 배경

이 서간에서는 구약 성경이 직접적으로는 한 번만 언급되기 때문에(1요한 3,12), 언뜻 구약 성경의 영향이 미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실하고 의롭다’(1요한 1,9), ‘하느님을 알다’(1요한 2,3.4.14 등), “속죄 제물”(1요한 2,2; 4,10), “죽을죄”(1요한 5,16) 등 구약 성경의 표현이 적지 않게 쓰인다. 요한 1서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영향은 무엇보다도 이 서간에서 펼쳐지는 중심 주제 곧 하느님과의 친교, 그리고 ‘하느님을 앎’에서 찾아야 한다. 여러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을 앎’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새 계약”의 특징적 표징으로 제시하는 앎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1요한 2,3.13.20.27; 3,9; 5,20.21 각주들 참조).

그렇지만 어휘와 관련하여 필자와 가장 가까운 것은 팔레스티나 유다교, 특히 쿰란의 문헌에서 볼 수 있는 사조이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다’(1요한 1,6), “진리의 영”(1요한 4,6), “불법”(1요한 3,4), 그리고 강력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하느님과 세상의 대립’(1요한 4,4-6), 또 ‘빛과 어둠’(1요한 1,6-7; 2,9-11), ‘진리와 거짓’(1요한 2,21.27) 같은 낱말이나 표현들을 쿰란의 ‘규칙서’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요한 서간의 이원론(二元論)은 영지주의에서처럼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이다. 나약하고 죄를 지었지만 회개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의 마음에 그 이원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 서간들은 앎에 더욱 큰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신비의 계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유다교의 묵시 문학적·지혜 문학적인 사조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요한 서간의 필자는 유다교에서 유래하는 표현을 언제나 그리스도론에 따라 개인적으로 재해석한다.

앞의 것들보다 비중이 더 큰 또 다른 영향이 근래의 연구로 빛을 보게 되었다. 곧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 그 가운데에서 무엇보다도 세례 교리이다. 필자는 수신인들에게 계속 이미 “들은 것”을 되새기라고 촉구한다(1요한 1,1.3.5; 2,7.18.24; 3,11; 4,3; 2요한 6). 때로는 “처음” 곧 처음에 받은 가르침을 분명하게 상기시키기도 한다(1요한 1,1; 2,7.13.14.24; 3,11; 2요한 5.6). 그는 신자들이 죄를 고백하기를 바라고(1요한 1,9), 예수님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라고 권면한다(1요한 2,2.3; 4,2.15; 2요한 7). 이 역시 세례 교리의 주제들이다. 유다교에서 유래하든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하든, 필자는 이 모든 주제를 이어받아, 세상과의 대립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상황을 서술하면서 이를 활용한다.

4. 요한 1서

요한 1서의 문학 유형을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글은 여느 서신과 달리 수신인도 없고 끝인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 이름도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보통 서간으로 보기도 어렵고, (대부분의 바오로 서간과 달리) 특정 지역의 공동체에 보낸 서한으로 보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필자는 독자들을 “나의 자녀 여러분”이라 부르고(2,1 각주 참조), 자기와 그들이 공동으로 지닌 믿음을 상기시키면서 신앙을 충실히 지켜 가라고 권고한다. 이에 따라 필자가 독자들에게 일정한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서간은 같은 이단의 위험에 처한 일단의 지역 교회에 보낸 것 같다. 교회의 오랜 전통이 밝히는 것처럼, 아마도 현재 터키 서부에 있던 아시아 속주(屬州)의 교회들일 것이다. 필자가 그곳으로 보낸 글은 신앙의 투쟁을 벌여 가는 그곳 신자들을 일깨워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일종의 사목 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간의 구조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 글에서는 연결 부사가 거의 쓰이지 않아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현상이 일정한 구성을 알아보게 해 준다. 곧 필자가 여러 번에 걸쳐 같은 주제들을 늘 같은 순서로 되풀이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생각은 우리와 하느님의 친교라는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해서 나선 모양으로 전개된다. 이 주제가 머리말에서 표명되고(1,3) 맺음말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로 표현된다는(5,13)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그들 곧 믿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단자들의 위협에 직면한 신자들에게 어떠한 조건으로 그 생명을 얻고 어떠한 기준으로 그 생명을 알아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서간은 전체적으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생명의 이 기준과 조건을 서술하는 글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서술은 일련의 점진적인 병행 묘사로 이루어진다.

머리말(1,1-4): 생명의 말씀

본문(1,5─5,12):
가.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첫째 설명(1,5─2,28): 친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빛에 동참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친교의 기준은 이러하다.
1) 죄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아감(1,5─2,2).
2) 사랑의 계명 준수(2,3-11).
3) 세상과 “그리스도의 적” 앞에 선 그리스도인의 믿음(2,12-28).

나.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둘째 설명(2,29─4,6): 신앙 곧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는 여기에서 부자 관계로 서술되는데, 하느님의 자녀들을 알아보는 기준은 이러하다.
1) 의로움을 실천하고 죄를 짓지 않음(2,29─3,10).
2) 하느님 아드님의 모범에 따라 사랑을 실천함(3,11-24).
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따라 영을 식별함(4,1-6).

다.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셋째 설명(4,7─5,12): 부정적 기준, 곧 죄를 끊어 버리는 것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두 가지 긍정적 기준, 곧 사랑과 믿음과 관련하여 그것들의 궁극적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는 교훈적인 면과(2,3-11) 그리스도론적인 면에서(3,11-24) 고찰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본연의 신적인 면에서 고찰된다(4,7-9.16). 믿음은 앞의 두 단계에서 교회적 행위, 곧 신앙 고백으로 서술되었는데(2,22-25; 3,23; 4,2-6 참조), 이번에는 신학적 현실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제시된다(5,5.10. 그리고 5,13 참조).
1) (이 마지막 단계에서는 죄를 끊어 버리는 것이 생략된다.)
2)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내려와 믿음 안에 뿌리내린다(4,7-21).
3)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사랑의 뿌리(5,1-12).

맺음말(5,13-21): 영원한 생명

일부 학자들은 이 서간 본문을 분석해 보면 여러 개의 문학적 층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도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나 쿰란에서 유래하는 원래의 본문,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자가 덧붙인 교훈을 가려내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문체의 다양성이 곧바로 출전이 여럿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몇몇 단락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 교리적 성격은 세례 교리의 영향을 생각할 때에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의 규칙성도 이 서간의 문학적 단일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지이다.

예로부터 유명한 논쟁을 일으켜 온 한 구절만큼은 본디의 본문에 속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곧 5,7-8의 삽입구로, ‘comma johanneum’ 곧 ‘요한 소절(小節)’로 불리는 다음의 괄호 속 글귀이다. “7그래서 (하늘에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신데 이 셋은 한 분이십니다. 8땅에서 증언하는 것도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16세기 말 두 교황의 이름을 따서 Sixto-Clementina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대중 라틴 말 성경(불가타)에 들어가게 된 이 글귀가 15세기 이전의 모든 그리스 말 수사본, 고대 번역본들, 그리고 대중 라틴 말 성경의 질 좋은 수사본들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요한 소절’은 난외 주석이 서방의 전승 과정에서 본문 속으로 들어간 것일 수 있다.

5. 요한 2서와 3서

요한 1서와 달리 이 짧은 두 글은 서간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다. 2서의 수신인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인데, 이는 특정 개인들이 아니라 발신인인 “원로”가 자기가 맡은 아시아 속주의 여러 교회에 부여한 칭호이다. 이 신자들의 믿음은 성자의 강생을 부정하고(7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지 않으면서(9절) 사람들을 오류에 빠뜨리게 하는 자들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다. 필자는 신자들을 그러한 오류에 미리 대비시킨다(8.10-11절). 신자들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므로(1절), 성부께서 내리셨고 또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전해 온 계명의 빛을 받으며(4-6절),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4절)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5절). 이는 요한 1서에서 길게 펼쳐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3서는 2서와 놀라울 정도로 문체상의 유사성을 드러내면서도(2요한 1.4.12-13과 3요한 1.3.13-15 참조) 더욱 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 셋째 서간의 수신인은 발신인인 원로가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고 칭찬하는 가이오스라는 사람이다(3절. 그리고 2요한 4 참조). 이 서간에서는 약간 논쟁적인 어조가 쓰이는데, 그것은 신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위기 때문이다. 원로는 가이오스가 속한 공동체에도 이미 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여겨지는 디오트레페스가 원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9절). 그래서 원로는 이제, 믿음을 충실히 지키는 주요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이오스에게 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로는 자기가 거주하는 교회에서, 이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는 사명을 받은 일단의 순회 선교사들을 파견한다(7절). 이들의 생계는 누구보다 먼저 신자들이 맡아 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들이 “진리의 협력자”임을 드러내야 한다(8절). 그러나 디오트레페스는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을 도우려는 신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기까지 한다(10절). 그래서 이 서간의 목적은 선교사들에게 협조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가이오스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언뜻 볼 때, 이 짧은 요한 3서는 사목적 성격을 지닌 글로, 앞의 두 서간이 말하는 이단은 전혀 시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디오트레페스는 원로의 지휘 아래 펼쳐지는 복음화 사업에 거칠게 반대하면서 그의 말에 순종하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불순종은 “사람을 속이는 영”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1요한 4,6). 원로는 이러한 디오트레페스가 하느님을 뵙지 못한 자라고 단언한다(3요한 11). 이는 하느님을 직접 뵈었다는 이단자들의 주장을 암시한다(1요한 3,6. 그리고 1요한 2,4 참조). 끝으로 원로는 가이오스가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해 기쁨을 표시하는데(3요한 3.4), 진리에 따른 그러한 삶의 자세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자들의 자세와 대비되는 것이기도 하다(2요한 4-7). 이 모든 사실은 디오트레페스가 일정 부분 이단과 연루되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요한 1서와 2서와 3서가 어떤 순서로 쓰였는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표지는 하나도 없다. 어떤 학자들은 1서가 맨 나중의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럴 법한 견해이다. 이 서간이 집필될 당시에 일단의 “그리스도의 적들”이 공동체에서 갈라져 나갔다고 하는데(1요한 2,19), 이는 (2서와 3서에서 교회 안의 현상으로만 말하던) 이단이 더욱 발전하고 확고해졌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필자가 1서에서 말하는 방식은 이단의 위험이 이제 일반적인 사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서와 3서를 어느 한 지역 공동체에 보낸 다음, 이제 필자는 자기의 권위 밑에 있는 아시아 속주의 여러 교회에 같은 주제를 담은 회람 서간을 보낼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6. 요한 1서의 신학

여기는 이 서간의 신학을 완벽히 분석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인 가르침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필자의 의도는 맺음말의 첫 절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5,13). 필자는 이단 때문에 혼란을 느끼는 신자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려고 한다. 거짓 예언자, 곧 이단자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하느님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확신은 이 서간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앙이 세상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외침으로 울려 퍼진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5,18-20).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에 맞서, 자기들이 지닌 이러한 참 ‘영지’(靈智) 곧 믿음의 확신을 더욱 발전시키고 강화시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한 1서의 중심 주제는 신자들이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이다.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이 친교가(1,3), 공동체 안에서는 형제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교로 드러난다(1,3.6). “친교”라는 용어가 이 서간에서 1,3.6.7에만 나오지만, 이 낱말로 표현되는 실재는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 여러 정형구로 서간 전체에 걸쳐 서술된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그 모든 부유함이 밝혀진다. 곧 믿는 이는 “하느님 안에” 있다(2,5. 그리고 5,20 참조); 그는 “하느님 안에” 또는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른다’(2,6.24.27; 3,6); ‘그는 아버지 안에 머무르고 아버지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3,24; 4,15.16);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2,29; 3,9; 4,7; 5,1.4); 그는 “하느님의 자녀이다”(3,2.10); ‘그는 아버지와 아드님을 모시고 있다’(2,23; 5,12. 그리고 2요한 9 참조); ‘그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5,12)와 같은 표현이다. 여기에다 성서적 표현인 ‘하느님을 알다’도 덧붙여야 한다(2,3.4.14. 그리고 3,1; 4,6.7.8 참조). 필자는 첫 증인들이 듣고 또 묵상한 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중개를 통해서 또 그 중개 안에서만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음을 강조한다(1,1-3). 우리가 ‘참되신 분을 알게’ 되면,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된다(5,20). 그리스도 자신이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이다(5,20).

참된 신자들은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4,6-7)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 나날이 더욱 잘 알아 가게 된다. 필자는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나는 세 가지 모습을 제시한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다.

필자는 서간 첫머리에서부터 앞으로 그 모든 의미를 밝히게 될 큰 메시지, 곧 “하느님은 빛”이시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선포한다(1,5). 여기에서 “빛”이라는 말은 유다교에서처럼 계시를 뜻한다. 이로써 필자는 요한 복음서 머리말의 주제를 여기에서도 되풀이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1,2). 이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이며 그 아버지께 되돌아가신 말씀께서 성자로서 지니신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때부터 계시의 이 참빛이 사람들을 비추고 있다(2,8). 이 빛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사랑의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도 사랑 속에 살아가라는 초대이다. 하느님의 이 빛 안에 머무르라는 말씀을 듣는 이들은 모두 형제들을 사랑하고(2,10) 서로 친교를 나누며 살아간다(1,7).

하느님의 또 다른 완전성, 곧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은 두 번에 걸쳐 언급된다(1,9; 2,29). 이 특성은 역시 두 번에 걸쳐 그리스도께도 적용된다(2,1; 3,7). 그분의 구원 사업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이 세상에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이 네 구절에서는 각각, 의로움이라는 하느님의 속성이 죄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다. 그렇게 하여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신다(2,1-2와 4,10 참조).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이 의로움이 계시됨으로써, 이제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순수하게 되기 위하여(3,3) 자기도 의로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2,29; 3,7).

요한 1서의 필자가 말하는 하느님에 관한 세 번째 정의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신약 성경 계시의 핵심에 해당한다. 하느님은 곧 사랑이시라는 것이다(4,8.16). 필자에게 사랑은 자신을 내어 줌과 동시에 친교를 나눔을 뜻한다. 사랑은 성부와 성자를 하나로 결합시킨다. 하느님의 이 사랑은 그분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계시되고 또 전달된다. 그리하여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4,7). 성자께서 이룩하신 구원을 필자는 전부 하느님 사랑의 위대한 계시로 본다(3,16; 4,9-10.16). 신앙으로 이 진리를 아는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들을 사랑하여(4,20) 하느님의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실현되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2,5; 4,12.17.18). 그러나 형제들을 자기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곧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5,2). 이러한 계시 때문에 신앙인의 온 삶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2요한 3) 이루어지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의 삶이 바로 하느님을 아는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

필자는 ‘거짓 교사들’ 곧 이단자들이 자기들도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기준을 제시하려고 여러 차례에 걸쳐 경고의 말을 한다. 이 경고는 두 계열로 나뉜다. 첫째는 도덕적 기준에서다. 곧 죄를 피하고(3,6)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3,15) 빛 안에서 살아가며(1,7) 의로움을 실천하고(2,29; 3,10) 계명(2,3-5; 3,24; 5,2) 특히 형제애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2,9-11; 3,10.17-18; 4,12.20; 5,1) 것이다. 둘째는 교리적 기준에서다. 곧 처음부터 들은 가르침을 보존하고(2,24) 교회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4,6)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고백해야 한다는(2,23; 4,2; 5,1.10) 것이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것과 관련해서는(3,24; 4,13) 어떤 외적 기준을 말할 수 없다. 성령은 믿음과 형제애를 일으키는 내적 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그리고 형제들과 나누는 참 친교의 열매는 무엇인가? 하느님의 강력한 말씀과 신자들의 굳건한 믿음은 죄와 세상을 눌러 승리를 거두고(2,13.14; 4,4; 5,4-5),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만한 삶을 사는 이들은 이를테면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한다(3,6.9; 5,18). 그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어,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살아가고(4,18), 지고한 심판관 앞에도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된다(2,28; 3,21; 4,17). 또한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도 지니게 된다(3,21-22; 5,14-15). 그렇기 때문에 이 친교가 믿는 이들에게 평화의 원천이 되고(2요한 3),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을 느끼게 해 준다(1,3).

7. 맺음말

요한 서간들은 그리스도인이 영위해야 하는 참삶의 종합적인 면을 제시한다.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삶, 이것이야말로 예언자들이 구원의 때에 실현된다고 예고한 하느님과 사람들의 ‘새 계약’을 완전히 구현시키는 것이다. 이 계약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계시 곧 하느님 사랑의 계시 때문에, 그리고 이 계시의 진리가 성령의 작용으로 내면화하였기 때문에 새것이 된다. 그리하여 믿음과 사랑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새 법이 된다. 필자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완전한 열매를 맺게 하려고, 자신을 끊임없이 원천에 비추어 보는 전통의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그는 또한 영을 식별하는 일의 중요성, 내적으로 “기름부음”받음, 그리고 신자들의 믿음의 체험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들은 나중에 신학과 영성과 교회 내의 신비주의에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이 서간들에는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에 관한 가르침, 신비주의적 도덕과 신학만 내포되어 있지 않다. 필자는 종말론도 제시한다. 사실 필자는 이 세상 종말에 관한 전망에 놀라우리만치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희망을 그리스도께 걸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

이 서간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우리 시대와 다른 모든 시대에 주는 현실성은 분명하다. 다른 때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에도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한다. 그들은 성령을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을 찾는다. 이미 진리를 알고 있는 이 신자들에게 필자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충실히 보존하고 사랑의 생활로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