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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1. 마태오 복음서의 첫머리와 끝머리

루카 복음서에는 당시 그리스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작품의 대상과 선례와 동기 등을 밝히는 머리글이 있는데, 마태오 복음서에는 그러한 부분이 없다. 마태오는 그 대신에 예수님의 공생활 이야기를 도입하는 서론 부분과(1─2장) 자기의 복음서를 끝맺는 단락(28,16-20), 곧 부활하신 분께서 단 한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자기 작품의 의미를 밝힌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분의 이 발현에서 두 가지 중대한 사항이 강조된다. 곧 그리스도의 권한과 그분 제자들의 역할이다.

1) 마태오 복음서 역시 다른 복음서들처럼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한다. 그러면서도 초기 그리스도론을 자기 나름대로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명백히 제시한다. 요셉에게 예고된 임마누엘(1,23)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지니신 분께서 ‘주님이시며 스승’으로서 세상 끝날 때까지(28,20) 신자들과 함께 계신다. 지상에 살아 계셨던 이분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중개를 통하여 충만한 권한과 함께 이러한 현존을 계속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한을 사탄이 아니라(4,8-10) 하느님께 받으신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그리스도께 넘겨주시는 것이다(11,27). 이러한 사실이 마태오 복음서에 매우 특징적인 윤리적 전망을 제공한다.

구약 성경에 예고된 대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배척을 받으신다. 그리하여 ‘기쁜 소식’이 다른 민족들에게도 전파될 수 있게 된다. 마태오 복음서의 서론이(1─2장) 이러한 사실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사실 이 부분의 기능은 예수님의 유년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옛 전통들을 바탕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분께서 이 땅 위에서 겪으신 그 운명의 의미를 표현해 내는 데에 있다. 요셉은 이스라엘과 다윗 혈통의 이름으로,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은 아기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태어나신 분을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다. 이들은 ‘기쁜 소식’이 구원으로 초대하는 다른 민족들의 본보기이다. 반면에, 예루살렘 주민, 수석 사제들(2,4 각주 참조), 헤로데 임금 등,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그분을 배척하고 박해한다. 특히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다고 말해 놓고서는, 베들레헴의 유아들과 함께 그분까지 없애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이러한 헤로데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민족들의 땅을 상징하는 갈릴래아에 몸을 피한다. 이러한 극적인 역사 속에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예시(豫示)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러한 역사는 바로 다른 민족들에 대한 복음 선포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수하신다. 마태오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은 이른바 ‘성경 논증’이다. 그는 복음서 곳곳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다. 이 인용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위의 뜻이 항상 성경으로써 밝혀진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기능을 가진다(1,22 각주 참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격한 자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2) 천상천하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이 예수님께서는 열한 사도에게, 모든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는 책임을 맡기신다. 이 첫째 복음서의 특징적인 표현,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에 관한 유다교 전통에도 속하는 표현에 따르면, 이 ‘기쁜 소식’의 선포는 먼저 ‘하늘 나라’를 공포하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통치자이시며, 특정한 때에는 당신의 그 절대적 권능과 함께 역사의 흐름 속으로 손수 개입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는 방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틀림없이 여러 세기에 걸쳐 존속하던 이스라엘의 정치 체제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다 땅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하느님의 지고한 개입에 관한 이러한 꿈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우리의 임금님은 하느님뿐이시다.’라고 즐겨 말하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라는 전통적 표현을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정치적 해방의 뜻으로 그 표현을 수용하신 것이 아니다. 마태오의 눈에는 더욱 그러하다. 마태오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에야 전한다. 예수님을 통하여 그러한 정치적 꿈이 실현되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태오에게는 이 “하늘 나라”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된다. 반면에, 루카 복음서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 표현이 통상 재해석되어 ‘영원한 생명’이나 ‘하늘’ 등을 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 표현이 두 가지 뜻을 지닐 수 있다. 보통은 ‘통치’를 의미하지만, ‘들어가다’를 뜻하는 동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왕국’을 뜻하기도 한다(3,2 각주 참조). 그리고 이 표현은 단순히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그 대상으로 한다. 13장에 나오는 “하늘 나라”의 비유들이 그 특징들을 잘 드러낸다. 씨 뿌리는 이의 파종으로 시작되는 하늘 나라는 신비한 방식으로, 그리고 중간에 마주치게 되는 온갖 역경에도, 마지막 수확 때까지 열매를 맺어 가야 한다. 마지막 수확은 세상 종말의 사건을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전망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와 동일시될 수 없다.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 나라를 드러내는 표징들을 일으키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면서도(16,18; 18,17), 하느님의 나라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제자들의 공동체에서는 상호 봉사가 법이다(18,12-14). 이러한 공동체가 베드로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16,19; 18,19).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 공동체는 항상 그리고 계속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6,10 각주 참조).

2. 문학적 구성

마태오는 마르코 또는 루카와 공통된 원천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그러나 이렇게 전반적으로는 유사성을 기본 틀로 하면서도, 마태오는 마르코와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제시한다. 그 다름은 마태오에게만 있는 많고 풍부한 요소들(예컨대 1─2; 5─7; 11,1-30; 13,24-30.36-52; 18,10-35; 28,9-20), 마르코와 같은 자료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이용한 것(예컨대 4,1-11과 마르 1,12-13, 8,23-27과 마르 4,35-41, 9,9-13과 마르 2,13-17, 14,13-21과 마르 6,32-44, 16,13-20과 마르 8,27-30, 21,18-19와 마르 11,12-14, 21,33-46과 마르 12,1-12, 24,1-36과 마르 13,1-37 비교), 그리고 루카도 이용하였을 예수님의 어떤 어록에서 발췌한 요소들을(예컨대 3,7-10; 7,7-11; 11,4-6; 12,43-45) 보면 알 수 있다. 마태오 이전의 원천들이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지 규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나 루카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마태오가 어떻게 자기의 복음서를 구성하였는지 알 수 있다.

1) 앞뒤를 시간적으로 연결시키는 말마디들은 4,17과 16,21 외에는 보통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3,1 각주 참조). 지리적인 언급들도 상당히 모호하여, 그것들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움직이신 상세한 여정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복음서를 읽는 이는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단순히 장면들의 모음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생애와 접하게 된다. 마태오는 이야기나 예수님 말씀의 앞뒤 틀을 같은 낱말로 짜기를 좋아한다(6,19와 6,21; 7,16과 7,20; 16,6과 16,12). 그리고 동의적 병행법(同意的竝行法) 또는 반의적 병행법(反意的竝行法)을 예컨대 교차 배열법(交叉配列法)으로 이용하기도 한다(16,25).1) 또 거침없이 상투어를 되풀이하고(8,12; 22,13; 25,30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동일한 사실을 가리킬 때에는 같은 표현 방식을 다시 쓰며(8,2와 9,18의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 말하였다.”; 9,4와 12,25의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주저하지 않고 같은 말씀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으로 전하기도 한다(3,2와 4,17과 10,7의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오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짧은 것이 특징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마르코의 특성이 사라지고, 대신에 간결하고 엄숙하기까지 한 교리교수적인 제시 방법이 들어선다(8,14-15와 마르 1,29-31에 나오는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신 이야기 비교). 또 마태오는 일정한 수에 따라서(특히 7이나 3 또는 2를 선호한다.), 또는 이른바 ‘고리 낱말’, 곧 둘 이상의 절이나 구절 안에 배치되어 그 절들이나 구절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구실을 하는 낱말에 따라서(예컨대 18,4-6의 “어린이”와 “작은 이”) 자료들을 모아 가기를 상당히 좋아한다.

마르코와 루카는 자료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는 데 반해, 마태오는 더욱 깊은 뜻에 따라 말씀과 이야기를 편집한다(8,5-13을 루카 7,1-10; 13,28-29와 비교). 그리고 비슷한 내용의 가르침을 즐겨 한데 모아 놓는다. 이렇게 하여 그는 ‘주님의 기도’(6,7-15)를 미리 잘 배치된 틀(6,1-18) 속에 집어넣는다. 또 예수님의 ‘설교’가 이를테면 할 말을 빠짐없이 다 하는 것이 되도록 구성한다(이러한 사실을 10,17-42; 13,35-53; 25 등에서 볼 수 있다). 마태오는 또한 8,1-17의 ‘기적 모음’에다 두 번에 걸쳐 일련의 다른 기적들을 덧붙인다(8,23─9,8과 9,18-34). 사람의 아들의(8,20 각주 참조) 운명에 관한 세 번의 예고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펼치는 확대 설명이 첨가된다(18,5-35; 19,1─20,16).

끝으로 무엇보다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같은 문학적 구성의 순서 안에서도 예수님의 다섯 ‘설교’가 눈에 띈다(예수님의 가르침을 응집시켜 놓은 것들을 더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이렇게 ‘설교’라고 부른다). 이것들이 마태오 복음서의 뼈대를 이룬다. 각각의 뼈대는 설교가 끝난 뒤에 배치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다’라는 말이나(7,28 각주 참조) 그와 비슷한 문장으로도 드러난다(11,1; 13,53; 19,1; 26,1 참조). 마태오는 이런 식으로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5─7장),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들(10장), 하느님 나라의 신비(13장), 하느님 나라의 자녀(18장),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를 기다리는 동안에 요구되는 깨어 있음과 성실성을(24─25장) 잇달아 제시한다.

2)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는 마태오 문체의 특징을 바탕으로, 독자는 나름대로 이 복음서를 더 크게 나누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마태오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 스스로 제안해 보는 것일 따름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 번역에서는 복음서를 큰 단락으로 나누지 않는다. 대부분이 짧은 단락들을 그 내용에 따라 소제목을 붙여 제시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학자들이 주장하는 세 가지 구조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가. 가장 간단한 것은 분명 지리적 구조이다. 이는 일부 학자들이 마르코 복음서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4,12─13,58), 갈릴래아와 인접한 여러 지방과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펼쳐지는 예수님의 활동(14,1─20,34), 끝으로 예루살렘에서 전개되는 그분의 가르침, 그리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다(21,1─28,20). 그러나 이러한 구조에는 난점이 있다. 그 난점은 마태오가 어떤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여러 장소 또는 지역을 언급하였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지리적 구조는 자료들이 모아진 틀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 어떤 학자들은 마태오가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다’와 같은 결구(結句)로 나누어 놓은 다섯 ‘설교’(5─7; 10; 13; 18; 24─25장)에 따라 구조를 확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가르침의 핵심이 모아져 있는 다섯 개의 큰 단락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처럼, 복음서의 자료들이 이야기와 설교로 번갈아 가면서 배치되었다고(3─4장의 이야기와 5─7장의 설교; 8─9장의 이야기와 10장의 설교; 11─12장의 이야기와 13장의 설교; 14─17장의 이야기와 18장의 설교; 19─23장의 이야기와 24─25장의 설교) 보기는 어렵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이러한 이야기와 설교의 상응은 11─12장과 13장에서만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11─12장을 이야기로 규정짓기가 어렵다. 이 두 장에는 이야기에 필수적인 시간이나 공간과는 별 관련이 없는 짧은 말씀들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모음들과 관련해서는, 3─4장과 5─7장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규명할 수가 없다. 14─17장과 18장도 마찬가지이다. 8─9장과 10장, 그리고 19─23장과 24─25장을 결부시키는 것은 복음서 본문을 왜곡시키는 일이 된다. 마태오 복음서는 본보기(예화)가 곁들여진 교리서가 아니라, 교의적(敎義的) 의미를 지닌 한 역사적 존재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 또 다른 학자들은 마태오가 지리적인 틀 안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전하려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요약(4,12-17; 12,15-21 등), 연계(12,15-21과 3,13-17; 11,1─12,50과 8,1─9,34), 명백한 지형 설명이나(8,1─9,34; 14,1─16,20; 20,29─28,20) 어렴풋한 지형 설명(11,1─12,50; 16,21─20,28), 다양한 청중, 그 가운데에서 특히 군중(8,1─9,34), 적대자들(11,1─12,50; 21,23─23,39), 제자들을(14,1─20,34; 24,1─25,46) 고려할 때, 복음서 전체를 두 개의 큰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첫째 부분에서(3,1─13,58)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분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다. 말씀에서나 행동에서나 절대적 권능을 지니신 그분께서는(4,12─9,34)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보내신다(9,35─10,42). 이제 사람들은 그분 쪽에 설지 반대쪽에 설지 선택해야 한다. 곧 청중은 이미 일어난 기적들(11─12장) 또는 비유를 통한 새로운 가르침을(13장) 계기로 자기들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보도록 촉구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신다(13,53-58).

둘째 부분에서(14─28장)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을 부활의 영광으로 이끄는 길을 걸어가신다. 두 가지 움직임이 이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첫 번째 움직임은 예수님께서 먼저 지리적 바탕 위에서(14,1─16,20), 그다음에는 교의적(敎義的) 바탕 위에서(16,21─20,34) 당신의 공동체에 특수한 가르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두 번째 움직임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곳으로 장엄하게 들어가셔서 성전을 ‘차지하신다’(21,1-22). 그 뒤에 그분께서는 적대자들과 맞서신다. 곧 세 개의 비유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시고(21,28─22,14), 그들과 벌어진 논쟁을 승리로 이끄시어 그들의 함정도 훌륭히 벗어나신 다음(22,15-46),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책망하신다(23장). 또 온 세상이 받을 심판을 예고하신다(24─25장).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당신을 재판하고 단죄하도록 내버려 두신다(26─27장).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신다(28장).

마태오는 이렇게 극적인 사건들을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어떠한 유보도 없이 당신을 전적으로 추종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공포하신다. 하느님의 백성은 본디 이러한 다른 민족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부함에 따라 그 만남이 끊어지고, 가슴 아픈 결별이 되고 만다. 이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제자들의 공동체가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반란을 일으킨 소작인들의 손아귀를 벗어난 이 새 백성은 이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21,43).

3. 마태오의 공동체

자료의 선택이라든가 배열을 보면 마태오 복음서가 태어난 공동체의 관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 세 가지 면을 지적하고자 한다.

1) 마태오는 복음서 저자들 가운데에서 율법과 구약 성경과 유다인의 관습을 가장 많이 강조한다. 예컨대 그는 유다교 신심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세 분야, 곧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또 마르코와는 달리(마르 7,3-4) 유다인의 관습을 따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끝으로 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우선적으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10,6; 15,24). 그러나 이러한 강조는 또 다른 강조로 수정된다. 곧 율법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사실, 구약 성경이 예수님 자신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점, 끝으로 바리사이들의 전통이 불러일으킨 오용과 남용의 강조이다. 5장의 산상 설교 가운데 나오는 반대 명제가(“……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가리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철저하게 재해석된다.

마태오는 ‘기쁜 소식’이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이제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전 세계적 차원으로 복음이 울려 퍼지는 일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아들이 집행하시는 재판에 모든 사람이 부름을 받게 된다(25,31-46). 그 전에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라는 초대를 받는다(28,19).

2)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와 달리, 제자들이 이해하는 데에 우둔하거나 무능하지가 않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시 과정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예언자이며 현인이고 새로운 율법의 학자이다(13,52. 그리고 23,34 참조). 물론 이는 그들의 역사적 실제 모습을 완화시킨 결과이다. 마태오는 제자들을 항구적인 가치를 지닌 본보기로 만들어 내는 일에 애를 쓴다. 이렇게 하여, 비록 믿음이 약한 사람들로 보이기도 하지만(8,26; 14,31; 16,8; 17,20) 이 제자들이야말로 바로 미래의 모든 제자의 행동을 예시(豫示)한다고 마태오는 지적하는 것이다.

3) 끝으로 마태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마태오가 속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향을 받는다. 하느님 계획의 정당성을 입증하시고 그리스도교 호교론의 기초를 놓으시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약 성경을 완성하시는지는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다. 이 밖에도 마태오는 예수님을 ‘스승’ 그 자체로 소개하는데(5,2.19; 7,29; 21,23; 22,16과 4,23; 9,35 등), 이를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강조해 나아간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스승’이라는 용어가 당시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의미로 쓰인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게 된다(루카 11,1). 그리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어떠한 분이시냐는 문제에 집중된다(요한 8,20.28).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스승님께서 주로 새로운 ‘의로움’ 곧 하느님의 법에 대한 새로운 충실성을 가르치신다(5,19-20; 7,29; 15,9; 28,20).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의 최종적 ‘권위’를 지닌 ‘종말론적’ 해설가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분으로서 당신의 청중들을 율법 학자들이 수호하는(15,9) ‘인간의 전통’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완전성을 가르치신다(5,48; 19,21).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서 첫머리에서부터 그리스도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시고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로서 ‘스승님’, 곧 하느님 뜻의 궁극적 해설가이시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이 (마치 예수님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인처럼) 이미 예수님을 생전에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사실, 그리고 마태오가 예수님의 진노나 애정 같은 것을 서술하는 마르코 복음서의 표현들을 별로 채택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마르코 복음서에서보다 훨씬 더 존엄하신 분으로 등장하신다(13,35와 마르 6,3; 15,33과 마르 8,4 등 비교).

4. 독자, 집필 연대, 저자

초대 교부들에게 이 문제는 간단하였다. 이 첫째 복음서는 마태오 사도가 ‘유다교 출신 신자들을 위하여’ 저술하였다는 것이다(오리게네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데, 현대의 성서학에서는 이 문제의 복합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선 여러 가지 정황을 바탕으로 이 첫째 복음서의 탄생지를 규명할 수 있다. 현재의 이 복음서 본문이 아람 말 또는 히브리 말로 된 전통을 반영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전형적인 팔레스티나의 어휘(16,19의 ‘매다’와 ‘풀다’; 11,29-30의 ‘멍에’; ‘하늘 나라’ 등), 마태오가 자기의 독자들에게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표현들이나 여러 가지 관습(5,23; 12,5; 23,5.15.23) 등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아람 말 원본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말로 편집하였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 복음서가 유다인들의 전형적인 전통들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팔레스티나 땅에서 유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통상 시리아 지방, 그 가운데에서도 안티오키아나(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2세기 초에 이 복음서를 인용한다.) 페니키아에서 저술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이 지역에서 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복음서에서는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바리사이들의 정통적인 유다교에 대한 논쟁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다교의 모습은 기원후 80년대에 얌니아에 있던 유다교 회당의 모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많은 학자가 이 첫 복음서의 저술 시기를 80-90년대,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로 잡는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확실한 답을 얻기는 어렵다.

이 복음서에는 저자에 관한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래된 전통에(2세기 전반부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 따르면, 마태오-레위가 그 저자이다. 많은 교부도(오리게네스, 예로니모, 에피파네스) 이 의견에 동의한다. 어떤 학자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 사도가 현재의 마태오 복음서의 초본(初本)을 아람 말이나 히브리 말로 집필하였다고 추론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은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 복음서의 연구로는 확인될 수 없다.

저자의 이름을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서 자체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몇 가지 모습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곧 저자는 그의 작품으로만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구약 성경과 유다인들의 전통에 정통한 이로서, 자기 민족의 종교 지도자들을 잘 알고 존경하지만 그들을 통박하기도 한다. 또 청중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이해시키는’ 기술에 능통한 이로서, 늘 자기 가르침의 실천적 결과를 강조한다. 이러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박식한 유다인, 곧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13,52) 같은 이라고 할 수 있다.

5. 첫째 복음서의 의의

마태오 복음서는 2세기부터 ‘교회의 복음서’로 여겨져 왔다. 이 복음서가 “교회”에 관하여 전하는 전통 때문이거나(16,18과 18,18), 그보다는 이 복음서에 들어 있는 자료의 풍부성과 그것의 질서정연한 배열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복음서 저자가 우리에게 주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줄 수도 없는 바를 요구하지만 않으면, 이 복음서는 오늘날에도 계속 ‘교회의 복음서’일 수 있다.

마태오는 자기의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서를 저술하고 이 교회 공동체에 말을 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시대의 언어를 말 그대로 옮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교회의 목소리와 일체가 되어 이 교회의 표현 기관(器官)이 된다. 그래서 이 복음서 안에서 ‘목격자들’의 말을 직접 듣는 데까지 이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선은 지난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의도로 이 복음서를 접해서는 안 된다. 마태오가 속한 공동체의 복음서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이 복음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태오 자신이 그려 내는 것 같은 신앙인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서를 읽는 이는 그 문체의 셈족식 성격을 수긍해야 한다. 예컨대 여기저기에서 구약 성경이 자주 인용되는데, 이는 마태오의 독자 곧 유다교 출신 신자들에게 꼭 필요하였던 것이다. 언뜻 볼 때에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낯설고 번잡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이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넘어가면, 마태오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강력히 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완성하셨음을 전하는 복음서로서, 교회의 뿌리가 그 본원(本源)의 전통 속에 내려져 있음을 밝힌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참이스라엘’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귀의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이제라도 자신을 완성하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 교회는 바로 이 이스라엘 안에서 자기의 뿌리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마태오는 교회를 하늘 나라와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의 교회에 그 참모습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의 공동체가 생존하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느님의 나라만이 교회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하느님의 나라 또는 그분의 통치가 인간 역사 안에서 작용하면서, 교회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어떠한 위치에 있고 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의 자세를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들과 함께 자기의 전능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때로는 자기의 약한 믿음을 나무라시는 그분의 소리를 듣기도 하며, 또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믿는 이와 그의 주님이신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활발해진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변천하는 세상 속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면서, 당신께서 지상 생활을 하실 때에 내리신 가르침으로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되돌아갈 것을 촉구하신다.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 이것이 마태오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이다.

주석
1

16,25는 다음과 같이 병행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교차적으로 배열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