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애가

입문

1. 책 이름과 역사적 배경

히브리 말 성경에서 이 책은 에카라 불린다. 첫째와 둘째, 그리고 넷째 시의 첫 낱말에카(= ‘아!’또는, ‘어찌하여’)를 따른 것이다(이사 1,21; 예레 48,17 참조). 그러나 탈무드도 그렇게 하듯이, 전통적인 책 이름이 된 그리스 말 트레노이(=애가)가 히브리 문학 유형에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이며, 이 유형은 장례식 조가와(2사무 1,17이하 참조) 함께 국가적 환난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이 책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한 다음 백성의 일부를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기에 유다인들은 (파스카로 시작되는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인)아브 달 9일에 이 책을 읽었는데, 이날은 기이하게도 기원전 587년의 사건만이 아니라 기원후 70년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제2성전을 파괴한 사건까지 기념하게 되었다.

2. 저자

칠십인역은,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죽음 앞에서 “애가”를 지어 불렀다는 사실을적시하고 있는 2역대 35,25의 내용에 따라 이 책을 예레미야의 작품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4,20은 예레미야가 치드키야에 대하여 품고 있던 생각과 거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예레 24,8. 그리고 예레 23,6참조), 이 밖에도 5,7이 진술하는 공동책임 사상에 대해서는 예레 31,20-30이, 4,17이 언급하는 이집트와의 동맹 관계에 대해서는 예레 37,5-7이 상반되게 부딪치고 있다(5,6과 예레 2,18도 비교). 또한 예레미야가 2,9의 내용을 직접 발설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다만 이 본문은(2,9) 애가의 시들이 팔레스티나에서 지어졌으리라는 사실을 일러 주는 자료가 될수 있다. 바빌론에서는 에제키엘이 상당수의 청중들을 대상으로 예언 활동을 펼쳤으므로(에제 8,1 참조) 예언자라는 존재가 잊힐 수 없었지만, 팔레스티나에는 예레미야가 이집트로 강제로 끌려간 뒤 예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애가에 담긴 다섯 개의 시들이 서로 다른 문학 양식과 내용을 보이고 있어, 그 출처가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애가는 예레미야의 작품이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애가를, 바빌론의 침략이 임박한 현실 속에서 내부의 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친바빌론파와 예레미야를 ‘겨냥’한 작품으로 다루기도 한다.

3. 문학 양식

애가의 처음 네 개의 시는 ‘알파벳 시’로서, 스물두 개의 구절이 히브리 말 알파벳 순서에 따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순서는 첫째 시와 나머지 세 개의 시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또한 셋째 시에서는 각각의 알파벳이 세 번씩 되풀이되어, 세 구절씩 동일한 자음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시의 양식은 암기를 도와주고,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주제가 충분히 다루어졌음을 가리켰을 것이다. 주제로 보면, 처음 두 개의 시와 마지막 두 개의 시는 정치적 애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온은 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그러나 다섯째 시에서는 공동체적인 하소연이 울려 퍼진다). 개인적인 애가라 할 셋째 시에서는 한 남자가 나오는데 이 사람의 모습은 고통받는 예레미야를 연상시킨다. 물론 이 사람 안에서, 곧 자기 민족이 겪는 고통을 대신 짊어진 예언자의 모습을 통하여 온 백성의 대표를 볼 수도 있다. 이 셋째 시는 어떻게 보면 다른 네 개의 시들을 해설하는 가장 오래된 주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민족적 애가 한가운데에 자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4. 저작 시기

애가의 익명성과 다양성은 저작 시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애가가 일정한 순서에 따라 구성된 작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애가에 담긴 모든 시가 기원전 538년 유배 시대가 끝나기 이전에 지어졌다는 사실과, (특히 둘째 시와 넷째 시가 제공하는) 상당한 자료들이 기원전 587년의 사건들과 가깝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나아가 첫 째 시는 기원전 598년의 제1차 유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으로 추정된다.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환난으로 비롯된 육체적 정신적 불행 속에서 겪어야 했던 슬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멸망시키실 수밖에 없도록 이끈 죄 많은 행실에 대한 뉘우침,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한 희망 등은 이 책에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으며,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모든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5. 내용

애가는 예루살렘이 겪고 있는 비탄의 상황을 애도한다(1,1.4; 2,8; 5,16). 이 도성은 눈물(1,2.16; 2,11.18; 3,48-51), 탄식(1,4.8.11.21.22), 고뇌(1,5.12; 3,32), 벌거벗김과(1,8) 굶주림으로(1,11.19; 2,12.19; 4,4.5.8-9; 5,6.10) 무너져 폐허가 되어 버렸다(1,4.13.16; 4,5; 5,18).

이 도성은 도성의 가장 귀한 존재들, 곧 아이들(1,5.20; 2,4.11.19.20.22; 4,4.10), 처녀들(1,4.18; 2,10.21; 5,11), 총각들(1,15.18; 2,21; 5,13.14), 원로들(1,19; 2,10; 4,16; 5,12.14), 사제들(1,4.19; 2,6.20; 4,16), 예언자들(2,9.20), 그리고 임금들과 고관들이(1,6; 2,2.6.9; 4,20; 5,12) 처해 있는 상황으로 상처 받고 있다. 도성의 가장 신성한 실체들, 곧 성전과(1,4.10; 2,1.4.6.7.20) 하느님을 만나는 축제가(1,4.10; 2,6.7.22) 더럽혀졌다.

고통 속에서, 그리고 이 고통 덕분에,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주님에 대한 반항(1,5.14.22; 3,42), 불순종(1,18.20; 3,42), 잘못(1,8; 3,39; 4,6.13.22; 5,7.16), 패륜과(2,14; 4,6.13.22; 5,7) 같은 죄를 의식하고 이를 고백한다(3,42; 5,7.16). 주님께서는 도성을 당신의 손으로 무겁게 내리누르신다. (본문에서 스무 번 이상 언급되는) 이 손은 물론 적들의 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손이다(1,14).

사실 하느님께서는 진노(1,12; 2,1.3.6.21.22; 3,43.66; 4,11), 분노(2,4; 4,11), 격노(2,2; 3,1), 무시무시한 불꽃(1,13; 2,3-4; 4,11) 등으로 표현되는 모든 악을 단호히 배격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신다.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적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는(2,4-5; 3,1-18.43-45), 고통을 내리시고(1,5.12) 먹구름으로 뒤덮으시며(2,1), 사정없이 쳐부수시고 도살하신다(2,1-8). 그래서 그분께서는 멀리 계신 분으로 여겨지지만(1,16), 항상 가까이 계시면서(3,57) 들으시고(3,56.61) 보시며(1,9.11.20; 2,20; 3,50.59-60.63; 5,1) 기억하시는 분이시다(5,1).

인간은 그분께 의지할 수 있다. 그분은 의로우시고(1,18; 3,34-36) 전능하시며(3,37-38; 5,19), 진실하시고(3,32) 구원을 베푸시며(3,26), 생명을 구해 주시고(3,58) 위로해 주시며(1,16), 한없이 좋으셔서(3,25) 당신의 마음속, 곧 당신의 모성적 자비를 아침마다 새롭게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3,22-23). 죄의 결과인 불행은 지고의 은총이 되기도 한다. 불행은 겸손한 고백으로, 결국에 가서는 회개로,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이루겠다고 장담할 수 있는 회개가 아니라(3,40), 하느님만이 인간 안에 이루실 수 있는 회개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