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성경 >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입문

갈라티아서를 바로 이해하려면 바오로가 서간을 써 보내는 그 지역 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바오로가 서간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 상황은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갓 태어난 교회가 성장하면서 맞게 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위기에 처한 교회는 결정적 선택을 하게 된다.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에 대한 충실성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충실성을 유지하고자, 교회는 그 역사의 매 시기마다 그러한 선택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사도행전과 갈라티아서를 바탕으로 갈라티아 지방 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러고 나서 갈라티아 교회에서 위험에 처한 복음의 진리를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옹호하는지, 또 그 일이 어떠한 단계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본다. 끝으로 이 서간이 어떻게 하여 예나 지금이나 계속 현실성을 지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갈라티아 교회의 위기 상황

바오로가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에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는 사도행전이 잘 보여 준다. 그는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파견된 이민족들의 사도이다(사도 9,15; 22,21; 26,17). 그러나 이러한 그의 사명 수행은 줄 곧 유다교에 집착하는 이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이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사도 15,1).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이 유다계 신자들은, 다른 민족과 다른 종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모세 율법의 굴레를 씌우려고 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이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 성령의 깨우침을 받은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민족 사람들에게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내려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사도 10,17; 15,7-11). 야고보 사도 역시 이민족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자기가 판단하기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천적인 규정 몇 개는 이민족들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 사항들이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선포되기도 한다(사도 15,19-21.28).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여러 차례 소아시아의 갈라티아 지방을 횡단한다. 바오로 사도는 제1차 선교 여행을 하면서, 이 로마의 속주 갈라티아 남쪽에 있는 여러 지역에 복음을 선포한다. 곧 피시디아, 리카오니아, 프리기아 등이다(사도 13,14─14,25). 그는 또 제2차와 제3차 선교 여행 중에 두 차례에 걸쳐 갈라티아 북부를 가로지른다(사도 16,6; 18,23). 카파도키아와 흑해 사이, 곧 안키라(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 갈라티아 북부는 당시 켈트족 출신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사실은 이 북부의 주민들만 말 그대로 ‘갈라티아인(人)’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상이 바오로가 갈라티아서에서 이야기하거나 상기시키는 사실들이 전개되는 역사적 틀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바오로는 이 서간에서 언급되는 사실들을 직접 겪은 사람인데, 그 것들을 사도행전과는 다르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바오로의 증언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는 식의 양자택일적인 대답은 별로 합당하지 않다. 바오로와 루카가 말하는 것들이 서로 어긋남은, 같은 사실을 서술하는 두 사람의 의도가 다른 데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바오로가 충실한 증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추구하는 목적과 관련된 것만 이야기한다. 루카는 자기가 직접 목격하지 않은 것들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확실한 자료들을 가지고 작업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객관적인 연대기를 저술하는 것이 루카의 의도는 아니다. 그는 교회가 성장하면서 그 성장의 원동력으로 펼쳐지는 성령의 활동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출처도 다르고 시기도 다른 문헌들을 한데 묶어 한 가지 사건과 관련짓기도 한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도 이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이로써 왜 이 사도 회의가 갈라 2,1-10과 사도 15장에서 각각 다르게 기술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사도행전을 이용하여, 갈라티아서가 말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더 자세히 알 수 있고 또 갈라티아 지방에서 일어난 위기도 자리 매김할 수 있다. 한편 구체적으로는, 바오로가 누구에게 서간을 써 보냈으며 언제 보냈는지, 또 사도가 갈라티아 교회의 어떠한 잘못을 문제 삼았으며, 그 잘못을 퍼뜨린 적대자들은 누구인지 등이 주요 문제로 부각된다. 그런데 이 서간에서 바오로가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암시할 경우, 그것이 이 서간의 수신인들에게는 명료하였겠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는 너무 모호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호한 암시들에 따라 가설들이 제시되는데, 자료가 명료하지 않은 만큼 가설도 많아진다. 몇몇 가설은 초대 그리스도교 역사를 해석하는 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서간 본문에 바탕을 둔 가장 중요한 가설들만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물음은 갈라티아서의 수신인이 누구이고 또 이 서간이 언제 쓰였나 하는 것이다. 19세기에는, 남부 갈라티아 지방의 여러 교회가 수신인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 가설이 맞을 경우, 갈라티아서는 제1차 선교 여행 조금 뒤 곧 49년쯤에 안티오키아에서 발송한 것으로,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서간이 된다. 이 서간을 쓴 시기를 사도 16,6에서 언급되는 여행 이후로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로부터 이견 없이 따라온 전통적 견해에 동조한다. 곧 사도 18,23에 나오듯이, 바오로는 북부 갈라티아 지방을 두 번째로 가로지른 다음에(갈라 4,13) ‘갈라티아 사람’이라고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그곳 신자들에게 이 서간을 써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서간을 쓴 시기는 그가 에페소에 비교적 길게 체류하던 때(아마도 56-57년의 겨울)의 끝 무렵, 그러니까 로마서를 집필하기 여섯 달 전이 된다. 이로써 이 두 서간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갈라티아의 신자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려 위기를 초래한 자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소요를 일으켜 바오로 사도에게 단죄받는 이 사람들은, 이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에게 모세 율법의 준수(3,2-3; 4,21; 5,4), 특히 할례의 의무를 부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2,3-4; 5,2; 6,12). 사도행전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와 같이, 이들은 유다교를 고집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은 위에서 인용한 대로 사도 15,1에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사실에 부합하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사실 바오로는 이 서간에서, 도덕적 방종으로 변질되는 자유를 조심하라고 촉구한다(5,13). 그래서 바오로가 사실은 두 부류의 적대자들을 상대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이 가설은, 해이해진 도덕을 지지하는 자들과 유다교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는 자들을 똑같은 사람들로 보기는 어렵다고 믿는 학자들이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서로 상반된 교리를 주창하는 두 종류의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에 따라 다른 가설이 제기된다. 유다교를 고집하는 이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은 율법을 종교 의식의 면만 강조하고 율법에서 요구하는 윤리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은 콜로새서에서 말하는(콜로 2,16-23) 것과 비슷한 종교적 혼합주의가 된다. 사실 갈라티아서와 콜로새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정령(精靈)들을 섬기는 신앙이다(갈라 4,3.9; 콜로 2,20). 게다가 바오로 자신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이러한 방향에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곧 적대자들이 신자들에게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개종하기 전에 따르던 신앙으로 그들을 다시 이끌고 간다는 것이다(4,8-10). 바오로는 다른 한편으로, 할례 받은 이는 율법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충실히 지킬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다(5,3. 그리고 3,10 참조). 바오로의 적대자들은 그와 반대로, 율법의 일부만 지켜도 된다고 주장하였음에 틀림없다. 사실 사도는 이 서간을 끝맺으면서, 적대자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할례를 강요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꾸짖는다(6,13).

이 가설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면에서 들어맞지는 않는다. 이러한 가설없이도 이 서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도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도덕적 방종을 조심하라고 타이르는 것은, 그 지방의 지역 교회들이 잡다한 이교(異敎)에서 개종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의 사고와 행동 방식이 그렇게 빨리 변화하지 못하였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가 있다. 그래서 바오로가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갖는 자유가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오로가 모세 율법의 관습과 이교의 관습을 똑같이 다룬다고 해서, 유다교를 고집하는 자들이 이 두 가지 서로 전혀 다른 관습을 혼합하였다고만은 볼 수 없다. 바오로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티아 신자들을 이 두 가지 잘못된 관습 또는 신앙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 이것이든 저것이든 따른다는 것은 옛 종살이로 되돌아가는 꼴이된다.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다. 바오로는 차라리 이교의 제의(祭儀)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면 교회를 떠나게 되어, 복음을 왜곡시키면서까지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5,12).

2. 위기의의미: 유일한복음에따른선택

바오로의 적대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갈라티아 신자들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경우에 그들의 믿음 자체가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한 가지 선택을, 그것도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여기에서는 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오로는 갈라티아 신자들이 다른 설교가들을 선호할 경우에 그것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된다고 불평하지 않는다(4,12). 중요한 것은 유일한 복음의 진리이다. 또 이 복음이 선포하는 자유,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새 삶의 특징을 이루는 이 자유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관건이다.

복음은 새 세상을 건설하는 구원의 선포이다. 모든 이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구원, 곧 보편적이고 무상적인 구원의 선포이다. 유다교에 집착하는 자들은 계속 옛 세상에 살면서 갈라티아 신자들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내세우는 바람에 복음을 무너뜨리고 만다. 바오로는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경의 약속들을 실현시키실 때에만 구약 성경이 비로소 그 참뜻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의 논증은 비록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기에는 더러 어려움이 있지만, 세 가지 관점에서 옛 세상과 새 세상의 대립을 밝혀낸다.

첫째 관점은 구원의 원천에 해당된다. 사람은 육(肉)과 성령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옛 세상에서는 인간이 자족할 수 있고 자기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오로는 이러한 자세를 “육”이라고 부른다. 새 세상에 들어감은 성령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시는 은총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관점은 구원의 역사에 해당된다. 사람은 율법과 믿음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율법은 구원자가 오시는 것을 준비하는 여러 단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장차 믿게 될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교육적인 목적으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받지 못한 민족들과 구분된다. 반면에, 믿음은 사람들을 새 세상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으로 향하게 해 주고, 그 구원을 모든 인간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준다.

셋째 관점은 종살이와 해방에 해당된다. 옛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죄의 종살이를 하는데, 육이 죄의 원천이 된다. 새 세상에서는 성령께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는데, 이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사랑으로 실천하게 해 주신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뿐인 복음이 가져다주는 이 자유가 유다교에 집착하는 자들 손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가 닥친 것이다.

3. 구성과 문체

바오로는 자기의 “자녀”들이 위험에 빠져 있음을 잘 안다(4,19). 그는 이러한 신자들에게 어떠한 학설이라든가 교리를 전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이 “자녀”들에게 선포하고 또 그에 따라 그들이 달려온 길을(5,7) 밝혀 준 진리는 어떤 한 사건이 지니는 진리이다. 곧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이다. 사도는 갈라티아의 신자들을 바로 이 사건,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시 세우고자 한다.

첫째 단계에서(1장과 2장),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명 수행의 원천이시며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심을 상기시킨다.

둘째 단계에서(3─6장),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완수하시어 역사에 당신의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일치할 수 있고, 새로워진 피조물이 그 충만함에 이르게 된다.

이 두 단계는, 복음이 모든 인간에게 제시하는 근본적 선택의 다양한 면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여 주고자, 앞에서 언급한 세 쌍의 명제, 곧 육과 성령, 율법과 믿음, 종살이와 해방이라는 대립 명제들을 전개하면서 통일성을 이룬다.

가. 첫째 단계: 1,1─2,21
1) 머리말(1,1-10)

1,1-5: 바오로의 사도직과(1-2절) 그의 복음이라는(3-4절) 첫째 단계의 두 주제가 예고되는 인사말

1,6-10: 유일한 복음이 왜곡되는 상황 설명

2) 바오로의 사도직(1,11─2,10)

1,11-24: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이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가 은총으로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사명 때문이다.

2,1-10: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이민족들은 할례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이는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복음의 진리이다.

3) 바오로의 복음(2,11-21)

그러나 베드로는 갈라티아 교우들이 당하는 것처럼, 유다교를 고집하는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복음의 진리와, 그 진리가 요구하는 선택에 충실하지 못한다. 바오로는 이 진리를 고수하고 또 ‘믿음과 율법’이라는 한 쌍의 대립 명제로 그 근본적인 선택을 명확히 한다. 이 선택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곧 우리 개개인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진다.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다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반면에,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됨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온전히 포기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들에게서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었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득한 생명에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나. 둘째 단계: 3,1─6,18
1) 도입부(3,1-5)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며 성령을 보내 주신 그리스도 앞에서 갈라티아 신자들을 꾸짖는다. 그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여 “육”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구원 역사에서 드러나는 믿음과 율법(3,6─4,7)

3,6-14: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그리스도께 해당되고, 그분을 통하여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이렇게 약속된 구원은 성령이 사람들에게 주어짐으로써 실현된다.

3,15-29: 율법은 성령이 주어지기 위한 조건으로 이스라엘인들에게 제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죄인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들이 종처럼 죄에 매여 있음을 드러내고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분 안에서 그들은 해방되고 다시 하나가 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4,1-7: 구원의 역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종살이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로 성령을 통하여 건너가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3) 종살이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권고(4,8─5,12)

4,8-20: 자기 “자녀”들에 대한 바오로의 불안. 복음이 그들을 해방시켰는데 이제 그들을 다시 종살이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시도가 자행되는 것이다.

4,21-31: 자유로워지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그리되어야 한다.

5,1-12: 갈라티아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에, 또 믿고 사랑하고 바랄 수 있게 해 주시는 성령에게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살아가야 한다.

4) 참자유는 사람들을 육에서 해방시키시는 성령께서 가져다주시는 열매이다(5,13─6,10)

5,13-26: 육과 성령의 근본적 대립

6,1-10: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법에 충실하게 해 주시어 심판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5) 마지막 권고와 축복(6,11-18)

바오로는 다시 한번 갈라티아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세운다. 이 십자가야말로 머리말에서 언급된 대로(1,4), 악한 옛 세상을 끝맺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으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믿음으로만 동참할 수 있는 이 새 창조에서, 인간은 성령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된다.


갈라티아서의 구성은 이와 같다. 그리고 바오로가 위에서 열거된 보조 주제들을 전개시키면서 추구하는 목표에서도 이 구성의 통일성이 드러난다. 그 목표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알아보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개입을 통하여 이 세상 역사에 당신의 의미를 부여하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거저 베풀어지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시키신다.

십자가라는 비천하고 비참한 형틀 안에 이렇게 지고한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신비’(5,11 각주 참조)이다. 바오로는 이 신비를 선포하고자 강도 높고 과감한 문구들을 사용한다. 때로는 그 언어가 매우 과격하여, 논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해석을 할 때에는 그 의미를 완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구들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선포할 수 있도록 성령에게서 받은 직관을 드러내는 합당하면서도 힘찬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갈라티아서에 나타나는 문체나 생각은 완전히 바오로의 것이다. 그래서 이 서간이 그의 친서라는 친저성(親著性)은 지금까지 문제시된 적이 별로 없고, 오늘날 이론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여진다. 이 서간에는 “자녀”들에 대한 애정, 자기 사명에 대한 완전한 헌신, 복음의 진리에 대한 세상의 항거를 극복하려는 열정과 함께, 바오로라는 한 인간 전체가 담겨 있다.

4. 항구한 현실성

갈라티아서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교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진정한 신앙인인가, 믿음으로 모든 공포에서 해방된 사람들인가, 교회가 옛날 갈라티아의 신자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들이다. 물론 그리스도교 안에는 더 이상 유다교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갈라티아의 신자들을 위협하던 것과 같은 교리상의 위험도 크지 않다. 그러나 교회의 제반 제도가, 갈라티아서가 역설하는 것과는 반대쪽으로 신자들을 이끌어 가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기들의 구원은 틀림이 없다는 잘못된 확신, 그리스도의 율법을 하느님과 문제없이 지내려는 방편으로 전락시키고서는 그것을 다 준수하고 있다는 그릇된 자부심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갖가지 제도에 둘러싸인 교회는 자칫 신자들에게 그러한 오류를 조장할 수도 있다. 오순절에 성령으로 시작된 교회는 인간의 행위나 업적이라든가, ‘육적’ 곧 인간적 구조나 체제에 힘입어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에게 믿음과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가르치는 대신에 그들을 다시 종살이로 몰고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갈라티아서는 이렇게 교회에게, 그 제도가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지 반성하게 한다. 곧 유일한 복음을 바탕으로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 성령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공동체, 그리고 보편적인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느냐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는 비단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늘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재발견되는 복음의 힘에 따라 늘 새롭게 혁신하라는 부르심이기도 하다.