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예레미야서

입문

1. 말씀의 사람이 겪는 고독

예레미야 예언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예레미야는, “저는 홀로 앉아 있습니다.”(15,17)라는 고백에서 읽을 수 있듯이, 자신을 매우 고독한 존재로 소개한다. 이 고백은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려는 예레미야의 전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감싸 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했던 사람들(20,10), 심지어 가족들에게서도 사랑받거나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를 받았으며(12,6), 집안사람들의 혼인을 축하할 때나 망자의 죽음을 슬퍼할 때도 함께할 수 없었다(16,5-9). 혼인 생활에서 오는 위로나 책임도 알지 못했고, 아버지가 되어 본 적도 없다(16,1-4). 옥에 갇히고 혹사를 당하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집트로 끌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애를 마치는데, 아무도 그의 무덤을 기억조차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레미야의 내적 삶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사실 예언자의 고독은 그의 천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 어떤 외적인 힘, 예언자를 짓누르고 덮친 힘, 예언자의 존재를 충만하게 하고 괴롭히며 자신의 의지에 온전히 동참하기를 요구한 힘, 유다 백성 한가운데에서 하나의 행동 양식으로 예언자의 고독을 필요로 했던 힘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었다. 이 냉혹한 힘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어떤 예언자도 예레미야만큼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행동 방식을 철저하게 상술하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는 정식(定式)은 예언자가 자신의 예언 말씀을 도입하고 규정하는 통상적인 표현이다(1,2 각주 참조). ‘그는 주님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으며 그 말씀들이 그에게 기쁨이 되었으나’(15,16), 그 결과는 종종 참담함이었다. “내 심장이 내 안에서 터지고 내 모든 뼈가 떨린다.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술에 전 인간처럼 되었으니, 이는 주님 때문이요, 그분의 거룩한 말씀 때문이다”(23,9). 예레미야는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은”(23,29. 20,9도 참조) 이 격렬한 말씀을, 그 자체로는 평범한 체험처럼 보이는 순간적인 환시에서 받았을 뿐만 아니라(1,11-14 참조), 예언자의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던 주님의 천상 어전 회의에서 들었다(23,18.22; 5,1과 각주 참조). 한편 주님께서는 고집 센 이스라엘 백성을 삼킬 불이 되도록(5,14) 이 말씀을 예언자의 입에 담아 주시고(1,9) 지켜보신다(1,12). 때로는 이 말씀이 그를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씀이 좀처럼 내리지 않거나, 다시 주어지는 경우에도 그때까지 긴 기다림의 날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42,7). 예레미야의 삶에서 말씀은 해결의 열쇠, 골칫거리, 흥을 깨트리는 요인인 동시에 존재의 이유이며, 그를 자기 자신과 친지들에게서 갈라놓는 듯하지만 결국은 그 삶과 사건의 한복판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변덕스러운 폭군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말씀의 편에 서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노력의 흔적은 예언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예언자가 자기 삶의 의미를 두고 하느님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수많은 대화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은 현대의 주석가들이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 부르는 대목이다(11,18-23; 12,1-6; 15,10-21; 17,12-18; 18,18-23; 20,7-13.14-18). 이 고백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고립과 소외, 주어진 열악한 조건에 대하여 신랄한 불평을 털어놓지만, 이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예언직의 일부라는 사실을 듣고 확인할 뿐이다. 이 ‘고백록’이 예레미야와 하느님 사이에 오간 대화의 전부는 아니다. 예언서의 첫 부분에서 다른 대화들도 발견되는데, 젊은 예레미야가 말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헛고생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소명 이야기(1,4-10), 그의 예언직의 주요 요인이 되는 초기 환시들(1,11-14), 유다 사회에 내린 하느님 심판의 정당성을 예언자가 인정하게 되는 대목(5,1-6), 끝으로 나라를 황폐시킨 가뭄을 그치게 하려고 그가 헛되이 노력하는 대목을(14,1─15,9) 들 수 있다. 이 대화에서 예언자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과 대립하지만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이다. 역사적으로 그 전개 과정이 어떤 양상을 띠든지 간에 ─ 예언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기란 쉽지 않다. ─ 아무튼 이 대화들은 예레미야가 그토록 집요하게 전념한 대상이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증언한다.

2. 예언 소명의 진정성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의 삶을 뒤흔드는 온갖 문제들 가운데, 자신이 예언자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는 사실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문제였다. 사실 예레미야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말했던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서 자체만 보더라도 예레미야와 같은 자격으로, 그리고 그 곁에서 예언자로서 지위와 특권을 주장하던 다른 사람들의 활동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26,20-24), 아쭈르의 아들 하난야(28장), 콜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치드키야(29,21), 그 밖에 여러 구절에 언급되어 있는 익명의 예언자들(2,8.26.30; 4,9; 5,13.31; 6,13-14; 26,7-16; 27,16-18), 예레미야가 때로는 심한 말을 퍼부으며 그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는(23,9-40) 예언자들(14,13), 또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예언자들을(4,10 각주 참조) 열거할 수 있으며, 바빌론 유배자 가운데에도 예언자들이 있었다(29,1).

특히 이 본문들은 예레미야가 애당초 동료 예언자들보다 유별난 존재로 처신할 뜻이 전혀 없었음을 말해 준다(14,13-16; 28,6-9; 29,1 참조). 예언자가 단번에 그들을 ‘거짓 예언자’로 구분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예레미야의 고독은 설명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면을 지닌다. 예레미야는 신중하게 적용해야 하는 몇 가지 윤리적 기준을(23,14.17.22; 29,23) 내세우는 것 말고는,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분류하거나, 자신만큼이나 확신을 갖고 메시지를 옹호하던 다른 예언자들 앞에서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어떤 객관적 기준도 내놓은 적이 별로 없다(28,8은 예외에 속한다). 예레미야 역시 그의 경쟁자 하난야처럼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28,6-9). 하난야는 당시의 정치와 군사를 책임진 대다수의 지도자들과 견해를 같이했던 인물이다(‘입문’ 4 참조).

예레미야의 특이한 소명의 진정성과 의미에 대한 질문은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핵심을 이룬다. 하느님께서 메시지에 영감을 불어넣으시는 분이라면 어찌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하는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셨다면, 어찌하여 예레미야 혼자만 진리를 받아들이고 홀로 외롭게 그 진리를 외쳐야 했는가? 여호야킴에게 살해된 예언자 우리야 같은 사람조차 예레미야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지 못하였다(26,20-24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에게 임무를 맡기셨다면 어찌하여 이 예언자는, 그를 동료로 맞아들이거나 스승으로 모시면서 환영하고 기뻐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는가? 문제는 계시의 진정성과 그 타당성에 있다.

예레미야는 정신적 혼란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고유 직분에 관해서는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고 그 말씀을 받아먹지 않았던가?(15,16 참조) 언제나 진실만을 추구하지 않았던가?(17,16 참조) 참된 예언자들이 모두 그러하듯 동료들만이 아니라 적대자들을 위해서도 중개하지 않았던가?(18,20; 14,13; 17,16 참조) 그런데도 어찌하여 예언자는 외톨이, 적응 불능자, 끊임없는 반항자로서 슬픈 운명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느님의 단호한 응답은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는다. 예언자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것이며, 오히려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12,5). 불평을 늘어놓는 사자(使者)는 결국, 훨씬 더 충격적인 말씀을 전하고자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침착하게 제 길을 묵묵히 걸어가게 될 것이다(15,19-21).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임무를 부여하신 적이 없는(14,14-16) 주님께서는 그들의 기만행위를 고발하신다(23,16). 그러나 예레미야의 마음을 뒤흔든 의혹들을 없애 줄 수 있는 요소라는 것도,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진정 살아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부조리한 확신뿐이다.

예레미야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예고한 재앙이 실현되는 현실을 목격할 것이며,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반성할 것이다. 훗날 몇몇 의식 있는 신학자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신탁만이 아니라 그의 직분에 관계된 전승들을 수집할 것이고, 그는 결국 주님의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입문’ 5 참조).

3. 몇 가지 전기적 자료

이러한 근본적인 갈등과 비교해 볼 때, 예언자의 생애에 관한 외적 환경은 이차적인 관심의 대상일 뿐이다. 이 환경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주어진 몇몇 자료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 또한 대부분 가정에 불과하다.

1,1에 따르면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그의 집안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32; 37,12 참조) 아나톳이라는 마을 출신이며, 사제 가문의 일원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예레미야가 옛날 솔로몬이 아나톳에 유배시킨 실로의 사제 에브야타르의 먼 후손일 수 있으며(1열왕 2,26-27), 집안에서 받은 종교 교육과 조상들에 대한 기억과 사라진 북 왕국의 국경 가까이 살았다는 사실이 예언 메시지의 문체와 내용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론하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2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1,6). 이 두 가지 전기적 정보는 예레미야가 기원전 650-645년경 태어났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1,2가 제시하는(25,3에서도 반복된다.) 숫자는 예레미야의 소명 일자에 관한 후대의 전승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실제 소명 일자는 기원전 609-608년경일 것이라는 가설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예언자의 초기 활동에 관한 이러저러한 가설들이 뚜렷한 근거없이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2년 요시야의 개혁을 진심으로 반겼을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하여 이 개혁 사업에 협력했을 것이다(11,1-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을 제외한 모든 성소를 철거해 버린 이 사업은 성소에서 활동하던 사제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런 이유로 예언자의 집안이 그에게 적대감을 드러냈을 것이다(11,18-22 참조). 또한 훗날 요시야의 개혁이 일시적인 성과만 내고 마감되는 것을 확인하고서 예언자는 유다인들의 불충을 강도 높게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은 모두 설득력이 부족하다. (예레미야가 기원전 626년에 예언 소명을 받았다는) 연대에 관한 근거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서가 요시야의 저 유명한 개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으며(22,15-16에 따르면, 요시야는 다른 덕행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11,1-14에서 알아볼 수 있고 작품 전체의 특징을 이루기도 하는 신명기계 어휘와 사고에 관한 흔적 등이 상이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입문’ 5 참조). 끝으로, 무엇보다도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대한 반발이, 예언자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널리 퍼뜨린 요시야 개혁의 예견된 물리적 결과가 아니라, 그가 전하는 갑작스러운 하느님 말씀의 출현 때문에 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11,21과 예레미야의 기타 ‘고백록’ 참조).

우리는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 활동에 관해서는, 우리가 바라는 바는 크지만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우리는 그 이후의 예언자의 삶에 관한 몇몇 사건들에 대해서는 예언서 후반부에서 매우 상세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08년 성전 입구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 설교가 결국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26장. 7,1─8,3도 참조). 기원전 605-604년에는 그때까지 자신의 기억 속에 ─ 아마 몇몇 청중의 기억 속에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 간직해 둔 신탁들을 기록하여 처음으로 출간한다(36장). 기원전 594년에는 다른 예언자들과 논쟁을 벌이고(27─28장),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빌론의 유배자들에게 편지한 통을 보내는데 이 편지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29장). 끝으로 기원전 588-587년의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 치드키야 임금과 그의 대신들과 겪은 갈등, 예루살렘 함락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활동한 내용이 32─35장과 37─44장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아무리 상세하다 할지라도 이를 토대로 예언자의 사실적 전기를 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본문의 정보 배열 자체가 정확한 연대순의 구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정보들은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살아간 한 백성을 위해 예언 사명을 수행한 예언자의 실존 속에서 말씀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밝혀 주는 일련의 실례들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4. 여러 해에 걸친 말씀의 직무

처음부터 예레미야 예언직의 특징을 이루었던 고독은 유별난 종교적 체험 때문만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의 내용에서 비롯된다. 그의 메시지는 유다인들을 끊임없이 무(無) 앞에, 공동체가 없어지고 창조마저 사라져 버린 허무의 심연 앞에 데려다 놓는다(4,23-26 참조). 모든 사람의 존재 여부는 그의 메시지에 대한 수용이나 거부에 달려 있으므로 예레미야의 고독은 정치적 차원을 지닌다. 예언자의 고독이 지속되고 유다인들이 그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한 그는 우주적 재앙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생존자가 될 것이고, 반대로 그의 메시지를 듣는 청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재앙은 비켜 가거나 아니면 적어도 줄어들 것이며, 나아가 사람들은 행복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거침없는 메시지는 근본적인 결단을 강요한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에게서처럼 예레미야에게 말씀은 개인적이건 공동체적이건 인생의 모든 면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직무에 관해서는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가) 첫 번째 시기는 (연대가 불확실한) 예언 소명 때부터 결정적으로 카르크미스 전투가 전개된 기원전 605년경까지이다. 아시리아는 주변 국가에 대한 폭정을 멈추고, 유다는 요시야 치하에서 상당한 번영을 이루며 안정된 시기를 맞는다. 이를 계기로 요시야 임금이 영토를 넓히고 온갖 개혁을 시도하여 유다는 널리 독립을 누리게 된다. 기원전 609년에 요시야가 사망하자 국가는 몇 년 동안 이집트인들의 세력 아래 놓이지만, 이것이 그리 힘겨운 속박은 아니었다. 사실상 요시야에게만 치명적이었던 므기또에서의 소규모 접전을 제외하고는(2열왕 23,29 참조) 유다 왕국에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날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예레미야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사명에 맞닥뜨린다. 매우 강력한 도발적 언어를 구사한 운문체 신탁을 통하여 예언자는, 북쪽에서 솟구쳐 일어나 유다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킬 무적의 군대가 쳐들어오리라고(특히 4─6장 참조), 곧 너무 늦기 전에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어떤 희망도 남기지 않을 무자비한 군대가 들이닥치리라고 예고한다. 예레미야는 동족들에게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녔지만, 이 기이한 경고가 결코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다 백성과 그 지도자들은 자만에 빠져 있으며, 그들의 체제가 흔들림 없이 지속되리라 확신하고 있다(8,8; 18,18 참조). 유사시에 그들은 최후의 피난처인 성전과, 이 성전의 역사 깊은 신성불가침성에 의지하리라 생각하였다(7,4.10 참조). 한편 백성의 다양한 계층에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보면서 예레미야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모든 백성이, 곧 지배하는 자도 지배를 받는 자도, 착취하는 자도 착취당하는 자도 모두 타락했으며(5,1-6 참조) 길을 잃고 영영 헤매고 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피부색을 바꿀 수 있으며, 표범이 털의 얼룩을 지울 수 있겠는가? 그렇듯이 습관처럼 악을 저지르는 유다인들이 선을 행할 수 있겠는가?(13,23) 양단간의 결정을 요구하며 어떠한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 이 거친 메시지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 예언자의 사고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다 검거나 다 흰 것이 아니라 늘 조금 검거나 조금은 희기 마련인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사고는 하느님 인식이라는 아득한 영역에서도 전통의 가르침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이제까지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가까이 계시는 분, 친밀하신 분이었던 것이다(23,23 참조). 믿을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두루마리를 가차 없이 조각조각 불태워 버린 여호야킴 임금의 충격적인 몸짓은 예레미야가 예언 활동 초기에 했던 설교가 실패하였음을 잘 드러내 준다(36장).

나) 두 번째 시기는 기원전 605년부터 587년, 곧 네부카드네자르의 즉위부터 예루살렘 멸망까지이며, 예레미야는 이 시기에 예언 활동 전반에 걸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다. 외적의 침입에 관한 그의 예언은 갑작스러운 현실로 나타난다. 바빌론 임금은 무적의 군대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여러 차례 휩쓸었고, 도상에서 만난 약소국가들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하기로 작정한다. 이제 유다의 독립도 끝장날 판이었다. 이러한 때에 유다의 정치를 책임진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대다수의 지도자들은 독립을 되찾기 위한 정책을 결연히 선택한다. 이들은 바빌론을 멀리 떼어 놓는 일에 늘 앞장섰던 이집트와, 바빌론의 진격으로 함께 위협을 받던 인접 약소국가들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이런 강경한 정책은 국가의 수장이었던 다윗 왕조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소수의 지도자들은 네부카드네자르 제국의 속국이 되어 어느 정도 자치권을 유지하겠다는 희망으로 바빌론의 보호를 받아들일 태세였다. 우리는 예레미야서 덕분에 바빌론 제국의 편에 선 여러 고관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의 강력한 보호자였던 아히캄(26,24), 예루살렘 함락 이후 그 지방의 행정관으로 임명된 아히캄의 아들 그달야, 신탁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도록 예레미야를 도왔던 인물인 네리야의 아들 바룩 등이다. 마지막 인물 바룩은 그저 평범한 ‘서기관’이 아니었다. 그를 단순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예레미야만을 섬겼던 인물, 예언자의 임무 수행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일종의 속기사로만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바룩은 소페르, 곧 국가의 비서로서 거의 수상과 같은 고위 관료였으며, 바빌론 제국 행정 구역의 수장이 된 그의 형제 스라야처럼(51,59 참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바룩의 영향력은 사람들이 그를 친바빌론 세력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 또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부추긴 핵심 인물로(43,3) 취급할 정도였다.

이처럼 상호 엇갈린 정책은, 실패할 경우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라는 카드를 집어 들든가(이집트가 유다를 힘껏 돕는다 할지라도 그 뒤에는 유다를 간섭하려 할 것이기에 이 자유는 어디까지나 외견상의 자유일 뿐이다.) 아니면 바빌론의 정치 체제에 병합되는 것을 수락하든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귀결된다.

예레미야도 어쩔 수 없이 이러한 논쟁에 휘말려 들지만, 그의 입장은 전혀 주저함이 없이 단호하다. 바빌론의 패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기회를 노리는 정치적 인물이 아니기에 어떤 계산도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만을 따른다. 하느님은 세속과 종교라는 이중 지배 구조가 다스리는 독립된 강국 유다가 아니라, 당신에게 신실하고 당신의 부성적 부르심에 응답하며(3,22─4,4 참조) 마음으로 정의를 수호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백성 유다를 원하시는 분이시다(5,1-3; 22,13; 23,5-6 참조). 예레미야에게 독립주의자들은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모든 가치를 거부하는 자들이며, 그 주범은 유다의 임금이다(22,13-17). 이제 하느님께서는 국가의 멸망을 선언하시고는 전혀 새로운 계획을 세우신다. 그분께서는 바빌론 제국 한가운데에서 당신의 심판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이상 자신의 영광을 찾기보다는 모든 이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애쓰는 변화된 공동체를 창조하려고 하신다. 다른 사람들의 번영이 자기들의 번영을 이루는 조건인 것이다(29,5-7). 이 공동체는 조상들의 땅으로 행복하게 귀환한 다음 예전에 주님께 다짐한 약속들을 내적으로 훌륭하게 심화시켜 나갈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를 중개하는 어떤 계급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31,31-34). 이 메시지는 주님께서 당신에게 온전히 성별된 사람들의 중개로 당신 백성을 인도하시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3,15와 23,6에서 이미 예고된 메시지이기도 하다. 예언자는 여기서 천상 예루살렘에서 완벽하게 구현될 계약의 미래를 내다본다.

다) 예레미야 예언 활동의 세 번째 시기는 기원전 587년 이후, 곧 예루살렘 붕괴 이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의 중요성이 종종 과소평가되고는 하는데, 이는 바빌론 제국이 (백성들 가운데 몇몇 계층을 대상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다 땅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을 잃고 방황하던 이 잔류민들 사이에서는 세 가지 경향이 두드러진다. 첫 번째는 그달야를 중심으로 친바빌론파 대열에 섰던 우두머리들이 주도한 경향으로서, 이들은 바빌론의 보호 아래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였으며 예레미야는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두 번째 부류는, 암몬 임금의 지원을 믿고서 냉혹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이스마엘 휘하의 사람들로서 이들은 오히려 폭력적인 행동을 통하여 투쟁을 지속하고자 하였다(41,1-10 참조). 끝으로 세 번째 부류는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규합한 사람들로서 이집트로 망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망명 계획을 만류하던 예레미야의 신탁에도(42장) 아랑곳하지 않고, 이 부류는 당초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예레미야까지 끌고 간다(43,1-7). 그리하여 예언자의 마지막 자취는 머나먼 이집트 땅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만다(43,8─44,30).

5. 예레미야서의 구성

예레미야서의 일반적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1,1─25,14: 유다를 거스른 예레미야의 신탁과 상징적 행위

26,1─45,5: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구원의 신탁과 예레미야의 예언직에 관한 이야기

46,1─51,64(25,15-38의 서문 포함): 이민족들을 거스른 신탁 

52,1-34: 예루살렘 함락에 관하여 (몇 가지 새로운 정보를 끼워 넣으면서) 2열왕 24,18─25,30에서 빌려 온 역사적 기록

칠십인역에는 이민족들을 거스른 신탁이 25,13 바로 다음에 삽입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배열은 더 오래된 본문의 두루마리가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사야서 1─39장, 에제키엘서, 하바쿡서, 스바니야서 등 다른 여러 예언서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민족들을 거스른 신탁은 이스라엘을 거스른 신탁과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 신탁 사이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크게 넷으로 나눈 각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더 작은 규모의 단락들과 상호 긴밀히 연계되는 구성요소들과 신탁 모음집이 발견되는데, 이것들은 본디 하나의 책 안에 수록되기 이전에 별도의 문서 또는 소책자의 형태로 보존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다윗 집안’에 관한 신탁들을 규합하고 있는 22,11─23,8, ‘예언자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23,9-40, 새로워진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책’으로서(30,2) 30,1─31,40은 주목할 만하다. 나아가 2장과 4─6장과 14,1─15,4 등과 같은 부분들은 예언서의 최종 편집에 앞서는 예레미야 예언집 가운데 일부로 취급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 제1부의(1─25장) 구성과 관련하여, 바룩이 기록으로 남겼으나 여호야킴이 태워 없애 버린 뒤 “비슷한 내용의 많은 말씀을 더 적어 넣었다.”(36,32)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보완된 형태로 다시 작성된 두루마리에 관한 일화는 성경 주석가들의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두루마리는 기원전 605년 이전에 발설된 위협 신탁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 내용은 아마도 예레미야서 1─25장에 취합된 자료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주석가들은 이 본문들을 식별해 내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상반된 연구 결과만 얻었을 뿐 일치된 견해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두루마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문제가 복잡한 까닭은 1─25장이 친저성에 전혀 문제가 없는 운문체 신탁들 외에도 때로는 장 전체를 차지할 만큼 비교적 긴 형태의 산문들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이 산문들이 어휘나 신학 사상에서 ‘전기 예언서’라 불리는 작품들 속에 흩어져 있는 역사에 관한 대서사시, 곧 이를 유배 시대 동안 기술한 신명기계 편집자들의 작업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을 예레미야의 친작으로 간주할 수는 없겠지만, 후대의 편집자들에게서 다듬어진 예레미야의 신탁들을 대신한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예언서 제2부에서 예언자의 직무 수행에 관한 이야기들은 줄곧 바룩의 작품으로 여겨져 왔다. 이 기록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매우 상세하고,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분명해 보일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들은 바룩이 받은 사적 신탁으로 마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하다고까지 주장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저자는 아마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을 것이다(43─44장 참조). 43,6은 친바빌론주의자였던 바룩이 예레미야와 함께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갔다고 전한다.

이처럼 유배 시대 초기에 이미 여러 소책자, 문서, 기록들이 산재해 있었으며, 여기에 예레미야에 관한 몇몇 구전 전승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모든 자료들을 한 권의 책에 수록한 저자가 있었을 것이나, 우리는 이 편집자의 신원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이 편집자는 수많은 가필과, 상호 연관성을 띤 단편들과(말씀들, 한두 개의 이야기), 방금 언급했듯이 예언서의 거의 모든 장에서 드러나는 신명기계 문체로 된 주해 등을 통하여 자신의 편집 의도를 드러낸다. 예레미야서의 최종 편집자는 분명 ‘신명기계’ 학파에 속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6세기 후반 팔레스티나에서 문학과 신학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이 문헌들을 수집하고 주해하고 간추려 묶으려는 노력과 함께 연구와 편집 작업으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결론들을 이끌어 내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